작성일 : 08-11-25 10:39
이의민 연구 (퍼온글 모음)
 글쓴이 : 이헌섭 (168.♡.212.154)
조회 : 3,078  
이의민정권연구 (상) - 금강야차
 
현재 대하드라마 무인시대는 이의민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의민은 이 사극이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사실상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가가 왜 무인시대라는 파란만장한 드라마에서 역대 4번째 집권자인 이의민에 초점을 맞추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집권자와 이의민을 비교하면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다른 집권자들이 비교적 오랫동안 무반 가문의 배경을 가지고 활동한 데 비하여 이의민은 순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고려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무반 가문이라 해도 무반 자체가 고려시대에 문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입지가 약했기 때문에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의민은 기록에서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의민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예이고 나아가 이 당시 무인시대의 상징적 인물이라 일컬을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 무인시대에서는 너무나 ‘황룡‘의 신화만을 강조한 나머지 이의민이 과연 역사적으로 어떠한 인물이었나를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드라마를 보완하는 입장에서 이의민에 얽힌 신화를 벗겨내고 비교적 실제에 가깝게 이의민의 생애를 복원하고자 한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이의민에 대한 연구성과가 미약한 편이다. 그러나 필자는 현재까지 이의민에 대해 언급한 학계의 성과를 참고하면서 이제부터 이 같은 작업을 수행해 볼 것이다. 이의민에 대해 기술하는 방법은 아무래도 고려사 이의민전을 따라 분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보며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다른 자료도 제시하며 논지를 전개해 나갈 것이다.
 
먼저 고려사 이의민전의 첫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의민은 경주 사람인바 그의 부친 이선(善)은 소금과 채를 파는 것이 직업이었고 모친은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이었다. 이의민이 어렸을 때 이선의 꿈에 이의민이 청의(靑衣)를 입고 황룡사(黃龍寺) 9층 탑(塔)에 올라갔으므로 그는 이 아이가 반드시 큰 귀인(貴人)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성인(成人)이 되어서는 신장이 8척이요, 힘이 절등하였으며 형 2명과 함께 그 시골구석을 횡행하여 고을 사람들의 우환거리가 되었으므로 안찰사 김자양(金子陽)이 잡아다가 심한 고문을 해서 두 형은 옥중에서 죽었으나 이의민은 죽지 않았다. 김자양이 그의 위인을 장하게 여겨 경군(京軍)으로 뽑아 넣었다. 이의민이 처와 함께 짐을 지고 이고 서울에 당도하니 마침 해가 저물어서 성문이 벌써 닫혀 있었으므로 성 남녘에 있는 연수사(延壽寺)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 날 밤 꿈에 긴 사닥다리가 성문으로부터 대궐까지 뻗쳐 있고 그는 그것을 타고 올라가다가 꿈을 깨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무엇보다도 위의 글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점은 이의민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언급되는 꿈 이야기들은 흡사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을 보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그 와중에 이의민이 범인과는 다른 운명을 타고났음을 보여주는데, 그의 용모부터 시작해 두 형이 죽었는데도 혼자 살아남고 또한 대궐까지 가는 그의 여정은 마치 한 왕조를 개창하는 ‘태조’의 위상에나 적합한 정도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려사’에서 반역열전에 실린 이의민을 새삼스럽게 미화했을 리는 없고, 이 같은 기록은 고려시대에 이미 정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기록은 이의민을 미화하거나 비하하는 어느 쪽이었던 간에 이의민이 당시 실제로 반역을 도모했음을 암시하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이 같은 추정은 나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 이의민의 신분은 그야말로 천민으로 나온다. 하지만 장차 이의민의 운명과 관련하여 전혀 상반된 또 다른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정선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이의민의 가계에 대한 기록을 보자.
 
시조 이양혼(李陽焜)의 자는 원명(元明)으로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의 왕자로 고려 때(12세기경) 귀화하였다. 그가 북송 휘종(徽宗) 때 금나라와의 전쟁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경주에서 정착하여 살았다. 그의 6세손 이의민(李義旼)은 고려 의종 때 무신 정중부의 난에 적극 가담, 큰 공을 세웠다. 7년 후 정중부는 경대승에 의해 피살되고 경대승도 5년 만에 병사하자 이의민이 정권을 잡아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내세워 14년간 고려를 통치했다. 이의민과 아들 이성순(李性純)이 고려 명종 26년 최충헌(崔忠獻)에게 화를 입고 손자 이우원(李遇元)이 정선으로 낙향하여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정선으로 하였다.
 
여기서 당연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의민의 선조가 현재의 베트남의 왕족이었다는 사실이다. 12세기에 귀화했다고 했는데 이 부분을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2세기 당시 베트남은 李씨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의민의 선조인 이양혼이 왕자로 고려로 들어온 경로가 흥미롭다. 만약 왕자로서 본국에 있었으면 고려로 올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설명하듯이 위의 기록은 그가 송나라와 금나라의 전쟁을 피해 고려로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는 곧 이양혼이 어떤 이유로 인해 본국을 떠나 중국에 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또한 만약 그가 육로로 들어왔다면 굳이 경주에 정착한 개연성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추정으로는 이양혼은 남중국에서 출발해 해로로 경주에 들어왔을 것이다. 아마도 본국 안남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으로 인해 패배자가 되어 본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른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위의 기록에서는 이양혼이 이의민의 6대조라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이의민의 생년을 어느 정도 복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북송 휘종때라면 1100-1125년 사이인데 여기에 금나라와 싸웠다 했으므로 금나라가 처음 건국된 것이 1115년이므로 공통분모는 1115년에서 1125년 사이가 될 것이다. 이 때 이양혼이 고려로 망명했다면 그가 젊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의민이 이미 1170년에 활동하고 있는데 불과 40년의 시차를 두고 이의민의 6대조가 되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양혼이 고려로 망명했을 때 그는 일족을 이끌고 왔을 것이며 여기에는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포함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양혼은 아주 고령의 나이로 와서 증손자까지 보았을 것이며 아마도 6대손이라는 시차를 맞추기 위해 가장 이른 시기인 1115년에 고려에 도착했다고 본다. 이를 계산해본다면 이양혼이 도착 당시 80세로 잡고 보통 20세에 혼인해 소생을 갖는다고 하면 1115년을 기준으로 아들(5대, 60세), 손자(4대, 40세), 증손자(3대, 20세)까지는 안남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고손자(2대)부터는 이 때 고려에서 태어났을 것이라 보고 사실상 고려인으로 귀화했을 것이니 이가 바로 이의민의 아버지이며 고려사에 나타나는 이선일 것이다. 이선이 1115년에 태어났다고 가정한다면 1170년경에는 55세였을 것이며 아들 이의민은 아마도 1135년에 태어났을 것이니 35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족의 신분이었던 이들 이양혼의 일족이 고려로 망명한 다음에 어떠한 경로로 천민으로 고려사에 나타날 정도로 몰락했던 것일까? 어쩌면 이들은 이미 고려에 오기 전부터 몰락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의민의 4대조까지 월남에서 갓 온 상태에서 바로 다음 대인 이의민의 아버지가 소금장수였다는 사실은 이들의 경제기반이 매우 취약했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사에서 이양혼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다. 보통 외국에서 왕족 정도의 신분으로 귀화하면 고려사 등에도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이양혼의 일족들은 매우 은밀하게 고려로 잠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본국의 세력다툼에서 패배해 국외로 도망친 이들이 제대로 부를 갖추었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고, 게다가 당시 고려가 국제적으로 활발히 교역하고 있었던 상황이고 보면 이양혼이 공식적으로 고려에 망명했으면 안남에서 이를 모를 리가 없었을 터이고 따라서 이양혼 일족의 안위 자체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양혼 일족은 고려에서 매우 험난한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정체불명의 외국인을 위한 자리는 오늘날까지도 그렇지만 험한 직업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안남에서 왕족이 고려에 망명하는 경우는 서기 1225년에 한 번 더 발생한다. 바로 이양혼과 같은 일족이 1225년에 외척인 진씨에 의해 왕조가 멸망하자 고려의 황해도 지역으로 망명한 것이었다. 이 후예가 지금의 화산 李씨가 되었다고 하고 얼마 전 티비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된 적이 있다. 어쨌든 고려사에서 이의민이 천출로 기록된 것에는 이러한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되며, 바로 이 같은 배경 때문에 고려사에서도 상징적으로 왕족에게나 쓰는 표현을 사용했으리라 본다. 이렇게 본다면 이의민 역시 조상들로부터 그 유래를 전해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에 상반되는 자기 현실에 대한 불만을 분출할 활로를 모색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기회를 제공하게 된 계기가 바로 1170년 무신정변이었던 것이다.
 
