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5-29 20:53
밖에서 본 이의민 장군,1
 글쓴이 : 현웅 (119.♡.97.4)
조회 : 1,513  
[소설] 무인시대 이야기 제1편

두두을의 아들 이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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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개경이구나.”
고려 의종때 한 젊은 부부가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언덕 위에서 개경의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들의 눈앞에 멀리 화려한 왕도의 모습이 석양의 가을안개 속에 펼쳐져 있다. 체격이 장대하고 눈매가 남다른 이 젊은이가 이의민이다. 그의 부인 최씨도 막연한 기대 속에 남편의 뒤에 서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개경을 보고 있다.

최근 일고 있는 쟁점이 이의민이 경주이씨인가? 정선이씨인가? 하는 점이다.
고려사 열전에는 이의민을 ‘경주인’이라고 했고 경주이씨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주이씨 측에서는 이의민이 단지 경주에 거주했을 뿐 경주이씨로 보지 않는다.
고려사 열전에서 ‘경주인’으로 나타난 인물은, 고려개국공신 배현경, 고려초기의 명신 최언위, 성종때 고려의 국가안정을 위해 기여한 최승로, 광종때 문하평장사를 지낸 최량,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예종때 문하시중을 지낸 김경용과 이의민이다. 배현경은 경주배씨의 시조이고 최언위는 경주최씨, 김부식은 경주김씨이다.
그러나 경주인으로 표기되면 경주를 본관으로 보는 것이 사학계의 통례이다.

고려사는 무신의 난을 주도한 이의방을 ‘전주인’이라고 했다.
이의방의 동생 이린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6대조인데 이성계는 전주이씨이다.
태조 이성계의 세계를 보면 이린➡이양무➡이안사(목조)➡이행리(익조)➡이춘(도조)➡이자춘(환조)➡이성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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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의 아버지 이양무는 고려 고종 8년(1221) 4월에 과거에 급제(당시 과거담당의 지공거가 우간의대부 최선단)하였다고 고려사 지 선거편에 나온다. 이의방이 정균에게 암살되자 이린은 처형되었지만 그 일가는 멸문되지 않아 문씨할머니(문극겸의 딸)가 아들 이양무를 데리고 숨었고 나중 세상이 조용해지자 이양무는 급제했다. (급제시 이양무의 나이는 50여세로 추정됨)
전주이씨의 경우를 준용하면 이의민을 경주이씨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
이의민을 정선이씨로 보는 주장은 정선이씨 세보에 전해오는 내용에 근거하는데, 그 내용이『경주에서 개경으로 올라간 이의민이 최충헌의 손에 죽자 갑자기 집안이 몰락하여 이의민의 후손인 이우원이 경주에서 강원도 정선으로 숨어들었고 본을 정선이씨로 바꿔 대를 이었다』이다.
다른 기록에는 『고려 명종 26년 최충헌에게 이의민과 아들 이성순이 화를 입어 경주로 낙향했다』고 했다. 그러니 이의민➡이성순➡.....이우원의 가계이다.
정선이씨의 시조는 이양혼으로 알려져 있다. 이양혼은 송나라 안남국 남평왕 건덕의 셋째 아들로 중국 북송 휘종때 국난을 피하여 우리 나라로 건너와 경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정선이씨 세보에 따르면, 이양혼의 9세손 이우원이 고려 국자생원(국자감 출신의 생원)으로 상서 좌복야(상서성의 정2품 벼슬 · 품계에 비해 실질적 지위는 미약했음)에 추봉된 뒤 정선으로 옮겨와 그 후손들이 정선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우원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음)
정선이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는 이우원의 아들 이형규(역시 고려사에 나타나지 않음)가 18세에 등과하여 고려 충렬왕때 수문전 태학사(수문전은 문서관리및 국왕에게 경전강연를 하는 기관으로 태학사는 종2품으로 수문전의 장)에 올랐으며 후손 이자생(고려사에 등장하지 않음)이 군기시윤(병장기를 만만들던 군기시의 벼슬)을 지냈다. 그외 대호군(대호군은 조선시대의 벼슬로 고려때 대장군이 대호군으로 바뀌면서 실직이 아닌 산직이 됨)을 지낸 이희성과 부호군 이의, 부사 이득량 등이 있었다.
