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2-08 10:51
홈페이지 정선이씨 소개부문 수정과 관련
 글쓴이 : 이기철
조회 : 7,782  
홈페이지의 "정선이씨 소개"부분에 관련하여
베트남의 정사인 "대월사기전서"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수정안을 작성하여 올립니다.
종친회 회장단에서 검토하여, 첨언이 있으시면 통보바랍니다.
 
氏族의 本源

 정선이씨(旌善李氏)의 始祖는 휘(諱) 양혼(陽焜)이시다. 公께서는 대월(大越國, 현 베트남) 이황제국(李皇帝國, Ly Dynasty)의 황자(皇子)였으며, 일찍이 1075년 경 대월(大越)을 떠나 송(宋)나라 등주(登州)에 머무시다가,  1127년 송(宋)나라 황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수도 개봉(開封,카이펑)에서 금국(金國)에 생포되어 북쪽으로 압송되는 정강의변(靖康之變)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고려(高麗)의 경주(慶州)로 들어와 적(籍)하였다.

 대월(大越, Dai Co Viet)의 이황조는 1009년 태조(太祖, Tai To) 이공온(李公蘊, Ly Con Uan, 리 꽁 우언)이 세운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다.  비록, 송(宋)과는 외교적으로는 조공(朝貢)관계였으나, 칭제건원(稱帝建元)한 독립국(獨立國)이었다.  태조가 이씨황조를 개창(開創)하고  9분의 황제가 대월(大越)을 통치하다가 마지막 황제 소황(昭皇, Chieu Hoang)이  1225년 12월 21일 진씨(陳氏) 승(承)의 차자(次子)인 진경(陳㷡)에게 황위를 선위(禪位)함으로서 226년간의 이황조가 끝났다.

 정선이씨(旌善李氏)의 시조(始祖) 휘(諱) 양혼(陽焜)은 제2대왕 태종(太宗, Tai Tong, 1000生 ~ 1054 崩)의 차자(次子)인 봉건왕(奉乾王)의 손자(孫子)다.  그러나, 제4대 황제 인종(仁宗, Nhan Tong) 재위 初期 송의 복주(福州)로 이거(移居) 하셨다가,  제 4대 황제 인종(仁宗)이 후사(後嗣)가 없어 황자(皇子)로 입적(入籍)되었지만, 대월(大越)의 복잡한 사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강의변(靖康之變) 때 고려(高麗)로 귀부(歸附)하였다.
 
 그러나, 휘(諱) 양혼(陽焜)의 6대 손(孫) 휘(諱) 의민(義民)이 1190년 고려(高麗)의 수상(首相)인 문화평장사(文化平章事)에 오르지만,  1196년 휘(諱) 의민이 최충헌(崔忠憲)에게 해(害)를 당하고 문중이 멸살(滅殺)되는 병진환란(丙辰患亂)을 겪게 되었다.  환란(患亂)에 불구하고 제8대 손(孫) 휘(諱) 연(蓮)이 살아남아 가문(家門)의 혈통(血統)을 이었다. 그의 아들 제9대 손(孫) 우원(遇元)이 강원도(江原道) 정선(旌善)으로 이거(移居)하여 이 곳을 적(籍)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정선이씨(旌善李氏) 시작이다.


대월(大越) 이황조(李皇祖)

제1대 황제 태조(太祖, Tai To) -이공온(李公蘊, Ly Con Uan)
 
 1009년 이공온(李公蘊, Ly Con Uan)이  전여조(前黎祖, Tien Le)의 마지막 왕 용정(龍鋌, Long Dinh)을 폐위(廢位)시키고 신왕조(新王朝)를 개창하니 이왕조(李王朝, Ly Dynasty)가 시작되었다. 1010년 이공온(李公蘊, Ly Con Uan)은 경사(京師, 수도)를 대려성(大閭城, Hoan Lu)에서 화려성(華麗城)으로 옮기고, 그 이름을 승룡(昇龍, Thang Long, 탕롱)이라 고치니 그곳이 지금의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Hanoi, 內河)다.
 974년 2월 12일 고법(古法, 지금의 Dinh Bang)에서 어머니 범(范, Phan, 팜)씨 부인과 신인(神人) 사이에서 휘(諱) 이공온(李公蘊, Ly Con Uan)이 탄생(誕生) 하셨다. 그는 이씨 황제국을 개창(開創)하고 19년간 재위하였다가  1028년 2월, 55세의 나이에 붕어했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며, 시호(諡號)는 신무황제(神武皇帝)라 했다.