이의민은 수박(手搏)을 잘 쳤으므로 의종이 그를 사랑했으며 대정(隊正)으로부터 별장(別將)으로 승진했다. 정중부의 난 때는 이의민이 살해한 사람의 수가 제일 많았다. 그리하여 이의민은 중랑장(中郞將)으로 되었다가 즉시 장군으로 승진되었다. (고려사 이의민전)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의민은 일찍이 의종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정변주동자인 이의방의 눈에 띄어 중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신정변 이후 이의민의 빠른 출세에서 우리는 그가 매우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의 ‘뛰어난 능력’이란 물론 무신정변 이후 정적에 대한 가차 없는 숙청의 선두에 섰음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이 때 이의방은 ‘정변동지’인 이고와 채원을 제거하는데 이의민의 빠른 승진은 곧 이의민이 이 시기에 맹활약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드라마에서도 이의민은 이의방의 심복으로 나오는데 이 부분은 아마도 역사적 사실과 일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의방의 이의민에 대한 신뢰는 다음의 사건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명종 3년에 김보당이 기병(起兵)하면서 장순석(張純錫), 유인준(柳寅俊) 등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삼았던바 장순석, 유인준 등이 거제에 이르러 의종을 데리고 나와서 계림에 있었다. 정중부와 이의방이 이것을 듣고 이의민과 박존위(朴存威)를 시켜서 군사를 영솔하고 남녘으로 긴급 출동케 하였다. 이의민 등이 계림에 당도하니 어떤 사람이 길을 막고 말하기를
 
ꡒ전왕(前王)이 이곳으로 온 것은 고을사람들의 의사가 아니라 장순석, 유인준 등이 꾸민 일이다. 그 무리는 불과 수백 명이며 다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괴수만 제거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다 흩어져 달아 날 것이니 잠깐만 기다려 주면 내가 돌아가서 처치하겠으니 본토 사람들에게는 죄를 가하지 말기를 바란다ꡓ
 
라고 하였으므로 이의민은 말하기를
 
ꡒ내가 있으니 염려 말라!ꡓ
 
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이 고을로 들어가서 여러 사람들과 모의하기를
 
ꡒ장순석의 무리는 지금의 임금이 파견한 사람이 아니니 죽인들 어떠하랴!ꡓ
 
라고 말하고 그 밤으로 병정을 모아서 포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그 머리들을 도로(道路) 좌우편에 줄을 지어 놓고 이의민이 오기를 기다렸으며 의종은 객사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간수(看守)하였다. 이어 이의민 등을 인도하여 입성한 후 의종을 곤원사(坤元寺) 북녘 못(淵)으로 데려다가 술을 몇 잔 올리고 이의민이 왕의 등마루 뼈를 꺾었는데 손을 대자 소리가 났다. 이것을 보고 이의민은 껄껄대며 웃었다. 박존위는 그 시체를 이불에 말아서 가마(釜)두 개를 합친 틈에 끼워서 연못 속에 던졌더니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어나 모래가 날아서 사람들이 모두다 소리 지르며 달아났다. 그 절의 헤엄 잘 하는 중이 물 속으로 들어가서 가마를 떼어 가고 시체를 버렸더니 시체가 물가로 나와서 여러 날 있었으나 물고기나 새들이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전 부호장(前副戶長) 필인(弼仁) 등이 비밀히 관을 마련하여 물 언덕에 묻었다. 이의민은 이것을 공으로 자인했으며 대장군으로 되었다. (고려사 이의민전)
 
이의방이 이의민을 급파해 폐주인 의종을 죽이도록 한 연유는 무엇보다도 이의민이 바로 경주 출신이었던 점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을 것이다. 즉, 그 동기는 단순했을 것이지 무슨 드라마의 설정처럼 이의방이 이의민에 대한 견제 차원이나 정치적 포석 운운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의민이 경주에 급파된 임무는 일차적으로 의종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바로 이의민이 이의방의 심복 중 경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경주는 폐주복위운동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이의방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평정해야 했는데 한때 경주에서 파락호 노릇을 했던 이의민만큼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도 이의민이 먼저 경주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그 다음에 의종을 직접 살해한 점에서도 이 부분은 여실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때 파견된 이의민의 심중은 어떠했을까? 과연 드라마의 묘사처럼 이의방을 원망하면서 마지못해 경주로 향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먼저 위의 사료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의민은 위에서 보이듯이 의종의 신임을 받아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그러므로 경주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의종에 대한 그의 심경은 복잡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경주에서 반란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적들을 제압하는 심리전을 볼 때 이의민은 결코 무지막지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포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의민은 이미 이 때에 들어 ‘정치군인’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마침내 의종을 죽이는 장면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의종을 최소한의 예우를 갖춘 다음에 죽이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고 의종을 죽일 때 ‘껄껄 웃었다’ 하는데, 이 장면을 두고 여러 사람들은 갖가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웃음의 정체는 뒤이어 이의민이 의종을 죽인 것을 ‘공으로 자인했다’ 하는 데서 어느 정도 드러난다고 본다. 즉, 이의민은 불행했던 선조들의 한을 갚기 위해 출세지향적으로 무인의 길을 들었고, 이제 자신이 한때 모셨던 주군을 죽이는 데에도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의민은 이로 인해 ‘황제를 죽인 역적’이라는 오명을 주홍글씨처럼 평생 달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의민은 그러한 사실 조차도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장차의 입신양명을 위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남쪽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이의민은 다시금 이의방의 신임을 받았다는 사실만은 자명할 것이다. 다음 기록을 보자.
 
다음해(1174년)에 조위총(趙位寵)이 기병(起兵) 하였으므로 이의방은 이의민을 정동대장군지병마사(征東大將軍知兵馬使)로 삼았다. 그래서 이의민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했는데 눈에 화살이 명중되었다. 그래도 철령으로 진군하여 사면으로부터 북을 치며 소리를 지르고 급격히 돌격해서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연주(漣州)를 한창 공격하고 있을 때 흥화도(興化道)의 적 수천 명이 와서 북천(北川)에 둔(屯) 치고 구원하여 나섰으므로 이의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막아 싸우면서 칼날을 헤치고 적진에 들어가서 말 탄 적장 한 명을 죽였더니 적병들이 물러갔다. 그 후부터는 적병이 이의민의 군대가 온다는 말만 들으면 곧 도망치고 감히 대전하지 못하였다. 그 공으로 상장군이 되었다. (상동)
 
서기 1174년에 일어난 조위총의 반란은 당시 이의방정권에 있어서 일대 위기였으며, 한 해 전의 김보당의 그것과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이러한 대규모 도전에 이의방정권은 이의민을 선봉으로 삼아 진압하게 했으니 이 때의 이의민의 위상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의민이 반란을 진압하는 와중에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이의민 대신 이영진이 화살을 맞아 애꾸가 되는 설정으로 나왔는데, 이후 이의민이 애꾸가 되었는지, 아니면 눈을 고쳤는지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당시 의학 수준으로 미루어보아 이의민은 마치 궁예처럼 애꾸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8척의 애꾸 거인을 상상해보자. 더구나 이의민은 화살을 맞은 이후에도 놀라운 용력으로 적들을 진압해 뛰어난 무공을 자랑하고 있다. 결국 이의민은 이러한 무공으로 상장군에 올랐으니 이의방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같은 해 이의방이 정균 일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황도 개경에서는 정권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이후 의종에 대한 복권을 시도했던 정중부정권이고 보면 당연히 의종을 직접 죽인 당사자인 이의민을 공적으로 삼았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그런데 위의 기록 이후 이의민에 대해 나타나는 다음 기록은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명종 7년에 조위총의 패잔병이 다시 보향산(保香山)에 집합하였으므로 이의민이 8장군을 데리고 출정 공격하여 3백여 명을 죽이고 승전했다. (상동)
 
경신일에 서북로병마사 이의민(李義旼)이 서적(西賊) 3백여 명을 죽이고 승전 보고를 하였다. (고려사 명종 8년-1178년-1월)
 
이의방정권하에서 나름대로 승승장구하던 이의민이었으니 이를 무너뜨리고 새로 성립한 정중부정권과는 서로 상극의 위치에 있었을 것임은 너무나도 뻔한 상황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서 이의민은 정중부정권에 대해 조위총의 반란 잔당을 진압하는 보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의방이 죽은 1174년에서 첫 전공보고가 나타나는 1177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 앞서 필자가 발표했던 ‘정중부정권연구’의 내용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르면 1176년에서 1177년 사이에 정중부정권 내에서 송유인에 의한 ‘친족 쿠데타’가 일어났다. 즉, 실정을 거듭하던 집권자 정균의 틈을 노리고 망이의 난의 혼란을 이용해 2인자였던 송유인이 처남을 정치적으로 숙청하고 고려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이의민에 대한 정중부정권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우선 필자가 밝혔듯이 정균은 비록 조위총의 난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일단 자신이 집정이 되자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사안 역시 조위총 문제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정균은 조위총을 진압하는 이의민을 그냥 방관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의민은 조위총과 대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적들이 웅크리고 있는 황도로 돌아올 입장이 못되었을 것이고 그냥 북계에 있는다면 조위총과 계속 투쟁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정균은 말하자면 ‘이이제이’의 수법을 쓴 셈이었지만 덕분에 북계는 적과 아군이 애매해지고 서로 엉킨 ‘무법천지’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한번은 조위총이 이의민을 끌어들이려는 방법을 쓰는 장면을 보여주었었는데 실제 당시에도 있음직 한 설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송유인이 정균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상황이 일변하였다고 본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송유인은 정권을 잡자 초반에는 지지세력의 확보를 위해 ‘찰방사’로 표방되는 많은 회유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래서 이의민도 일정한 거래를 통해 황도로 복귀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의민 개인적으로는 이의방과의 친분 때문에 정중부의 일족인 송유인에 대한 원한이 있었을 것이나, 원체 출세지향적인 그의 기질로 보아 이 같은 현실과 타협했을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이의민이 ‘8장군’을 거느리고 출정했다는 기사는 그가 일단 황도 개경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표현 또한 한층 업그레이드된 그의 위상을 암시해준다. 게다가 송유인이 정권 후반기에 들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자 이의민은 여기에 협조했을 개연성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송유인의 숙청대상들은 대부분 정중부 계열의 고위무인들이거나 무인정변을 부정하는 친문신 무인들이나 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했기 때문에 송유인의 정권에 이르러 이의민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대승이 송유인을 처단하고 정권을 쥐자 이의민은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한다. 다음 기록을 보자.
 
