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1-25 22:06
아리랑의 기원과 정선이씨 12世 고려 중량장 李初
 글쓴이 : 이현웅
조회 : 3,537  
麗末 殉抗靖 3 節臣(족보) 彛,初(윤이(파평군),이초(중량장))의獄事의주인공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윤이(尹彝), 이초(李初)가 비밀사절로 중국에 있으면서 당시 왕실의 종실이 아닌 시중 이성계의 인척 왕요(공양왕)가 즉위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내�긴)재상 이색 등의 연서로 밝히고 혁명 의도를 막기 위해 협조를 구한 사건이 명나라에 갔던 사신들에 의해 밝혀져 우현보, 권중화, 경보, 장하, 홍인계, 윤유린, 최공철 등은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이색,이임,우인열,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등은 청주(淸州) 감옥에 가두고 국문하게 되는데 옥사중 홍수와 태풍으로 관아와 옥사가  침수되는 일이 벌어지자 형집행이 중지되기도 했다

결국 2년 후 이성계는 조선을 세웠고 밀사 이초께서는 명나라 장쑤 성(江蘇省)에 유배되시어 그곳에서 순절하셨다.

朝鮮王朝實錄 太祖1卷 總序111(이를 조선왕조는 무고(誣告)하였다 표현한다.) - 이초의 순절 정신이 두문동(72인)에 전해지고 거기 유신(遺臣)들은 고려 충절로서 더 정진했고, 전오륜외 6명(칠현)은 나중 정선 칠현동에 은거하면서 옥사 사건 등을 애도하며 한시(漢詩)를 지어 불렀는데 정선아리링의 ‘아라리’란 이색(李穡,1328-1396)의 시(詩)에 자주쓰인 표현인 ‘수지(誰知)’(누가 알리요)가 정선지역 백성들에 의해 민요로 불리는 과정에서 ‘알리-아리-아라리’로 변천되었다는 것이다.-

고려 말 충절인사 구헌(九獻: 국가에 헌신한 9명:최영,변안열,조민수,이림,염흥방,윤이,이초,이원굉,왕안덕)의 一員, 정선군 홈페이지 ‘정선의 인물’ 중 “忠義 이초”로 기록(2008년 현재), 이초의 옥사내용과 1932년 개성에 있는 사문동 서원에 신주(神主)를 모셨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이초의 충절을 개성두문동 圃隱 정선생 列亨干 순절사에 모신 고려의 遺臣들은 그를 기리며 애도했다

그중 전(?)오륜은 동지 6명과 함께 정선 거운산 칠현동으로 숨어 들어가 불사이군을 천명하며 은신하였다

고려의 순절사들이 려말 개성 두문동에 은거한 후 두문불출이란 속담이 후세에 전해진다니 가히 충절의 정도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아리랑의 관련설도 그시절 정선의 원로들은 아리랑이 아니라 `알리"아리리"라 강조한다

윤이,이초의 순절정신을 전(?)오륜등이 따르며"누가 이억울함을 알리, 알리"가 아리리,아라리 로 민중에게 구전되면서 정선 아리랑의 모태로 변형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래는 정선이씨 문중이 아닌 분들의 기록을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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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어원
글쓴이 : 아리수
..
아리랑에 관한 논의는 1920년대 이광수의 '민요소고(民謠小考)'에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에서 아리랑 은 '뜻은 없고 음조 좋은 것을 취하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 으로 보고 있다는

짤막한 설명에 그치고 있다(최철외,1984).