제 2대 황제 태종(太宗 , Tai Tong)  - 이불마(李佛瑪, Ly Phat Ma)

 1000년 전여조(前黎, Tien Le) 시기, 대려성(大閭城, Hoan Lu)에서 태조(太祖) 이공온(李公蘊)과 전여(前黎)의 공주와의 사이의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이공온(李公蘊)이 황위에 등극하면서, 어머니 여씨부인(黎氏夫人)이 적황후(嫡皇后)로 봉(封)해지자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되었다.  황위 등극 시, 황자들 간의 변란(變亂)으로 고충을 겪었으나, 재위시절 왕권의 강화와 불교진흥, 영토확장, 제방건설, 형법의 완성등 많은 치적(治積)을 남겨 후대(後代) 황제들이 안정적인 국가운영을 할 수 있는 초석을 닦았다.  6명의 황후(皇后) 사이에 여러 명의 황자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지방에 살도록 하였으며, 적황후(嫡皇后) 매씨(枚氏)의 아들인 장자(長子) 일존(日尊)을 황태자로 책봉하였고, 차자(次子) 일중(日中)을 도성에 살게 하여 황태자를 보좌토록 했다.
 28세의 나이에 황위에 오른 후, 27년간 재위했다가 1054년 10월 55세의 나이에 붕어(崩御)하셨다. 시호(諡號)가 대행황제(大行皇帝)이고, 묘호(廟號) 태종(太宗)이라 붙여졌다. 그리고 건국호(建國號)를 대월(大越, Dai Co Viet)이라 정했다.

제 3대 황제 성종(聖宗, Thanh Tong)  - 이일존(李日尊, Ly Nhat Thon)

 1023년 2대 황제 태종의 황태자 시절, 궁궐 밖 용덕궁(龍德宮)에서 태어났다. 선황 재위  시 내치를 주로 맡았으며, 32살의 늦은 나이인 1054년에 황위에 등극했다. 그러나, 여러 명의 황후사이에서 후사(後嗣)를 보지 못하다가 44세의 늦은 나이에 유람(遊覽)시 만난 의란(倚蘭) 신비(宸妃) 사이에서 황자(皇子) 건덕(乾德,  Can Duc)을 얻게 된다. 황제는 성품이 아주 인애(仁愛)하였다.다. 1070년에 공자(孔子)를 기리는 문묘(文廟)를 세워, 이곳에서 황자들과 대족(大族)의 자제들이 교육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069년 장군 이상걸(李常傑, Ly Thrung Kiet)과 함께 200여척의 대함대(大艦隊)로 참파(占城)를 공격했다. 그리고 3개의 州를 대월로 복속시켰다. 이 전쟁 이후, 이상걸과 황제는 의형제(義兄弟) 관계를 맺고, 상걸에게 이(李) 성(姓)을 하사했다.
황제 재위 17년 황수(皇壽) 50세인 1172년 황제는 병으로 붕어(崩御)했다.

제4대 황제 인종(仁宗, Nhan Tong) - 이건덕(李乾德, Ly Can Duc)