시조 이양혼이 송나라때 안남국 남평왕 건덕의 셋째 아들로 북송 휘종때 국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왔다고 했는데 송나라 휘종때의 국난은 1125년~27년에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 낙양에 침입해 왕과 왕족을 잡아간 ‘정강의 변’이다. 송 휘종은 1110년 황제가 되어 정치를 총신들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태평스럽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여 국정이 난맥상이 되자 그 틈에 금나라가 침입했다. 금나라군에게 황제와 비빈이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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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난리가 나고 송나라는 남쪽으로 옮겨가 남송되는 이 ‘정강의 변’ 때 고려로 도망온 중국사람은 고려사에 없다.
이양혼의 9세손 이우원이 정선으로 이거했는데, 9세손이면 시조와 약 270년의 시차가 난다. 그러므로 9세손 이우원의 활동시기를 고려말이나 조선초기로 봐야 한다.
이의민을 굳이 정선이씨로 본다면, 1170년에 역사에 등장하는 이의민은 1120년대 중국에서 건너온 이양혼의 아들이거나 손자로 보는게 자연스럽다. 이의민이 중국유이민의 후손이라면 이런 출신관련사항이 나타났을 것이다. 송나라는 금나라와는 달리 고려에서 존경받는 나라였으니 이의민이 출신을 숨길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의 출신에 일언반구도 얘기하지 않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 정선이씨는 남한에 총 809가구, 3,107명이 살고 있다. 집성촌으로는 강원도 철원군 인목면 승양리(인목면은 철원군 북쪽지역으로 북한지역에 편입), 함남 안변군 안변면 상·하화산리, 황해도 재령군 삼강면 설산리등인데 모두 북한지역이다. 조선 500년간 과거급제자를 수록한 조선 사마방목에는 11명의 정선이씨가 등장하는데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 (대성이 아닌 소수 성씨인 정선이씨가 11명의 급제자를 낸 것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정영(선조39년 생원 급제 - 거주지 서울)
이익재(숙종1년 생원급제 - 거주지 재령)
이제한(숙종8년 진사급제 - 거주지 평양)
이기중(순조19년 생원급제 - 거주지 재령)
이장훈(헌종14년 진사급제 - 거주지 재령)
이창현(고종11년 생원급제 - 거주지 서울)
이대윤(고종17년 생원급제 - 거주지 평양)
이종백(고종17년 생원급제 - 거주지 해주)
이달원(고종19년 생원급제 - 거주지 안변)
이병익(고종22년 생원급제 - 거주지 해주)
이순응(고종28년 진사급제 - 거주지 풍덕)

이상의 기록에서 정선이씨의 세거지는 황해도 재령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평양, 서울, 해주 등지이다. 이의민이 정선이씨라면 그 후손들은 경주나 정선으로 낙향하지 않고 개경 근처에 자리잡아 이런 과거 합격자의 면면을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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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선이씨 세보에는 조선시대 관직에 오른 인물로 이익손(관직:사정)∙이희성(관직:대호군)∙이의(관직:부호군)∙이백수(관직:현령)∙이신(관직:동지중추부사)∙이백녹(관직:판관)∙이득양(관직:부사)∙이재윤(관직:동지중추부사)∙이명선(관직:동지중추부사)∙이태유(관직:동지중추부사)∙이성삼(관직:지중추부사)∙이동후(관직:첨정)∙이상연(관직:동지중추부사)∙이만석(관직:지중추부사) 등 20여명 이상인데 이중 모두가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지 않고 상기 급제자들과도 중복되지 않는다.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당한 뒤 살아남은 아들 이성순이 낙향하여 정선이씨의 대를 이었다고 했는데 고려사에 기록이 없다. 이의민의 아들은 이지순과 쌍도자인 이지영과 이지광 3명뿐으로 고려사에 나와 있다.