명종 9년에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처단한 후 조정 관원들이 예궐(詣闕)하여 축하할 때 말하기를
 
ꡒ임금을 죽인 놈이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축하인가!ꡓ
 
라고 하였다. 이의민이 이것을 듣고 크게 겁이 나서 자기 집에 용사(勇士)를 모아 두고 경비했으며 또 경대승과 도방(都房) 사람들이 제각기 꺼리는 자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더욱 겁이 나서 자기 집 문전 골목 밖에 대문을 세우고 밤이면 경비했다. 이것을 여문(閭門)이라 했는데 서울 방리(坊里)마다 모두 이를 모방하여 문을 세웠다. (고려사 이의민전)
 
경대승은 필자의 ‘경대승정권연구’에서도 보았듯이 ‘복고’를 표방한 무인이었다. 게다가 이의민보다도 훨씬 어린 청년장군이었고 또 의종을 죽인 이의민을 위에서 보이듯이 노골적으로 지목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경대승정권 자체가 송유인의 탄압에 위기를 느낀 정중부계 고위무인들의 도움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이의민의 입지는 자연히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경대승은 비교적 뼈대있는 ‘청주가문’의 무장이었기 때문에 천민출신인 이의민에 대한 은근한 ‘엘리트 의식’ 또는 ‘귀족의식’이 있었을 법도 하다. 경대승의 정변이 분명히 송유인을 포함한 정중부정권 자체를 무너뜨렸음에도 송유인을 도운 가장 강력한 무인이었을 이의민을 어떻게 하지 못한 것은 분명 이 때 이의민이 황도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시사해준다. 그럼에도 위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이의민은 경대승에 대해 극도로 수세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아마도 경대승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경대승정권 출범 시 그를 도왔던 광범위한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자신을 향해 포위해 들어오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이제 이의민에게 정치적인 일대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때 이의민의 나이 44세였다.
 
이의민정권연구 (중) - 신도재상
 
만약 이의민이 일찍이 자신의 세력구축을 게을리 했었으면, 그는 경대승이 집권한 후 제 1순위로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대승이 적어도 기록에 따르면 이의민에게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손을 못 댄 또 다른 까닭은 일찍이 필자가 ‘경대승정권연구’에서 밝혔듯이 경대승정권의 내부투쟁이 일어나 경대승 자신이 집권자라는 명목만 남고 오히려 ‘고위무신’들이라는 집단에게 압도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고위무신’들은 다름 아닌 무인정변 이래 조정에서 집권자들보다는 한 등급 아래지만 군권을 쥐고 막후에서 권력을 조정하던 두뇌회전이 빠른 장군들을 가리킴이다.
 
그렇다면 이의민의 세력은 종국적으로 어떤 세력들을 지칭하는 것일까?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일단 이의민과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행동을 같이하던 동지급 ‘천민출신’ 무인들을 들 수가 있겠다. 고려사 열전에 나와 있는 출신들만 따져도 이영진, 석린, 조원정, 최세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무인정변 시절때부터 이의민과 같이 행동을 했고 특히 경대승이 일종의 '엘리트 의식'으로 천민출신 무인들을 압박했을 때, 당연히 이의민과 공동보조를 맞추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서 무인정변 이후 군부의 세력판도를 한번 반추해보자. 일찍이 무인층은 출신 자체는 이의방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상중류층은 드물었다. 정중부나 경대승 같은 경우에도 정중부 자신은 천인에 속했으나 일찍 조정에 출사하여 출세했기 때문에 이의민같이 고난의 세월을 겪은 시기는 짧았다. 경대승같은 경우는 이미 아버지 경진때부터 안정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신분에 대한 ‘열등의식’을 느낀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의민 같은 경우는 그 태생적 배경이 매우 복잡했고 나이에 비해 출세가 늦었기 때문에 이전의 집권자들과 비교해 상당한 ‘열등의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의식은 이의민으로 하여금 천민계 무인들과의 결속력을 강화하게 하는 계기를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대승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인들간의 권력투쟁이 반복되면서 10년의 세월 동안 무인정변의 ‘고위급’ 주역들은 경대승이 정중부 일파를 제거함으로써 거의 사라졌고, 이제 이의민 등 천민계 무인들과 ‘고위무인들’, 그리고 원래 천한 신분출신인 군부 수장들만이 남게 되었다. 다시말해 이제 무인정권의 향방은 천인계 무인들로 ‘세대교체’가 되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들 ‘천인계’ 무인들의 핵심에 이의민이 있었다.
 
따라서 경대승의 집권 이후, 그를 견제하는데 성공한 ‘고위무인’ 세력들은 당연히 자신들을 도와줄 무인세력들로 이들 ‘천인계’, 즉 이의민과 손잡을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앞서 다른 글에서도 보았듯이 황제인 명종마저 경대승에게 크나큰 반감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제 경대승에 맞서는 ‘고위무인-이의민-황제’의 3각체제가 완성이 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이의민은 경대승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명종 11년인 서기 1181년에는 형부상서 상장군에 승차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의 이의민의 실수로 그는 잠시 정계에서 사라지는 불운을 맛보는 것이다.
 
지난 때에 경대승이 허승(許升)을 죽였을 때 이의민이 병마사로서 북방 국경지대에 나가 진수하고 있었던바 어떤 사람이 나라에서 경대승을 죽였다고 잘못 전달하였더니 이의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ꡒ내가 경대승을 죽이려다가 아직 죽이지 못했는데 이 일은 누가 꾸몄을까? 나보다 손이 빠르구나!ꡓ
 
라고 하였다. 경대승은 이 말을 듣고 앙심을 품었다.
 
이의민이 돌아와서는 겁이 나서 불안을 느끼고 병이라는 핑계로 고향으로 떠나갔다. 이의민은 왕이 여러 번 소환해도 오지 않았으며 그 후 경대승이 죽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왕이 그가 반란을 꾸밀까 두려워서 병부상서 벼슬을 주고 중사(中使)를 시켜서 간곡히 타일렀더니 그제야 돌아왔다. 왕은 그를 편전(便殿)으로 불러서 접견하였다. 왕은 실상 내심으로는 무섭게 여기고 꺼리었으나 외면으로는 은총을 표시하니 온 나라가 임금의 유약함을 개탄했다. 왕은 그 후 곧 이의민에게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 벼슬을 더 주었다. (고려사 이의민전)
 
위의 기록에서 먼저 눈에 띄는 사실은 경대승의 집권 이후 허승과의 세력다툼의 와중에 이의민 자신은 변방에 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본 바로는 이의민은 1181년까지 계속 황도에 머무르고 있었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도 건재했는데 과연 무슨 일로 변방으로 나갔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이는 경대승이 자신을 계속 주목함에 부담을 느낀 이의민이 지지세력들과의 조율을 거쳐 일단 경대승의 예봉을 피하고자 택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고위무인’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허승이 경대승과 대결하는 사건이 터졌고, 경대승 측은 오히려 이를 역이용하여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일부러 경대승이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흘려 이의민의 경솔한 언동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실제로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긍극적으로 ‘주적’인 이의민을 죽이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반대파 세력들의 기세를 꺾으려는 정치적 계산이 없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맥락에서 기록에 이의민이 겁이 나서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과장으로, 실제로 이러한 함정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이의민이 선택한 또 하나의 ‘고육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후 약 2년 동안 이의민은 일찍이 김보당의 난 이래로 경주에서의 나름대로의 세력기반을 또한 지속적으로 닦아놓는 데에 매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대승이 1183년 7월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이제 이의민이 없는 조정의 세력판도는 또 한번 바뀌게 되는데, 위의 기록에서 황제가 이의민이 반란을 꾸밀까 두려워서 계속 그를 불러올렸다 하는 부분을 유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경대승의 죽음 직후 조정의 군부세력의 역학관계를 생각해보자. 명종이 기록에서 나오듯이 도방세력을 일망타진한 데에는 당연히 경대승의 반대세력인 ‘고위무인’들과 천인계 무인들의 협력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경대승의 공백을 이들이 채웠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천인계 무인들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아직도 경주에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이의민의 반란을 두려워했다는 표현은 아마도 이의민보다는 그를 추종하는 천인계 세력들이 구심점 확보를 위해 이의민을 불러올리라고 황제를 위협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기록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적나라한 표현을 쓴 것은 그만큼 공개적으로 이의민의 세력이 고려조정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모습을 반영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로 원로급인 ‘고위무인’들 세력은 자연적으로 소멸해갔을 것이고, 반면 상대적으로 젊은 축에 속하는 ‘천인계 무인’ 세력들만이 건재해 두각을 나타냈을 것임을 추측하기에는 어렵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기록에서 황제가 그토록 이의민을 불러올리기 위해 그야말로 ‘필사적 노력’을 하는 저간의 사정을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제 황제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고려의 ‘대세’로 나서는 천인계 무인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당시 상황은 결국 이의민의 ‘장기집권’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의민이 과연 언제 경주생활을 청산하고 황도로 ‘금의환향’했는지는 다음의 고려사 명종치세의 기록들로 추정할 수 있다.
 