그러다가 아리랑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적 관심은

1930년대부터로 기원과 어의, 내용 고찰등의 부분론을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박민일,1990)


가. 아리랑의 기원설

1) 낙랑시대 : 낙랑 음전설(音轉設)

2) 삼국시대 :
..가) 신라초기 : 알영(閼英) 음전(音轉)설
..나) 고구려 중기 : 아리수(阿利水) 음전(音轉)설

3) 고려말 시대 : 전오륜(全五倫)의 아라리설

4)조선시대
..가) 조선중기 : 중종조, 남사고(南師古)의 아리령(亞裡領)설
..나) 조선후기 : 대원군시대의 아리랑(我離娘)설등

5)근대시대 : 개화기 전후설
.
..아리랑의 기원설은 우리나라 역사의 모든 왕조가 다 등장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유추적인 해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원설에서도 가장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전오륜의 고려말설이다.
정선칠현으로 일컬어지는 전오륜외 6인이 정선 서운(瑞雲)산 거칠현동(居七賢洞)에
몸을 숨기고 한시로 아리랑을 지어 불렀다는 전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역사를 고증할 때 사용하는 문헌, 유물, 전설순의 조사방법을 빌린다면

전오륜의 고려말설은 민담이 아니라 사실성을 제1위의 가치로 두는 전설이므로

흡인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가 많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고려사절요에서 전오륜의 사실적 행적을 정선군지에서 살펴보면

첫째, 전오륜의 사실적 행적에서 아리랑의 맥을 찾을 수 있다.

고려부흥을 꾀하다 숨져간 정선인 이초(李初)는 공양왕때 근왕팔서 시중(侍中) 이성계의 세력을

물리치고 국권을 부지하기 위해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와 함께 명나라에 건너가

명나라 황제에게 호소하여 이성계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한다.

 
이때 사신으로 명나라에 머물고 있던 순안군(順安君) 방(昉),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趙반이 돌아와 이 사실을 왕께 고하여

공양왕 2년(1930)에 큰 옥사가 벌어진다.

 
이색(李穡), 우현보(禹玄寶)등 수십명이 순군옥(巡軍獄)과 청주옥(淸州獄)에 하옥되고

이초(李初)는 서울에서 쫓겨난다. 이를 이초옥사(彛初獄事)라 한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성중의 관아와 민가가 침수되고

옥사가 침수되는 일이 일어나 집행을 중지시킨다.

후에 무고임이 밝혀져 이초는 명나라 율수현( 水縣, 강소성 소재)으로 유배되고 그 곳에서 불사이군을 밝히며 자결한다.

 그런데 정선인 이초의 구국옥사(救國獄事,彛初獄事)는

정선아리랑의 시원자 전오륜에 맥락되어진다.

 이초의 정신을 이어받은 정선 거칠현동의 전오륜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

동지 6인과 함께 서운산(瑞雲山) 거칠현동에 은신하면서 한시를 지어 부르면서

고려에의 충절과 망국한 그리고 이초와 윤이를 애도하였다고 한다.


..둘째 전오륜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

김중한(金仲漢), 고천우(高天祐), 이축생(李 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 7인과 함께

정선으로 내려와 지금의 서운산에 내려와 고려왕조의 부활이 어려움을 안 이들 7인은

조석으로 송도 쪽을 바라보며 통분의 망국한을 탄식조가락으로 한시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말해주는 아리랑 전설이다.

그런데 정선의 원로들은 <아리랑>이 아니라 <아라리>라고 강조한다.

 누가 나의 이 억울한 심정을 알리오, 알아주소서'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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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유래(정선군자료)

우리나라 영서·영동지방에 분포(分布)되어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 고장 민요 정선(旌善) 아리랑은 일명 아라리라 부르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 널리 불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인 조선조 초기(朝鮮 初期)라 전한다. 당시 고려 왕조를 섬기던 선비들 가운데 불사이군 (不事二君)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松都)에서 은신 하다가 정선 (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 동안 산 나물을 뜯어 먹고 생활하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을 사모하고 충절(忠節)을 맹세하여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心 情)을 한시로 읊은 것이 지금에 정선 아리랑 가사로 인용된 것이 많다.
그때의 선비들은 이러한 비통(悲痛)한 심정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 여 알려 주면서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며. 그 후 사화(士禍)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전란과 폭정시(暴政時)에 고달픈 민성(民聲)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 『아리랑. 아리랑』하는 음율(후렴구)을 붙여 부르 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 (또는 경복궁 중수시)라고 한다.
한일 합방 후부터 일제 말엽까지에는 나라없는 민족(民族)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 스스로를 달래 왔었다. 일제를 거치는 동안 사상(思想)이 담긴 노래는 탄압(彈壓)됨에 따라 애정과 남·여 관계의 정한(情恨)을 소재로 한 새로운 노래가 많이 불리어 졌으며. 예로부터 전하여 지는 노래와 함께 오늘날 우리 나라의 독특한 가락을 지닌 민요(民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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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박사' 김연갑씨