정선이씨 세계를 그대로 믿기도 어렵거니와 차라리 이의민을 정선이씨보다 경주토착인인 경주이씨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2

고려사를 보면, 『이의민은 ‘경주인’이니 아버지 이선은 소금과 체를 파는 것을 직업으로 했고 어머니는 연일현(지금의 포항시 연일읍) 옥령사 절의 노비였다』했다. ‘경주’는 당시 동도(東都)로 불렸다. 고려 3경은 개경외에 서경, 남경, 동경을 가리키며 동경은 경주이다.
경주인들은 신라왕경인으로서 남다른 자긍심과 함께 배타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는 건국후 오랫동안 지방호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그들은 지방의 실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북계나 동계 같은 변방에서 ‘도령’과 같은 호족군 성격의 사령관들이 고려 지방군인 주현군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내내 큰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이런 호족들의 잔재에 연유한다.
(호족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대규모 지방반란들이 없다.)
경주이씨는 익재 이제현으로 대표되는 고려명가이다. 천민출신으로 알려진 이의민은 이런 명가로서의 경주이씨와는 분위기가 맞지 않다. 경주이씨의 시조는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부의 알천 양산촌장 표암공 이알평이며 중시조는 신라진골귀족 이거명이다. 이거명은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가 엉성하여 빼먹은 것이 많다 해도 이씨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알평 이후 신라사에 등장하는 두번째 이씨는 벽진이씨의 시조 이총언이다. 통일신라말 후삼국정립기에 왕건을 도운 벽진이씨의 시조 이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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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은 지금의 경북 성주군 지역의 호족장군으로 왕건에게 귀부하자 왕건이 본읍장군의 관작과 229호를 내렸다. 이씨가 통일신라말의 혼돈속에 다시 나타났는데 그 이전에 이씨들은 모두 어디 있었는가?
여기에 두두을의 비밀이 있다.

이의민의 아버지 이선이 소금과 체장수였고 어머니가 연일현 옥령사의 비(婢)여서 이의민을 천민으로 본다. 그는 정말 천민인가?
고려 백정은 조선의 양민이듯 조선과는 다른 고려시대의 신분잣대가 있지 않았을까?
이의민은 나중에 경주에서 중앙의 금군에 추천되는데 천민을 중앙의 금군에 추천하는 것은 불경죄가 아닌가?
소금과 체를 팔면 천민인가?
소금은 당시 전매물품으로 무척 소중한 물품이었다. 이의민을 천민으로 언급한 것은 고려시대가 아니다. 조선시대에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그가 천민이 되었다. 고려사 저자는 세가 명종사신의 찬에 명종의 나약함을 질타하면서『....이의민과 같은 자는 특히 한 필부인 것이니 임금이 한 사람의 신하를 보내어 그 임금 죽인 죄를 책망하여 베어도 족한 것이다.......』하였다. 이의민을 지칭해 필부라고 했다. 이의민이 천민이라 한 것은 정종 5년에 정한 천자수모(賤者隨母 천인은 모계를 따른다)의 법을 요즘사람들이 해석하여 천민으로 만든 것이다.

고려사에 이의민의 어릴 때 일화가 있다.
『아버지 이선의 꿈에 어린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경주 황룡사 구층탑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꿈을 깨어 생각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이 흥미로운데, 당시 황룡사탑이 경주 황룡사에 있었다. 신라 진흥왕때인 서기 560년경에 지어진 황룡사탑이 이의민의 어린 시절인 1100년대 중반까지 있었으니 무려 600년 가까이 황룡사 목탑이 남아 있었다. 여러 번 보수도 했겠지만 신라인들의 뛰어난 건축기술은 수십미터의 목탑이 풍우와 지진에도 쓰러지지 않고 남아 있게 했다. 고려중기까지 경주에서 어디서나 우뚝한 황룡사탑을 바라볼 수 있었다. 경주분지 가운데에 우뚝 솟은 황룡사탑은 몽고족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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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은 출생때 남다른 기이함을 보여주었고 성장과정도 남달랐다.