1066년에 태어난 황제는 1072년 7세의 어린나이에 황제에 등극한다. 따라서, 적모(嫡母)인 양씨 황태후(楊氏 皇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 태사(太師) 이도성(李道成, Ly Dao Thanh)이 보정(輔政)했다 그러나, 다음 해 1073년 황제의 생모(生母)인 의란(倚蘭)이 황태후 양씨(楊氏)을 몰아내고, 태사 이도성을 변방으로 좌천시킨다. 그리고 황태후 양씨와 그녀를 모시던 시녀(侍女) 76명 모두를 순장(殉葬)시켜버린다. 1075년 황수 11세 때, 송국(宋國)의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을 만들고, 이를 실행하고자 마침 왕이 어리고 정국(政局)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대월(大越)을 침공했다. 이 때, 이상걸(李常傑, Ly Thrung Kiet)의 뛰어난 지략(智略)과 용맹(勇猛)으로 수전(水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황제 나이 50세가 넘은 1115년 후사가 없자 3명의 황후를 더 봉했다. 그러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이들을 모두 어녀(御女)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종실의 아들들을 입적하여 황자(皇子) 세웠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117년 황수(皇壽) 53세에 어머니 황태후가 사망하자, 숭현후(崇賢侯)의 아들 양환(陽煥)을 황태자로 책봉(冊封)했다.
 1119년 황제가 나이 55세에 이르자, 숙환(宿患)으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이후 황제 붕어 시까지, 황제는 병환(病患) 치료차, 행궁(行宮)으로 나가 생활했다. 이때부터, 여백옥(黎伯玉, Le Ba Ngoc)이 조정을 관장했다.
 황제 재위 56년 황수(皇壽) 63세인 1127년 12월, 황제는 여백옥(黎伯玉, Le Ba Ngoc)에게 부탁하며 붕어했다. 묘호(廟號)를 인종(仁宗)이라 하고, 시호(諡號)를 효자성신문무황제(孝慈聖神文武皇帝)라 존호했다.

제5대 황제 신종(神宗, Than Tong) - 이양환 (李陽煥,  Ly Durong Hoan)

 1127년 선황(先皇) 인종(仁宗)의 붕어(崩御)와 함께 12살의 어린나이에 황위(皇位)에 올랐다. 그리고, 아버지 숭현후(崇賢侯)가 태상황(太上皇)이 되었다. 5대 황제 양환은 다른 황제와는 달리 1명의 황후(皇后)만을 두었다. 그녀는 여씨황후(黎氏皇后)였으며, 1136년 3월에 황장자 천조(天祚)가 태어난다. 천조(天祚)가 태어나기 4년전인 1132년에 장자(長子) 천록(天祿)이 태어나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되었지만,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립(廢立)되었다.
 양환(陽煥)은 재위 10년만인 , 1138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붕어(崩御)했다. 묘호(廟號)를 신종(神宗)이라 했으며, 시호(諡號)를 광인숭효문무황제(廣仁崇孝文武皇帝)라 존했다.

제 6대 황제 영종(英宗, Anh Tong) - 이천조(李天祚, Ly Tien To)

 천조(天祚)는 1138년 3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했다. 어머니 여씨(黎氏) 감성感聖皇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했다. 그러나, 실권은 궁전령(宮殿令) 두영무(杜英武(Do Anh Vu)에게 있었다. 두영무는 황제 친할머니의 동생으로, 황제의 어머니와 사통(私通)했다. 황제에겐 적황후에게 태어난 황장자 용창(龍昶)이 있었지만, 궁녀를 함부로 죽였다는 이유로 서인(庶人)으로 폐립(廢立)했다.  막내 황자인 용찰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황제의 치세기간엔 외교적인 변화가 있었다. 송의 남천(南遷)과 금(金)의 등장으로 양국이 경쟁적으로 대월(大越)에게 화친의 관계를 도모하려 했다. 송은 전례와 달리 황제를 바로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봉하여 자주성을 인정하였고, 달단(韃靼, 金國에서도 적극적인 화친 외교를 펼쳤다.
 황제는 죽음에 임하자, 또 어린 황자를 보필토록 소헌성(蘇憲誠, To Hien Thanh)으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했다. 황제 재위 38년 나이 40세가 되던 1175년, 병으로 붕어했다.