12월 경인일에 이광정(李光挺)을 수태보판이부사로, 한문준(韓文俊)을 판병부사로, 문극겸(文克謙)을 중서시랑평장사판호부사로, 문장필(文章弼)을 동지추밀원사어사대부로, 두경승(杜景升), 염신약(廉信若), 조원정(曹元正) 등을 모두 추밀원 부사(副使)로, 이의민(李義旼)을 공부 상서로 각각 임명하였다. (1183년)
 
12월 갑신일에 한문준(韓文俊)을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로, 최세보(崔世輔)를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로, 문극겸(文克謙)을 태자태보로, 문장필(文章弼)을 참지정사로, 김광식(金光植)과 임민비(林民庇)를 추밀원부사로, 이의민(李義旼)을 수사공좌복야로, 정방우(鄭邦佑)를 지어사대사로, 이지명(李知命)을 한림학사승지로, 정윤당(鄭允當)을 이부원외랑으로, 이거정(李居正)을 좌정언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1184년)
 
위의 기록들에 따르면 경대승이 죽은 지 5개월 후에 이의민이 공부상서에 임명되고 1년 뒤인 1184년 12월에는 수사공좌복야로 승진한다. 그런데 수사공좌복야는 앞서 고려사 이의민전에서도 나온 벼슬인데, 이때 이의민은 이미 황도로 올라와 정계에 복귀한 뒤였다. 그러므로 이의민은 최소한 1184년 12월 이전에 황도로 복귀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의민이 경대승이 죽은 1183년 7월과 1184년 12월 사이 어느 시기에 구체적으로 황도로 상경했느냐이다. 학계에서는 대략 중간쯤인 1184년 2월 정도로 보는데 필자도 여기에 동의하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이의민을 지지하는 ‘천인계’ 무인들이 그토록 황제를 닥달하여 빨리 이의민을 불러올리라고 했음에도 왜 이의민은 경대승이 죽은 지 대략 7개월 이후에야 올라왔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인데, 우선 필자는 위에서 제시했던 자료에서 관직의 분포상황에 주목하고자 한다. 즉, 경대승이 죽은 이후 조정의 고위관직들은 모두 문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반면 이의민이 복귀한 이후 오히려 천민(이의민)계 무인들이 승진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비록 경대승정권의 문인우대정책의 소산이라고는 하나 문인들이 조정의 노른자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이들을 뒷받침하는 특정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였을까? 우선 이의민계 무인들을 견제하려는 ‘고위무인’들의 잔당들을 생각할 수 있겠다. 또한 조정에 충성을 다하는 두경승 같은 무인들이 있다. 그리고 이의민 복귀 전 관직에 일찍이 이의민계로 분류되었던 조원정의 존재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경대승이 죽은 이후 일부 이의민계 무인들도 문인들을 지지하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의민의 복귀전에 이미 조정은 이의민을 견제하려는 세력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고, 이를 인지한 이의민 역시 일정한 탐색기간을 거쳐 시간을 두고 상경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의민이 숙고 끝에 개경으로 상경한 까닭은 물론 자신이 복귀해서 집권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견제세력이 있다 하나 이제 군부의 주류를 이루는 무인들은 모두 자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단 권력을 잡은 다음에 자신의 정적들을 정치적으로 요리하고 제압하는 것은 모두 이의민의 몫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위의 기록들에서 관직의 이동상황을 보면, 이의민계 무인인 최세보가 올라가고 있어 이의민의 장악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의민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은 아직 아니었다. 이때부터 이의민정권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두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문극겸과 두경승이었다.
 
문극겸은 이미 무인정변 이전부터 조정에서 직간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런 그의 인품을 높이 사 일찍이 이의방은 그의 동생 이린을 문극겸의 사위로 만들어 자기 편으로 묶어두려고 하였으나 역설적이게도 이준의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런 인연이 또 다시 문극겸이 정중부와 경대승시대를 생존하게 하는 버팀목이 되었지만 이 와중에 송유인과도 앙숙이 된 바도 있었다. 그러나 반면 개인적으로는 과실도 있어 정적들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민시대까지 무인시대 문인들의 상징적인 인물로 놀라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갓 정계에 복권한 이의민의 입장에서는 문극겸을 잘 요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면 두경승은 직선적인 성격으로 특히 조위총의 난 때 대활약을 해 이의민과도 안면이 있었고 그러한 충성심으로 조정을 떠받드는 대표적인 무인이었다. 그러므로 그 또한 가뜩이나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던 역대 무인 집권자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의민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음의 몇 기록들이 그러한 사실들을 증명해준다.
 
20년에 이의민은 동중서문하평장사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로 되었는데 당시 재상은 무관 출신이 많았다. 지추밀원사 김영존(金永存)과 부사 손석(孫碩)은 같이 추밀원에 있으면서 서로 욕지거리하는 양이 마치 두 범이 서로 으르렁대는 것 같아서 동렬(同列)들이 위축되어 슬금슬금 빠져 가고 오직 부사(副使) 왕도만이 조용히 달래 말리었다.
 
하루는 이의민이 두경승(杜景升)과 중서성에 같이 앉아서 자랑하여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힘자랑을 하기에 내가 이렇게 때려 눕혔다”
라고 하면서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기둥이 흔들렸다. 그러자 두경승이 말하기를
“어느 때 일인데 내가 빈 주먹으로 후려쳤더니 뭇사람이 모두 도망쳤다”
라고 하면서 벽을 쥐어지르니 주먹이 벽에 묻혔다. 그 후에도 이의민이 두경승과 함께 성(省)에서 일을 토의 하다가 의견이 충돌되어 주먹을 들어 기둥을 치면서
 “네가 무슨 공이 있다고 지위가 나보다 높은가!”
 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중서성에는 이(李)가와 두(杜)가요, 추밀원에는 손(孫)가와 김(金)가라”
 라고 하였다. 또 어떤 문사는 시를 지어 조소하여 이르기를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 황각에 앉은지 3∼4년에
주먹 바람은 만 번은 더 불었네”
라고 하였다.
 
吾畏李與杜
屹然眞宰輔
黃閣三四年
拳風一萬古
 
                                                        -고려사 이의민전 -
 
 
양부(兩府)와 문무 백관들이 그의 집으로 모여서 축하하였는데 중방(重房)의 여러 장군들이 축하연을 베풀고 술을 취하도록 마신 후 각기 악기(樂器)를 잡고 즐겼는데 두경승은 노래를 부르고 수사공 정존실(鄭存實)은 소관(小管)을 불었다. 이의민이 보고 노하여
 
 
“재상이 어찌 광대와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불고 있단 말인가?”
 
 라고 하였으며 이어 연회를 파하고 돌아갔다.
 
그 후 두경승은 이의민과 함께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되었는데 석차가 이의민의 위에 있었으므로 이의민이 중서성(中書省)에서 욕설을 퍼부었으나 두경승은 웃기만 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 고려사 두경승전 -
 
 
여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의민의 두경승에 대한 감정은 결코 호의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경승이 숙청당하지 않고 오히려 이의민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은 은연중에 이의민을 견제하려는 세력들이 그를 버팀목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통설과 같이 황제 또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의민 또한 두경승을 함부로 다루지 못했고, 두경승 또한 이의민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취하는 선에서 공연한 분란을 자초하지는 않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문극겸으로 표방되는 문인세력과 두경승으로 표방되는 온건무인세력들 조차도 이의민의 대세력을 견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의민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는 차원에서 측근인 최세보를 시켜 ‘의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다음 기록을 보자.
 