이의민은 장성한 뒤 키가 8척으로 완력이 뛰어났으니 장골(將骨)이었다. 이의민이 경주에서 왕도 개경으로의 진출은 쉽지않은 길이었다. 어려운 곡절을 겪고 개경으로 올라간다.
고려사를 보면 이의민이 두 형과 함께 경주 향곡(鄕谷)에 횡행하매 사람들의 근심이 되는지라 당시 안렴사(고려시대의 도지사로 달리 안찰사 · 절도사 · 도부서 · 안무사등으로 불렸음)인 김자양이 잡아 감옥에 넣었다 했다. 이의민 3형제는 무리를 이끌었고 횡행한다고 했으니 작당을 하여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민원을 야기하고 치안을 방해하였다. 당시 경주에 주재했던 경상도안렴사가 그들을 체포하여 문초했다.
“이 놈들! 너희들같은 무뢰배들이 없어져야 세상이 조용한 법이다. 엄히 다루어라!”
살이 터지고 피가 튀는 문초가 있었는데 취조중 두 형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런데 이의민 만이 죽지 않았다.
‘이 놈은 하늘이 돕는 것인가? 예사 인간이 아닌가 보다. 나라를 위해 소용이 될 자라면.........’
김자양이 그 사람됨을 예사롭지 않게 여겨 개경의 경군으로 추천한다. ‘이의민의 향곡 횡행’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어떤 단체를 만들어 결사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신라부흥운동과도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이의민이 출세하여 개경의 세력이 되었을 때 이의방이나 이고와는 달리 이의민을 동경인(경주인)들이 돕고 있다. 이의민은 한때 경주의 히어로(HERO)였고 그의 무리들이 온존하여 있었고 이의민이 죽고 난 뒤 그 일당과 족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떠나게. 개경으로.”
이의민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김자양이 앞날을 열어준다.
이의민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처와 함께 이고 지고 개경으로 간다. 그 부인이 최씨라 하였으니 경주최씨일 것이다. 이의민이 경주이씨요, 부인이 경주최씨로 경주에 연고를 가진 부부였다.
최씨는 신라때 ‘득난’(구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불려진 6두품이었다. 그런 최씨도 상당수가 고려초에 서민화되었다. 특정성씨 모두를 문벌귀족이라 할 수 없다. 최치원의 후손인 경주최씨 모두는 귀족이 아니다. 최씨가 분화되어 귀족이 된 이도 있고 양민이나 천민이 된 자도 있었다. 전국에 걸쳐 흩어지면서 그 본적이 나누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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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귀족이나 문벌은 어느 지역에서 일족이 상당기간 영속적인 부와 권력을 쌓으므로 형성된다. 조선말의 의병장이자 평산신씨인 신돌석 장군은 영덕의 천민이었다. 당시 조정에는 지중추원사 신명순, 좌의정 신응조, 판삼군부사 신헌등 평산신씨가 쟁쟁했는데 신돌석 장군은 자신은 정작 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1907년 팔도의병들이 서울로 진군할 때 양반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뎅-
인정의 종소리가 울리자 개경의 성문은 닫히고 말았다.
“문이 닫히고 말았구려. 어디에서 이 밤을 보내야 하나...”
“저기 사찰이 있군요.”
“저 절에 가서 물어뵈야겠군,”
이의민이 개경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고 성문은 닫혔다. 그들은 성 남쪽의 사찰 연수사에 투숙하였다. 그날 밤 이의민은 꿈을 꾼다. 꿈에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부터 궁궐에 이른지라 이의민이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궁궐에 닿았다. 꿈을 깬 이의민은 가슴을 펼쳤다. 그에게 도래할 새로운 세사을 펼쳐보인 대망의 꿈이었다.
