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4-05 11:25
휘 이의민 연구를 시작하면서 올리는 글
 글쓴이 : 이기철
조회 : 2,971  

 역사 사료를 통해 정선이씨 6世 이의민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첫째는 사료가 매우 적음이요, 둘째는 사료 또한 심하게 폄하 ․ 왜곡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왜곡의 주범은 누구일까? 두말 할 나위 없이 고려 의 최씨 집정 정권이다.  역사의 사료를 연결하는 과정은 이규보가 맡았다. 그것이 이의민 사후 편찬된 이규보의 명종실록이다.
 명종실록은 명종이 죽은 지 30년이 지난 1227년 최보순의 주관아래 김양경,임경숙, 유승단, 조문벌이 사관으로 참여했고 사관이 아닌 자로 이규보와 권경중이 참여했다. 1227년은 최충헌이 사망한 이후이고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가 정권을 이어 받은 시기이다. 이렇게 편찬된 2권의 명종실록은 개경 궁성과 해인사에 보관되어 왔지만  조선이 만들어 낸 『고려사』편찬과 더불어 두 권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역사란 것이 사료와 사료 사이를 승리한 정권의 정치적 견해로 이어 붙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명종 시대의 휘 이의민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이의민의 역사적 실체를 온전히 기록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대의명분의 정당성을 위해 이의민에 대한 기록을 심하게 왜곡시켰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역사란 그 진실을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에서 다시 한 번 진행된 명종실록의 의도적 소실은 우리가 진실에 접근하는 데 많은 장애를 만들었다.  이러한 만행은 우리 가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고려』의 실체적 진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고려의 중심이 현재 북한지역에 있어 사적을 통한 역사연구에서도 초라한 결과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연유로 대한민국에서의 『고려』에 대한 역사연구는 매우 제한적이라 어느 역사학자도 조선적인 사관에서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최충헌과 조선 이씨 왕조의 정치적 명분은 무엇일까? 
최충헌의 명분은 이의민이 의종을 죽였고 경주를 기반으로 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에 그를 시해하고 나라를 바로 잡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명분은 고려가 문란하기 때문에 사회질서를 바로 잡기위해 정통성 없는 왕들을 몰아 내고 새로운 왕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두 승자의 역사적 명분이 이의민과 고려를 심하게 왜곡한 것이다.
 명종실록은 명종이 죽은 지 30년이나 지났고, 최충헌의 사후에 작성되었다. 왜 이렇게 늦어진 것일까? 명종의 선대왕인 의종의 실록은 명종 때 바로 작성되었건만 명종실록이 늦게 작성된 연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정권을 잡은 최충헌이 정치적/역사적 명분을 찾으려는 시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의민이 혁명을 일으키려했다는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서인데 그것이 바로 김사미의 난이다. 그 부분은 다음에 구체적으로 서술키로 한다.
 조선은 역성혁명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야했다. 그들의 명분은 고려사회가 썩었다는 것이다. 왕씨의 왕권은 왕씨 적통이 아니라 『신돈』의 후손들이고 관료들과 사회는 기강이 문란하여 백성의 앞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자신들이 나서 왕조를 바꾸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준비된 왕조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의민의 역성혁명은 터무니없는 짓이라 강조했다. 위의 두 가지의 사실... 이의민의 역성혁명은 최충헌이 조작해낸 사건이다. 이 조작된 내용을 조선왕조는 더욱 폄하시켜 『고려사절요』의 이의민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논하고 있다. 최충헌과 조선왕조의 명분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정선이씨 34세손인 본인은 앞으로 이러한 장애를 파헤치며 6세 이의민 선조의 진실된 실체에 좀더 접근할 것임을 다짐해 본다.
 한편, 필명으로 활동한 정이지 선생의 논지는 단편적이고, 역사에 대한 사려가 얕은 판단임을 밝힌다. 그의 논지는 조선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유교적 한계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다. 후술하겠지만, 이의민에 관한 연구의 핵심적 사고는 『도교』적인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증거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두두을』이다. 도교의 출발은 『노자』사상이다. 이는 계급적 사고인 유교와 대치되는 사상으로 평등사상이다. 이의민 사후 경주에서 불같이 일어난 반발운동이 유교적 관점으로 기록한 것이 『신라부흥운동』이다. 유교적 관점에 따라 이 역사적 기록을 해석하다 보면 운동자체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휘 이의민의 족적이 선동한 이 운동과 이의민의 연관성을 찾지 못한다. 이 운동을 『두두을』로 설명한다면 너무나 당연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이지 선생의 활동에 감사를 드리지만 그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점이다. 그의 사상적 바탕이 유교로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 흥곤 10-04-05 14:11
답변 삭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하급무사인 이의방, 이고, 채원이 무신정변을 일으켰고, 무자비한 숙청의 과정에서 의종을 시해하라는 명령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명령으로 타의에 의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행한 것일것입니다.
"의종을 시해하고 크게 웃었다"란 말은 한탄스러운 자신의 입장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려는 "마음속의 포효"이리라 생각됩니다.

이 의방은 문신들을 죽이고, 정 중부의 아들이 이 의방을 죽이고, 경 대승이 정 중부를 죽이고, 최충헌 등등...
이렇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이전 권력자를 죽이면서 본인의 권력을 차지하였지만 의민 선조님은 타인에 의하여 추대된 권력자로 정권 복귀 시 숙청을 감행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무신시대 집권자였지요. 그런 분이 무슨 연유로 반란을 꾀하였을까요.

왜곡된 역사 속에 파묻힌 선조님을 후손들이 재조명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명이기에 많은 기대를 해봅니다. 좋은 글 기대하면서.....

34세 흥곤
최고관리자 10-04-05 20:53
답변  
안녕하십니까 ?

사무부장 이광춘 인사올립니다.

종친회의 홈페이지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처음에는, 많은 종친회의 어르신들과 종중님들께서
종친회에 보내주시는 관심과  애정을 볼수 이었읍니다.
그런데 요즘은, 종친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하시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었읍니다.

이기철자료부장님과 이흥곤감사님께서 위에 남겨 주신
글들을 통해서, 진정한 우리 종친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읍니다.

감사한 마음과 함께 두루 평안 하심을 기원올립니다.

사무부장  이광춘  올림
이호근 10-04-16 16:57
답변 삭제  
이호근 입니다~~!
이기철 자료부장님 덕분에 역사 공부를 , 우리(나)의 뿌리에 대한 공부를 할 수있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