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1-28 11:42
베트남 리(Ly)왕조의 정선이씨 선조들
 글쓴이 : 이헌섭
조회 : 3,648  
2009년 소띠 해가 밝았습니다. 이제 설 명절도 지났으니 명실 공히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은 셈이지요. 올해 2009년은 정선 이씨에게도 좀 특별한 해입니다. 우리 원시조인 이공온 선조께서 베트남에서 이왕조를 건국한 것이 1009년이므로 올해는 베트남 이왕조 개조 10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왕조는 이공온(태조)-이덕정(태종)-이일존(성종)-이건덕(인종)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아시다시피, 인종의 세째 왕자인 이양혼 선조가 고려로 이주하여 정선이씨의 시조가 되셨습니다.

이건덕(인종)의 후사는 이양환(신종)-이천조(영종)-이용한(고종)-이호참(혜종)으로 이어집니다. 이호참(혜종)은 아들이 없어, 1225년에 사위(소성공주인 소왕의 부군) 집안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면서 이왕조가 끝나게 됩니다. 역시 고려로 망명해 와 화산이씨의 국내시조가 된 이용상은 바로 이용한(고종)의 동생입니다.

아래 이어지는 글은 제가 베트남에 관련한 책 <베트남 리포트>를 읽으면서 정선이씨 선조들과 관련한 부분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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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유교가 베트남에서 정치이념으로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이황조부터다. 이왕조의 제2대 왕인 태종(이덕정)은 1028년 즉위 직후 왕권 강화에 나섰다. 왕권 강화책의 하나로 그는 1038년 중국을 본떠 토지나 오곡을 제사하는 사직단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그는 직접 쟁기를 잡는 친경의식인 적전의 예를 행했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유교의 왕권 개념에 따른 것이다.

이어 태종은 난립하던 관습법 등을 정리해 성문법인 '형서'를 선포했다. 이 밥률은 중국의 당률을 모방해 지배자에 대한 불충한 행위를 예전보다 훨씬 엄격하게 처벌하는 한 편, 형벌에서도 태, 장, 도, 유, 사 등 오형제를 채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왕조는 중국으로부터 자주성을 유지하면서도 민생을 안정시켰던 유일한 왕조이다. 특히 성종(이일존) 재위시 지금의 중부 지역에 위치했던 참파 왕조를 격퇴한 데 이어 다시 인종(이건덕) 재위 기간에는 수십만의 대군을 앞세우고 침략해 온 송나라를 물리쳤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상걸(리뜨엉끼엣) 장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추앙심은 지금도 대단하다.

당시 송나라의 개혁사상가인 왕안석이 베트남이 가진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해 베트남을 지배하고자 했다. 이 첩보를 입수한 이왕조는 1075년부터 1077년까지 명장 리뜨엉끼엣을 앞세워 지금의 중국 광서와 광동 지역을 공략했다. 이왕조의 시각으로 보면 이 지역은 예전 베트남의 영토이기도 했다. 이에 맞서 송나라는 베트남을 공격했으나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이용상은 베트남에서 사실상의 첫 독립왕조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이왕조의 왕자였다. 그는 아들이 없어 불과 일곱살인 차녀(이불금, 소성공주)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준 혜종(이호참)의 숙부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이불금(소왕)은 시가 어른인 쩐투도(전수도)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다. 권력을 찬탈한 쩐투도는 곧이어 '눈엣가시'같은 왕족들을 시해하기 시작한다.

이때 이용상은 배를 타고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망망대해를 떠돌던 그가 닿은 곳은 지금의 북한 땅인 서해안 옹진반도였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린 이용상은 때마침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주민들을 모아 이들을 물리친다. 당시의 고려 왕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이용상의 이런 무공을 보고받은 뒤 그를 화산군으로 봉하고 일대의 땅을 식읍으로 내렸다.

정이지 09-01-28 19:18
답변 삭제  
잘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씨 왕조의 기록을 너무 화산이씨 족보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산이씨의 족보 "화산군본전"은 송사열전 안남지략편 "이씨세가"에  의존한 내용입니다.
안남지략에 자신들의 주관적인 내용을 첨가시킨 것 뿐이죠.  그 주관적 내용이란 것이
베트남의 역사서에는 찿아 볼 수 없는 내용들이죠... 우선, 용상이란 인물이 그렇습니다.

  정사를 더 많이 찿아봐야 하지만,  화산이씨가 주장하는 용상은 영종의 6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3살에 왕위에 오르죠...그 동생이 용상이라?????

 화산이씨의 기록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기록이 아니라는 것 뿐입니다.

화산이씨 족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들의 기록이 아니라 중국의 기록이고
그것도 너무 허황되게 왜곡이 많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화산이씨 족보에
의존하는 것은 ......

  우리 정선이씨는 분명한 대월국의 왕손입니다.

 정확한 기록이야 현재로는 찿기 어렵겠지만, 화산이씨 족보에 의존하지 말고 대월국 정사를
더욱 연구하여 우리의 정통성을 세워야 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그래야 시조이신 휘 양혼께서 "동쪽으로 온 까닭"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며,
고려사의 휘 의민이 "어찌 천민이면서도 경주에 확고한 세력기반을 구축하였는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선이씨는 최씨에 의해 양에서 음의 역사로 물러 앉게되었죠...
우리의 기록이 왜곡되어 조선왕조 내내 "이런가문이다"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그래서 수 많은 현고들이 출사하지 못하는 아픔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이러한 음지의 아픔을 풀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당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선이씨지킴이
이현웅 09-01-28 20:18
답변 삭제  
이현웅 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분이시라면 저를 아실것입니다
저보다 먼저 정선이씨에 대한 기록과 연구를 많이 하신것으로 저도 님의 자료를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 정선이씨는 승자의 기록에 (무신정권 최충헌,이초의 옥사 ) 의해 왜곡 폄훼 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들을 우리가 해야 한다면 님과 같은 분들이 나서야 합니다
이제 우리 후손들이 선조님들의 폄훼된 위상을 바로 세우는 노력의 시작이라도 해야 합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혼자만 연구검토 하지 마시고 우리 모두 모여 바로 세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