"아리랑 시원은 고려 말 한시" 주장

(서울=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이 지은 한시(漢詩)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돼 있는 정선아리랑은 국내외 50여 종 아리랑의 뿌리가 된 '대표 아리랑'이다. 따라서 정선아리랑의 시원은 곧 모든 아리랑의  시원과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색 한시설(說)'을 주장한 주인공은 '아리랑 박사'로 통하는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그는 7년간의 연구 끝에 최근 완성한 저서 '아리랑 시원설 연구-정선아리랑과 목은 이색'(도서출판 명상)에서 이 같은 주장을 폈다.
"아리랑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이루고 있지만 정작 아리랑이 도대체 뭔지, 그  시원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어요. 외국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지요. 사실 굉장히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였지만 아리랑 연구가로서  양심상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어요."

정선아리랑 시원에 대한 연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강원도  지방에서 거의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는 설은 바로 '고려 충신설'.
고려 말 이성계에 반대해 정선에 은거하던 7명의 충신(칠현)들이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고 애소한 말 '알리'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알리'가 3음절화해  '아라리'로, 다시 '아리랑'으로 변형됐다는 주장이다. 정선 지역에는 이들 '칠현'의 충절을 기리는 칠현비도 세워져 있다.

하지만 김 상임이사는 "칠현의 시를 연구한 결과 아리랑의 시원이 될 만한 단서는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대신 이들 칠현을 비롯한 고려 말 충신의 대부격인 목은 이색의 시에서 시원이 될 만한 증거들을 발견했다는 주장을 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색의 시는 5천여 수에 달한다. 이를 번역한 문집이 현재 11권 분량으로 나와있으며, 김 상임이사는 이를 세 번이나 정독하며 연구했다.
그는 "이색 문집 가운데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는 한탄조의 시, 즉  정선아리랑의 정서와 유사한 시가 전체의 7% 정도로 집중적으로 나온다"며  "특히  이색의 한시 일부를 번역한 내용이 정선아리랑 가사에 그대로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색이 실제 정선 지역을 네 차례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칠현의 한 사람인 전오륜의 어머니가 이색 부인의 언니였다"면서 "정선이라는 지역, 또 칠현과도 밀접한 관계였던 이색의 시가 당시 칠현들 사이에서 읊어지다가 정선 지역민들에게 퍼지면서 아리랑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상임이사는 또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후렴구 '얄리얄리 얄랑셩',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부른 '이쯔키 자장가'의 후렴구 '아로롱 아로롱 아로롱바이', 아리랑의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가 모두 하나의 시원에서 퍼진  것으로 추측된다"며 "이 역시 이색의 시가 그 뿌리가 아닌가 한다"고도 덧붙였다.

 한민족아리랑연합회는 1983년 나운영, 고은 선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아리랑 기행'이 그 전신이다. 88년 '모임 아리랑'을 거쳐 1994년 사단법인  한민족아리랑연합회로 재창립했다.

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김 상임이사는 1986년 국내 모든 아리랑의 가사 6천 수를 정리한 첫 책을 펴낸 후 이번까지 모두 6권의 아리랑 연구서를 발간하는 등 20여 년간 아리랑 연구에만 매달려왔다.
24일 철원 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리는 '아리랑 평화 페스티벌'을 전후해  국내외 아리랑 연구가, 학자들과 함께 '아리랑 세계화위원회'를 발족한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아리랑' 같은 민족의 노래는 찾아볼 수 없다"며 "다음 연구 과제는 한 민족을 하나로 모으는 이 거대한 '아리랑의 힘'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yy@yna.co.kr(끝) 2006/06/06 09:09 송고

서산대사 09-02-0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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