최세보는 본래 한미한 가정 출신으로 글을 알지 못하였다. 의종 때에 금군(禁軍)대정으로 임용되었는데 정해(丁亥)년 화살이 왕의 수레 옆에 떨어진 사건이 있을 때(의종 21년)에 왕이 봉은사에 갔다 돌아올 때에 김돈중(金敦中)의 말이 당긴 활에 충격되어 화살이 왕의 옆에 떨어졌다. 최세보가 그 근처에 있었으므로 의심을 사서 남해로 귀양갔었다. 후에 무관들의 발호한 때를 만나게 되자 다시 전직으로 소환되었다. 명종 초년에 여러 번 승직되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되고 14년에 문하시랑평장사판병부사상장군(門下侍郞平章事判兵部事上將軍)으로 승진되었다. 어떤 사람이 중방(重房)에 신소하기를
 
“수국사 문극겸(修國史文克謙)이 의종의 살해당한 사건을 사실대로 직필(直書)로 ‘임금을 죽인 것은 천하의 제일 큰 악이다’라고 기록하였으니 금후에는 마땅히 무관으로 겸임시켜 다시는 직필로 쓰지 못하게 하라!”
 
고 하였다. 문극겸이 이 말을 듣고 겁이 나서 왕에게 은밀히 그 일을 보고하니 왕은 무관들의 의사를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이 옛 제도와 배치됨을 미워하면서 최세보를 동수국사(同修國事)로 임명하였는데 최세보가 임의로 사실을 왜곡하여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하여 의종실록(毅宗實錄)에 누락되고 생략되어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은 것이 많다. 문극겸이 일찍이 쇄사당에서 최세보에게 농담하기를
 
 
“문관으로 상장군이 된 것은 내가 처음이요. 무관으로 동수국사가 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다”
 
라고 하고 서로 껄껄 웃었다. 그때 최련(崔連) 김부(金富)도 또한 장군으로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니 무관으로서 문관직을 겸임한 것은 이 세 사람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고려사 최세보전)
 
이 ‘의종실록사건’은 서기 1186년 12월의 일인데, 이 사건의 발단은 문극겸이 의종살해사건을 직필코자 기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의종을 살해한 이는 다름 아닌 이때의 집권자 이의민이었기 때문에 문극겸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철저히 문인의 관점에서 기록된 위의 글이지만 어쨌든 이런 문극겸의 시도는 이렇게 함으로써 무인정권의 정통성을 절하해 자신들의 명분을 쌓고자 한 고차원의 정치술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천인계 무인들을 물론 앞서의 경대승의 경우처럼 황제인 명종까지도 크게 자극하는 처사였다. 위에서 문극겸이 무인들의 반발에 직면해 황제를 만났을 때도 황제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극겸은 아마도 무식한 무인들이 이 편찬사업의 의미를 제대로 몰라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오판을 한 듯싶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서도 보이듯이 그것은 무인들을 과소평가한 소치였으며,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문인들의 입지는 더욱 축소되었던 것이다.
 
사실 무인정변 이후 문인들은 계속 무인들의 눈치를 봐야했고 정사도 무인들의 회의체인 중방에서 봐야 할 정도로 굴욕적인 시대를 살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문인들은 무인들 중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세력과 제휴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경대승과 두경승이었다. 경대승정권때 잠깐 문인우대정책으로 기를 펴는가 싶었는데 다시 경대승과 상극인 이의민이 집권함으로써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의민정권이 본궤도에 오르자 문인들에 대한 경계심리 또는 차별은 더욱 심화되었다. 다음 기록에서도 이는 여실히 나타난다.
 
여름 4월 정묘일에 여경문(麗景門)이 준공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아뢰기를 여경문의 높이와 넓이를 향성문(向成門)과 같게 하자고 하니 왕이 이를 승인하였다. 여경문은 동쪽에 있고 향성문은 서쪽에 있었는데 동쪽이 서쪽보다 높으면 문관 세력이 무관을 압도할까 염려되어 이 의견이 있었던 것이었다. (고려사 1186년 기록)
 
일개 성문의 이름조차도 문인들을 견제하는 심리가 이때에도 팽배할 정도로 이의민계 무인세력은 문인들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문인들은 공포심과 함께 나름대로 자구책을 모색했을 것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그 방편의 하나가 바로 ‘이이제이’, 즉 당시 주류였던 이의민계 무인들의 분열을 조장했으리라 본다.
 
병오 16년(1186) 봄 정월 계미일에 영동정(令同正) 박원실(朴元實)이 근거 없는 말로 중방(重房)에 고발하기를
 
ꡒ교위(校尉) 장언부(張彦夫) 등 8명이 반란을 도모한다ꡓ고 하였다.
 
중방에서 언부를 체포하여 사실을 심문하니 언부가 대답하기를
 
ꡒ현재 정권을 잡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이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특히 백은(白銀)을 좋아하여 이것으로써 벼슬과 품계를 팔면서 온갖 불법 행위를 다하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고 입에 백은을 물려서 서울 지방에 널리 구경을 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이 자가 은을 탐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ꡓ
 
라고 하였다. 언부는 마침내 살해당하고 원실은 산원(散員) 벼슬로 뛰어올랐다. (고려사 명종조)
 
위의 기록의 논조가 장언부를 동정하는 것으로 보아 장언부는 분명 문인들로 대표되는 반 이의민세력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장언부는 실제로 문인들과 결탁해 반란을 도모했을 것이다. 장언부의 입을 통해 나오는 당시 집권층에 대한 성토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 주된 논조는 이들의 부패를 지적한 것이었는데, 사실 이의민계 무인들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누구하나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이가 없다. 그것은 이의민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 기록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한다.
 
일찌기 이의민은 낙타교(駱駝橋)에서 저교(猪橋)까지 뚝을 수척의 높이로 쌓고 뚝 좌우편에 버들을 심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신도재상(新道宰相)이라 하였다. (고려사 이의민전)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심리를 한번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고생을 한 다음 부귀영화를 얻게 되면 이것을 과시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이를 절제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무인들처럼 문인적 소양이 없는 이들, 특히 비루한 신분 출신이면 이것이 더욱 남용될 확률이 높아진다. 현대사에서도 우리는 전 모 대통령과 그 일가친척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이의민정권의 부정부패만을 가지고 이를 단죄한다는 것은 명분상으로 너무나 약하다. 더구나 부정부패가 이의민정권 당시에만 팽배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무인정변 이후 꼭두각시 황제로 있었던 명종 역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는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왕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다만 총애하는 근신 환관들과 의논하여 참관(參官) 이상의 임명서에 왕이 친히 서명한 다음 그 원안을 밀봉하여 정조(政曹)에 회부하곤 하였는데 이것을 하비(下批)라고 불렀다. 정조(政曹)에서는 원안대로 베껴서 발표할 뿐이요 다시는 아무런 품의 절차도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벼슬자리를 구하는 것이 한 개 풍습으로 되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며 어질고 나쁜 자가 서로 혼동되어 구별할 수 없었다. 왕의 총애하는 근신 폐신(嬖臣) 환관들이 청탁을 받게 되면 왕은 뇌물을 얼마나 받았느냐고 물어 봐서 많이 받았다면 그 청을 기꺼이 들어주고 그렇지 않다면 시일을 끌면서 뇌물을 많이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런 까닭에 환시들이 나라의 정권을 남용하여 권세를 쓰는 품이 지난 때의 어느 왕조보다도 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이 즉위하기 전에 광정(光靖)왕후가 일찍 죽었는데 다시 왕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즉위한 후에는 사랑하는 궁녀와 서자들이 권세를 쓰고 뇌물을 받아먹으며 나라의 정권을 좌우하니 서울과 지방에서는 모두 실망을 하였다. (1184년 고려사 명종조 기록)
 
문인들이 주축으로 추정되는 반 이의민세력의 공세는 이걸로 그치지 않았고, 급기야 1180년대 이의민정권의 최대 사건인 1187년 ‘조원정의 난’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17년 7월에 조원정은 또 중서성 공사전 조(租)를 횡취하였으므로, 평장사 문극겸, 최세보(崔世輔), 문장필(文章弼), 두경승(杜景升), 좌상시 이지명(李知命), 직문하 김순(金純), 급사 중 문적(文迪) 등이 처벌할 것을 청하여 글을 전후 5번 올려서야 비로소 좌천시켰는바 그는 공부상서로 치사(致仕)하였다.
 
조원정의 아들 조영식(曹英植), 조영적(英迪), 조응륜(應倫)과 사위 이주(李柱) 등은 그 탐욕스럽고 횡포하기가 더욱 심한 놈들인데 임금의 측근에 있었으므로 중방에서 주청(奏請)해서 철직시켰다.
 
그 달 그믐날 밤 2경(更)에 도적 70여 명이 나타나서 궁성 담장을 넘어서 수창궁에 들어와 추밀사 양익경(梁翼京), 내시 낭중 이규(李揆) 등을 죽였으며 그 외에도 살상이 심히 많았다. 그러는 통에 숙위(宿衛)하던 근신들이 모두 도망쳐서 도적놈들은 내시원(內侍院)으로 와 촛불을 비쳐 도처에서 사람만 보면 죽이면서 침전에까지 이르러 외치기를
 
“고영문(高令文), 준백(俊白) 등이 이미 악도를 제거한즉 마땅히 다시금 사직을 보위하겠다”
 
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묻기를
 
“누가 너희들의 주장인가?”
 