제7대 황제 고종(高宗, Cao Tong) - 이용찰(李龍찰, Ly Long Trat)--"용한"이 아니라 용찰입니다. "찰"자의 한자
는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용찰은 1176년 방 3세에 황제에 등극했다. 재위 초기 적황후인 소령황태후(昭靈皇太后)가 자신은 적장자이며 폐위 된 용창(龍昶)의 복위를 도모하지만, 소헌성(蘇憲誠, To Hien Thanh)의 반대로 성사 시키지 못한다. 소헌성의 섭정기에는 황실이 안정을 되찿기는 했으나, 그가 죽은 1179년 부터는 혼란스러지기 시작하여 이왕조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소헌성 사후에는 황제 생모인 소천황태후(昭天皇太后)의 동생인 두안이(杜安珥)가 섭정했다.
 그러나, 황제는 성인이 된 후에도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락(歡樂)에 빠져 불필요한 궁궐을 짓고, 연회를 자주 열어 국가재정을 탕진했다. 또한 관리는 부패하여 관직을 매매하고 농민을 수탈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 이때, 독립적 성격이 강하던 지방호족들이 반란을 번번이 일으켰다.
 1208년 예안(乂安, 응에 안) 군사(軍使) 범유(范猷, Pham Du)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등주(藤州, Dang Chau)의 출신의 범병이(范秉彛, Pham Binh Di)를 보내 범유를 처단토록 했다. 그러나 범병이가 범유 군대를 평정하지만, 범유는 홍주(洪州)로 도망갔다.  그후 범유가 돈으로 조정관리를 매수하여, 범병이를 회경토록 조작했고, 이에 속은 황제는 범병이를 물감옥(水原)에 가두어 버렸다. 이 때, 범병이를 따르던 장졸(將卒)들이 분개하여, 일제히 무장반란을 일키고 궁성(宮城)을 도발(挑發)했다. 그리고 황제는 귀화강(歸化江) 근처로, 황태자 참(旵, Sam)은 해읍(海邑)의 유가촌(劉家村, 오늘날 타이 빈 省 Hung Nhan 縣)으로 도망갔다.  황태자 참(旵)이 유가촌의 유력(有力家)가 였던 진리(陳李)의 집에 머물러 그 의 딸과 사통(私通)했다. 황태자 나이 14세 였다. 다음 해, 진리(陳李) 형제들은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평정했으며, 황제는 다시 경사(京師)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진씨(陳氏)가 이왕조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경사로 돌아 온 이듬해 인 1210년 재위 36년 황수 38세에 황제가 갑자기 병으로 붕어(崩御)했다. 그리고 16살 난  황태자 참(旵)이 황위에 올랐다. 이때에 이르러 이왕조는 거의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8대 황제 혜종(惠宗, Hue Tong)- 이 참(李旵, Ly Sam)

 황태후(皇太后) 담씨(譚氏)의 장자로 1194년에 탄생했으며, 1210년 16살의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르지만, 황태후(皇太后) 담씨(譚氏)가 수렴청정(垂簾聽政)했다. 그러나, 황제가 진리(陳李)의 딸을 황후(皇后)로 책봉하려하자, 어머니 담씨 황태후가 적극 만류하였으나, 진리(陳李)의 동생 진사경(陳嗣慶)이 무력으로 황태후를 제압하여 성사시켰다. 황제는 병이 있어 정치를 돌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얼마 후에 정신까지 이상해졌다. 국정은 태위(太尉衛) 담이몽(譚以蒙)이 맡았지만, 군권은 전씨에게 있었다. 그러나, 1216년 황수(皇壽) 21세가 되던 해, 진씨 형제는 국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했다.
 1224년 황제의 병환이 깊어져갔다. 앵질(櫻疾)이었다. 황제는 제위를 차녀(次女)인 불금(佛金)에게 넘겨주고 진교선사(眞敎禪寺, Chan Giao)로 들어갔다. 장녀인 순천공주(順天公主)는 이미, 진리(陳李)의 장남인 진류(陳柳)와 혼인한 터라 재위는 차녀로 넘어갔다. 1224년 12월의 일이다.

제 9대 황제 소황(昭皇, Chieu Hoang) - 이불금(李佛金, Ly Phat Kim)

 1225년 12월 21일, 진리(陳李)의 차자인 8세의 진경(陳煚)과 황제 소황(昭皇)이 혼인하고, 소황은 황위를 진경(陳煚)에게 선위(禪位)한다. 이로서 이황조는 1009년 태조(太祖) 가 개창한 이후 9명의  황제가 대월(大越)를 다스렸으나, 226년만인 1225년 12월 21일 황위(皇位)를 진씨(陳氏)에게 넘겨주고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