라고 하니 도적들은 거짓말로 재상 두경승과, 급사중, 문적 등이라고 하였다. 좌승선 권절평(權節平)이 도적의 무리가 고립된 것임을 알고 가만히 궁문을 나와 가구소(街衢所)로 가서 군사를 소집하여 궁문 밖에 와서 땅이 뒤흔들리게 일제히 고함쳤더니 도적들은 무서워서 서문으로 도망쳤다.
 
이때에 중랑장 고안우(高安祐)가 사변을 듣고 말을 달려서 시루교(市樓橋)까지 이르렀는데 다리 가에서 중 하나가 병든 거지 모양으로 가장하고 거름더미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잡아 보니 타고 남은 홍촉(紅蜀) 동가리가 허리춤에 있었으므로 잡아 가두고 국문하였다. 그 결과 조원정이 문극겸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고자 석린(石隣), 석충(石沖), 석부(石夫), 주적(朱迪) 등과 모의하고 그의 가신 고영문(高令文), 임춘간(任椿幹), 준백(俊百) 등을 보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알았다.
 
왕이 형부상서 백임지(白任之), 대장군 박순(朴純), 내시 장군 이문중(李文中) 등에게 명령하여 문초했는데 수일 후에 고영문, 준백 등이 모두 복좌하였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풀어 조원정, 석린 등을 체포하고 나니 그제야 인심이 적이 안정되었다. 대(臺), 성(省), 형부(刑部)에서 합동하여 시가지에서 먼저 고영문, 임춘간 등을 죽이고 또 조원정을 위시한 10여 명을 보정문(保定門) 밖에서 목베어 죽이고 그 도당 30여 명도 사형에 처했다. 가산을 몰수당한 자는 1백70여 명에 달했다. (고려사 조원정전)
 
조원정은 이의민이 경대승에게 쫓겨 경주로 낙향했을 때도 오히려 승진을 한 것으로 보아 경대승정권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경대승의 인척이었음에도 이의민정권에 붙어 부귀영화를 누린 손석의 경우와는 정 반대였다. 그러므로 이의민시대가 개막되자 조원정의 정치적 위치는 매우 어중간하였을 것이다. 이의민이 그의 죄를 묻지 않은 까닭은 그가 오랫동안 이의민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것과, 아마도 경대승이 이의민을 도모하지 못한 까닭과 비슷하게 이의민이 정계를 떠난 사이 조원정도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록의 발단은 문인들이 조원정의 부패를 고발하는 데서 출발한다. 거기에는 최세보도 끼어있는데서 다분히 이의민의 정치적 전략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의민이 처음부터 여기에 가담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즉, 이의민은 문인들이 조원정을 공격하자 눈에 가시같은 존재인 조원정을 숙청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문인들과 제휴하여 그를 공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어 이의민의 본뜻과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조원정의 입장에서는 수세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이의민을 건드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위에서 문극겸과 두경승의 이름만이 나온 것이다. 조원정은 일찍이 경대승 시절, 같이 중방에서 정사를 논의하던 문인들의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응징함과 동시에 이를 빌미로 이의민마저 제거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의도를 모를 이의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중과부적으로 조원정은 비참한 말로를 맞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의식을 느낀 문인들의 집단적인 저항, 그리고 내심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황제 등이 버티고 있는 조정이 점차 이의민의 인내를 자극하고 또 한계에 도달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의민은 드라마에서의 ‘황룡’ 어쩌구 하는 것과는 달리 1190년대에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고려사직을 멸망시키고 황제가 될 야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핏줄에 흐르고 있던 ‘왕족’의 기질이 그를 다시 일깨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의민의 결정적인 실수였으며 또한 그의 몰락의 시작이었다.
 
이의민정권연구 (하) - 계림황룡
 
 
돌이켜보면 이의민이 이전의 다른 무인집권자들에 비해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초창기 무인정변의 주역들이 각자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권력투쟁을 하는 와중에 소멸되거나 오랜 기간이 지난 다음 자연 소멸한 덕을 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서기 1170년 이래 약 20여 년간 무인들이 계속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으로는 무인들이 이전의 기득권층이었던 문인들의 힘을 빼앗고 이들을 억눌렀던 데에도 있었다. 초창기 정변이 일어나고 황제가 바뀌는 대혼란기를 맞아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문인들이었으나 이미 광종이 호족들을 숙청한 이래 권력의 정점에 서 있은 지 200년을 넘은 경력이 있던 그들이었다. 20년과 200년, 게임이 안 되는 저력의 전통의 차이가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점차 문인들은 무인시대의 난세 속에서 자신들만의 생존책과 나아가서 장차 무인시대를 종식시킬 돌파구를 마련하는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는데, 그 일차적 결실이 경대승을 집권시키는데 한 팔 힘을 보탠 것이었다. 실제로 일찍이 필자가 밝혔듯이 경대승정권기에 문인들의 요직진출이 두드러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의민의 시대에 들어와 문인들은 다시금 된서리를 맞았으나 경대승 때 간만에 한번 맛본 권력의 단맛을 쉽게 문인들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의민정권기에도 문극겸이 앞에서도 보았듯이 ‘의종실록사건’으로 문인들의 입지를 확보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탄핵정국’과 같이 사태만 악화시키는 무리수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무인들이 정국을 장악한 와중에 문인들은 계속적으로 무인정권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의민의 성격을 어느 정도 복원해볼 수 있다. 그동안 필자가 쓴 글에 따르면 이의민은 초창기 오직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입신양명에 온 힘을 기울인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홍글씨’가 될 것을 아마도 알았으면서도 황제를 죽이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정치적인 인물이었으나 동시에 언행을 경솔하게 해 스스로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경대승이 헛소문을 퍼뜨렸을 때 쉽게 적대적인 의사를 표시해 잠시 동안 경주로 낙향한 일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게다가 자신이 권력을 쥔 후에도 두경승을 의식해 주먹을 휘두른 다혈질이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이의민은 야망이 크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적이면서도 저돌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활동적이면서도 그 폭이 넓어 그만큼 틈새도 많이 생기는 법이다.
 
이런 그에게 정적들이 조원정의 반란 등을 이용하여 옥죄어오는 것을 이의민 자신은 절대로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몇 배로 갚아주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을 것이다. 한마디로 황제를 포함해 고려조정 자체를 물갈이해버리고 나아가 고려라는 제국 자체를 자신만의 것으로 바꾸고 싶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미 이의민 자신은 안남국 왕실의 후예라는 혈통적인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정적들이 포진해있는 황도 개경에서는 쉽사리 정변을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의민에게 남은 선택은 자신의 기반인 옛 신라지역의 정서를 이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간 이의민이 경주지역에서 자신의 세력기반을 착실히 다졌기 때문인데, 특히 경대승을 피해 있는 기간동안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이의민은 역대 무인집권자 중 가장 노골적으로 지역정서를 이용하는 위인으로 남게 되었고 뒤이을 독재자들의 선례를 남기게 된다. 다음 기록을 유심히 보자.
 
명종 23년에 봉기한 남적(南賊)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자는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의 효심(孝心)이었다. 그들이 망명한 사람들을 규합해서 주, 현(州縣)을 습격 약탈하였으므로 왕은 그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을 파견하면서 장군 이지순(李至純), 이공정(李公靖), 김척후(金陟侯), 김경부(金慶夫), 노식(盧植)등을 통솔하고 토벌케 하였다. 그 중에 이지순은 이의민의 아들이다.
 
이의민이 일찍이 자기 꿈에 5색 무지개(紅霓)가 양편 겨드랑이에서 일어났으므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옛 도참(圖讖)에
 
“용손은 12에 다 된다(龍孫十二盡)”
 
란 말이 있고 또 ‘십팔자(十八子)’란 말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십팔자’란 이(李)자이므로 이런 데서 왕위를 바라보게 되어 약간의 탐욕을 참고 명사(名士)들을 등용해서 헛된 명망을 낚았(釣)으며 또 자기 출신이 경주라 하여 내심으로 신라(新羅)를 다시 일으킬 뜻을 가지고 김사미, 효심 등과 내통하였다. 그리고 적도 거만(鉅萬)의 재물을 보내 주었다. 이지순도 만족을 모르는 욕심쟁이여서 적에게 재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낚아 들이려고 비밀히 적과 연락을 가지고 의복, 식량, 신, 버선 등의 물자를 주었으며 적은 금은보화를 보내 왔다. 이런 데로부터 군중(軍中)의 동정이 이내 누설되어 여러 번 패전을 초래하게 되었다. 전존걸은 본래 지략과 용맹으로 이름난 장수였으나 사태가 이렇게 되니 울분해서 말하기를
 
“만일 법으로 이지순을 처치하면 그의 부친이 틀림없이 나를 죽일 것이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세가 더욱 치열해 질 터이니 장차 그 죄를 누가 질 것이냐?”
 
라고 하더니 기양현(基陽縣)에 이르러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 고려사 이의민전 -
 
위의 글에서 주목할 점은 소위 한국사에서 말하는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의민이 역성정변을 꿈꿨다는 사실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조정에서 보낸 토벌군에 이의민의 장남인 이지순이 끼어있는 것도 결코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아마도 고려사를 쓴 문인들의 편견에서 비롯된 과장이겠지만 위의 기록에서 이지순이 반란군과 내통한 동기를 개인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묘사한 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다. 고려사 이의민전을 보면 이의민 개인은 물론, 그의 아들들과 심지어 처와 딸까지 모두 이른바 ‘콩가루 가족’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기록들에는 분명 과장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집권자의 일족들에 대한 여러 가지 악행이나 비리보다 같은 죄질이면서도 유독 이의민의 그것에 대해서는 훨씬 자세하고 적나라하게 고려사에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장이 있게 된 데에는 이의민이 역대 무인집권자중 가장 노골적으로 ‘반역’을 도모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가장 낮은 신분상의 출신이라는 점도 한 몫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김사미의 난에 이의민이 처음부터 개입되었는지 아니면 일단 반란이 터지자 이의민이 이를 이용하려고 나섰는지에 대해서는 그 선후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이의민이 경상도에서 일어난 이 반란을 자신의 정변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그 여파로 반란의 진압군 영수인 전존걸이 이 같은 기가막힌 현실의 괴로움에 못 이겨 자살하는 위의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의민이 이 반란 이전부터 야망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는 다음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이의민은 본래 글을 모르며 무당을 믿었다. 경주에 목우(木偶) 귀신이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두두을(豆豆乙)’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제 집안에 당(堂)을 짓고 그 귀신을 맞아다가 날마다 제사하면서 복을 빌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그 사당에서 곡성이 들려오므로 이의민이 괴상히 여기고 물으니 그 귀신이 말하기를
 
“내가 너의 집을 오랫동안 지켜 주었는데 이제 하늘이 재화를 내리려 하니 내가 의탁할 곳이 없어서 울고 있다”
 
라고 말했다. 해당 관리가 이의민의 화상을 벽상에서 떼어 버릴 것을 건의하였으므로 왕이 그 화상을 그냥 둘 것을 명령했다. (상동)
 
재미있는 것은 이 기록이 고려사 이의민전 맨 끝에 일종의 ‘에필로그’ 식으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두두을’의 존재를 이의민을 보좌하던 재사나 경주 일대의 이의민 지지세력을 상징한다고 본다. 이는 일찍이 이의민이 ‘정변’을 계획해 이 같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고 하겠다. 유달리 고려사 이의민전에는 다른 집권자들과는 달리 이러한 ‘신화적 요소’가 많이 보이는데, 이는 이의민이 신비적 요소를 빌어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하는데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기록들은 문인들의 윤색을 거쳐 오히려 이의민이 얼마나 대단한 ‘역적’인가를 보여주는 장치로 고려사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이의민의 ‘역적성’을 강조하는 고려사의 기록들과는 달리 이의민의 ‘배후조정’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김사미의 반란은 불과 7개월 만에 그 막을 내리고 우두머리 김사미는 처형된다. 물론 효심과 기타 다른 반란들은 계속 진행되지만 가장 거세었던 반란이 일단 진압이 된 것이다. 게다가 다음 기록에 따르면 이의민은 이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24년에 이의민을 공신으로 책봉했는데 양부(兩府)의 문무백관이 모두 다 그 집으로 와서 축하를 드렸다. 이의민이 전주(銓注)를 독단으로 처결하면서부터 누구든 재물만 가지면 무슨 벼슬이나 다 할 수 있었으며 그 도당이 널리 뻗쳐 있었으므로 조정 신하 중 누구도 감히 개구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의 집터를 강탈하여 자기 집을 대규모로 건축했고 타인의 토지를 강탈하며 마음대로 포학을 부리니 일국이 무서워서 떨고 있었다. (상동)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여러 기록들에 따르면 이의민은 분명 역모를 도모하고 있었고 경상도의 반란을 이용하여 고려 황실을 뒤엎으려고 하지 않았나? 여러 정황을 분석해보면 이의민이 실제로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그의 행동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의민 같은 당대의 권력자가 지원하는 반란이 불과 7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진압이 되고 주동자인 김사미가 처형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그것은 이의민 자신이 이 반란을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로 이용했다는 것을 말함이 아닐까? 즉, 당시 정적들의 불만을 타개하려던 이의민은 자신의 기반을 이용하여 반란을 유도하고 일종의 ‘공포분위기’를 조장하여 다시금 자신의 위세와 권위를 회복하려고 했던 차원에서 이 반란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용가치가 다하자 이의민은 가차 없이 반란을 진압했던 것이다. 그 결과 위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이의민의 위세에 온 조정이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게 되고 이의민의 권세는 그 절정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의민의 이 위험한 ‘도박’은 결국 앞서 의종을 살해한 경력과 겹쳐서 황제를 비롯한 문인들에게 실제로 이의방의 충복이었던 이 인물이 장차 ‘역적’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인식이 그대로 고려사에 반영되어 마치 이의민이 주도면밀하게 ‘역성정변’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즉, 이의민이 자신에게 압력을 가해오던 정적들의 책동을 일거에 분쇄하기 위해 김사미의 난을 통해 ‘극약처방’ 작전으로 나왔으나, 오히려 이것이 조정에 이의민이 장차 대역을 도모할 것이라는 공포심을 팽배하게 하여 도리어 이의민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비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의민의 정적들로 하여금 대동단결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이제 이의민의 최후를 알려주는 다음 두 기록들을 보자.
 
명종 26년에 이지영이 장군이 된 후 최충수(崔忠粹)의 집 비둘기를 강탈했으므로 최충수가 노해서 자기의 형 최충헌(崔忠獻)에게 고하고 이의민 부자(父子)를 죽이고자 했더니 최충헌이 동의했다. 그때 이의민이 미타산(彌陀山) 별장에 가 있었으므로 최충헌 등은 그리로 가서 그를 죽이고 저자에서 효수했다. (상동)
 
명종 26년에 이의민의 아들 장군 이지영이 최충수 집 비둘기를 빼앗았는데 최충수가 그 반환을 요구하면서 언사가 심히 불공하였으므로 이지영이 노하여 가동들을 시켜서 결박하라 하였더니 최충수가 말하기를
 
“장군이 손수 나를 결박한다면 몰라도 누가 감히 나를 결박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이지영이 장히 여겨서 놓아 주었더니 최충수는 즉시로 최충헌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이의민 4부자(父子)는 실로 국적(國賊)이니 내가 죽이고자 하는데 어떻소?”
 라고 하였으므로 최충헌이 난색을 보이니 최충수가 또 말하기를
 “저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그만 둘 수 없소”
 라고 하였다. 그때야 최충헌도 찬동했다.
 
그런데 때마침 왕이 보제사(普濟寺)로 갔는데 이의민은 병을 칭탁하고 호종(扈從)치 않고 남모르게 미타산(彌陀山) 별장으로 나갔으므로 최충헌은 최충수와 그의 생질 대정 박진재(朴晉材), 친척인 노석숭(盧碩崇) 등과 함께 칼을 감추어 가지고 별장문 밖에 가서 엿보고 있다가 이의민이 돌아오려고 문을 나와 말에 올라타려 할 때 최충수가 뛰어 들어가서 쳤으나 맞지 않아서 최충헌이 곧바로 앞으로 나가서 이의민을 베어 죽이니 이의민의 종자(從者) 수십 명은 모두 다 벌벌 떨면서 흩어졌다.
 
최충헌이 노석숭에게 이의민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서울로 달려 들어와서 시가에 효수하게 하였더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서 떠드는 소리가 서울 안을 진동했다. 호종하던 자는 사변을 듣고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으며 왕은 수레를 재촉해서 환궁했다.
 
최충헌과 최충수는 칼을 뽑아 든 채 말을 달려 십자가에 이르러 감행령(監行領)에서 장군 백존유(白存儒)를 만나보고 사유를 이야기했더니 백존유는 즐겨 행동을 같이 하기로 하고 장병(將兵)들을 소집하여 주었다. 최충헌과 최충수가 군사를 인솔하고 궁문으로 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역적 이의민은 일찍이 임금을 해친 대역의 죄를 지고 있으며 백성들을 포악하게 해치고 왕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이미 오랫동안 그를 증오하여 왔으며 지금 나라를 위해서 처치했는데 비밀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어명을 청하지 않았는바 백 번 죽을죄를 졌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고려사 최충헌전)
 
위의 두 기록들을 보면 몇 가지 흥미 있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최충헌 형제의 거사가 매우 즉흥적으로 일어났다는 인상을 위의 기록들을 준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고려사 최충헌전을 보면 최충헌은 일찍이 정중부 계열의 무인이던 기탁성의 천거를 받아 장군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리고 위의 기록은 사건의 전후관계가 대폭적으로 생략이 되어 있어 과연 왜 최충헌 형제가 이의민을 죽이려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가 않다. 물론 최충수가 이지영이 자신의 비둘기를 빼앗고 자신에게 모욕을 준 데에 분개해 형 최충헌까지 끌어들여 거사를 일으킨 것으로 나오나, 겨우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난을 일으킨다는 기록 자체가 여러모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최충헌 형제가 정중부 계열의 이른바 ‘고위무인’들의 계보를 잇는 ‘신세대 무인들’이라는 점, 그리고 최충헌의 우봉 가문은 황도 개경의 지근거리에 있는 황해도 패서계의 일원으로 정중부계 세력기반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 드라마에서의 설정처럼 당시 비둘기는 전서구의 역할로 이지영의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는 점들을 종합해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곧, 필자는 일찍이 이의민과 대립하던 문인들과 심지어 황제까지 나서서 장차 예상되는 이의민의 변란을 방지하기 위해 선수를 쳐 최충헌으로 대표되는 무인들을 끌어들여 이의민 제거에 나섰으며, 최충헌 등의 입장에서는 신라계 이의민을 제거하면 이제 고구려계 패서계 세력이 다시 정중부때의 전성기를 되찾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명분이 충분했을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최충헌 형제가 언급하는 이의민에 대한 ‘국적’이라던지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는 표현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당시 이의민의 정적들의 인식, 즉 위기의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황제가 여기에 개입되었음은 위의 기록에서 최충헌이 사태의 전말을 보고하자 황제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는 데서 이 모든 것은 조정과 패서계 무인들의 합작품이라는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의민이 위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호위하는 사람도 별로 없이 병을 핑계로 미타산의 별장으로 가서 거기서 최충헌에 의해 최후를 맞는 사건도 나름대로 재해석할 여지가 있다. 미타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어쨌든 이의민이 호위병력도 약간만 거느리고 그렇게 기록처럼 쉽게 죽음을 맞는다는 기록은 사실 좀 의아한 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의민의 미타산 행차가 비밀스럽기 때문인데, 과연 이의민은 무슨 이유로 이렇게 하였을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패서계와 ‘고위무인’들의 계보를 잇는 정중부 계열 무인인 최충헌 형제는 이의민을 제거하려던 거사를 도모하는 중에 전서구가 이지영에 의해 발각되자 최충수가 ‘쇼’를 하면서까지 일단 이지영의 경계심을 누그려뜨린 후, 급한 마음에 다른 공모자들과 결탁해 위의 기록의 표현대로 ‘그런데 때마침’ 사찰로 행차하던 황제를 따라나선 이의민을 곧바로 도모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에 거사가 실패하면 후환이 두려웠던 황제는 문인들과 공모하여 이때(서기 1196년) 이미 60이 넘은 이의민을 배려하는 척 하면서 별장으로 가 쉬라고 권고했을 것이다. 행렬 도중에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이의민은 미처 호위병력을 충분히 거느리지 못하고 향했을 것이며 아마도 차후에 추가 호위병력을 불렀을 것이다. 갑자기 별장으로 행차하게 된 이의민은 자신의 호위병력이 보강될 때까지 자신의 행보를 정적들의 준동을 우려하여 극비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비밀스런 그 틈을 이용해 최충헌 일파는 성공적으로 이의민을 제거했을 것이다. 최충헌의 정변이 얼마나 급하게 이루었는지는 이의민을 계략으로 제거한 뒤에 그대로 남아있던 이의민의 군사적 기반과 혈투를 벌여 겨우 정국을 장악하는 과정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김사미의 반란을 전후해 조정과 황제 등의 이의민의 정적들은 실제로 이의민이 행동으로 표출할 가능성이 적었음에도 이의민의 ‘정변’ 의도를 과대평가한 점이 없지 않다. 이의민의 입장에서는 정국의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할 ‘극약처방’이었던 ‘신라부흥’ 제스쳐가 이들에게는 명백히 ‘역모’의 증좌요, 정적인 이의민을 제거해버릴 확실한 구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미 이 때를 전후하여 조정에서는 이의민이 조만간 정변을 일으키리라는 소문이 파다하여 위기의식이 팽배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의민의 정적들은 서둘러 선수를 치려고 했을 것이며 이들이 내세운 최충헌 형제가 그 와중에 전서구가 발각되는 실수를 범하자 후환이 두려워 서둘러 거사를 앞당겨 이의민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결국 정적들의 이의민 제거는 일종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던 셈인데, 이의민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도 없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정치적으로 살아남는 자만이 집권하는 당시의 현실에서 양쪽 중 어느 쪽은 끝을 보아야 했던 상황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의민정권’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안남국 왕실의 후예로 고려 땅에서 태어나 천민 신분으로 어릴 적 자신의 두 형이 고문으로 죽는 충격을 뒤로 하고 이것이 또한 인연이 되어 황도로 상경, 무인의 길을 걷게 되자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무인정변으로 인해 정치군인으로 변모하는 이의민! 이의방의 수하로 승승장구하다가 기어코 자신의 출세를 위해 황제까지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정중부와 경대승기를 거쳐 ‘역적’의 누명을 쓰게 되는 이의민! 온갖 시련의 끝에 천인계 무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십수 년간 집권자로 군림하는 희대의 행운아! 그러나 결국 무인정변의 근본적인 모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보수’ 무인들과 문인들에 의해 희생되는 풍운아 이의민!
 
이렇게 바로 이의민의 생애 자체가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 무인정변과 그 이후의 ‘무인시대’가 결국 기존 체제의 불합리에 항거하여 무인들이 칼을 쥐고 일어나 피로써 이룩한 유혈정변에 다름 아니었으니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 ‘혁명적’인 상황에서 초창기에는 극도의 대립과 극심한 혼란을 피할 길이 없었으니, 이의방정권기가 바로 그 때를 여실히 반영했다. 이러한 난세를 거치면서 이의민은 다른 집권자 누구보다도 무인들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정치군인적인 면모는 그때까지 중 가장 오랫동안 집권하는 노하우를 제공하였다. 게다가 신분상승을 노리는 당시의 무인들과 나아가 민중들의 열망을 온 몸으로 보여준 ‘성공신화’로서의 ‘천민’ 출신 이의민의 의의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는 이후 이의민을 모델로 한 수많은 민중들의 봉기와도 무관하지 않으니 대표적인 예가 바로 최충헌의 가노인 만적이 일으킨 난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후일담식으로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이의민이 끼친 영향은 그를 죽이고 집권하는 최충헌의 시대에 가장 잘 나타난다. 이의민을 죽이는데 한 몫을 담당했던 문인들은 최충헌이 집권하자 이제 무인정변 이전의 시대, 즉 경대승이 꿈꿨던 ‘복고’가 최충헌에 의해 이루어지리라고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최충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크게 실수하고 말았다. 우선 최충헌 자신은 무인이었으므로 문인들에게 천하를 되돌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앞서 경대승과 이의민의 몰락에 일익을 담당한 기회주의적인 황제 명종을 폐위시켜 장차의 후환을 제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경대승의 ‘도방’을 재건해 자신의 철저한 권력도구로 삼아 문인들을 계속 압박했다.
 
물론 문인들은 최충헌의 협력자로서 이의민 때보다는 훨씬 활발하게 정계로 진출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실권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최충헌의 비위를 맞추는 ‘어용학자’로서만이 인정을 받아 조정에 출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충헌은 이의민보다도 한 술 더 떠서 겉으로는 문인들을 우대하는 척 했지만, 그들을 자신에게 마음으로부터 충성하는 ‘허수아비 서생’들로 위치를 격하시키고 말았다. 문인들은 이제 현실을 깨닫고 체념하듯이 이의민을 훨씬 능가하는 이 독재자에게 아첨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이의민정권 때 조그맣게라도 지니고 있던 ‘무인시대’의 종식의 꿈이 이제 영원히 사라졌던 것이다. 더구나 최충헌은 자신의 독재권력의 지속을 위해 친동생, 조카를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도륙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까지 견제했다. 이 같은 현상은 일찍이 다른 무인집권자들에게서조차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전의 집권자들은 절대로 자신의 친족을 죽이는 일 따위의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 악명 높던 송유인조차도 정권을 빼앗았을망정 정중부정권의 외피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그러한 최소한의 명분마저도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최충헌의 정변은 가히 무인시대에 있어서도 새로운 전환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의민정권이 사라졌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제 ‘이의민정권연구’를 마지막으로 필자의 ‘-정권연구’ 시리즈도 1년여에 걸친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최충헌정권연구’를 새로 쓰지 않는 까닭은 이미 학계에서도 최충헌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 새삼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 필자의 능력도 한계에 다다랐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간 필자의 부족한 글에 분에 넘치는 성원을 주신 독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동안 필자의 연재물이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의 이해를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필자는 소임을 다했다고 믿는다. 앞으로 다른 연재물에서 여러분을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이제 ‘-정권연구’의 대미를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