능력있는 이의민인지라 김자양의 소개서를 보이고 시범을 거쳐 경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실력도 곧 인정받는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이의민은 수박(手搏=태권도)를 잘하니 의종이 사랑하여 대정(隊正=종9품의 최하위장교, 오늘의 소위급 정도로 휘하에 25명 정도의 졸병을 거느림)에서 별장(정7품으로 오늘날의 소령급 정도 벼슬 · 낭장이 지휘하는 단위부대의 서열 2위)에 옮겼고, 1170년 일어난 정중부의 난에 이의민이 죽인 바가 많았으므로 중랑장(오늘날의 대령급 벼슬 · 사단참모급)으로 임명하였고 갑자기 장군(오늘날의 준장급)으로 옮겼다.

이의민은 수박을 잘했다. 수박은 오늘날의 태권도이다. 고려사에는 수박에 대해 여러 곳에 나온다. 태권도의 원형인 수박은 수박희, 박희 등으로도 불렸는데 ‘오병수박희’가 있어 5명이 서로 대련을 펼치기도 했다.
고려사 열전 두경승 편을 보면, 두경승이 처음 왕실을 근위하는 숙위군이 되었을 때 수박부대에서 두경승을 불러 굳이 대원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두경승의 외숙부인 상장군 문유보가 말렸다.
ꡒ수박은 천한 기술이니 장사가 할 바 아니다.ꡓ라고 말려 두경승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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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았다. 그러나 무장인 두경승이 수박을 배우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전투의 필살기술인 수박은 군인들에게 기본기였다.
후대에 권세의 정상에 오른 최충헌은 자기저택에서 벼슬 주기를 마음대로 했는데 손님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힘있는 자에게 수박을 시켜 승자에게는 교위(대정 위의 벼슬로 정8품으로 대위 정도의 하급무관벼슬)나 대정 벼슬을 상으로 주었다.
고려말의 충혜왕도 수박을 즐겼는데 3년(1342) 5월에 궁내의 상춘정에 행차하여 수박희를 관람하였고 이듬해 2월에 씨름과 수박을 화비궁에서 관람하였고 6월에도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공민왕때의 장수 변안열(심양출신·원주변씨의 시조)은 밀직부사(정3품의 벼슬로 궁중의 숙위를 담당) 시절, 추신(추밀원의 신료)과 재신(중서문하성의 신료)들이 교외에 모여 연회할 때 임견미, 염흥방 등과 더불어 수박희로 승부를 다투었다고 했다.
태권도는 고려 수박을 통해 그 전통을 오늘까지 이어왔는데 수박의 위력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의민과 두경승이 서로 힘 자랑을 하는데, 이의민이 맨주먹으로 가둥을 치니 서까래가 움직였고 두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니 벽이 뚫렸다고 했으니 두 사람의 수박이 상당한 경지에 있었음을 알겠다.
이의민은 맨손으로 의종왕을 살해하였는데 이것도 격파같은 수박의 기술인 것이다.
이의민이 경주에서 성장했음에 비추어 수박이 경주지역에 전승되어 왔음을 알겠고 그 경주의 수박은 신라때부터의 수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몸이 부딪는 육탄전이 잦은 삼국시대에 수박은 중요전투기술이었다.
의종이 1170년 보현원 행차시에 보현원(개경 인근에 있었음)에 거의 이르러 무신들에게 수박을 하게 하였는데, 이는 수박희를 하므로 무신들이 추위에 겪는 어려움과 실망을 알고 위로하고자 함이었다. 군사들에게 시상하므로 격려하고저 했다. 그러나 의종왕의 뜻과는 반대로 무신들을 더욱 분기되었고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
이의민이 수박을 잘 하니 의종이 사랑하여 대정으로부터 별장까지 옮겼는데 이의민이 의종을 배신하고 그를 죽이게 되는 것은 운명의 길이기에 이의민도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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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년(의종24년) 의종왕의 보현원 나들이때 난을 주도한 이는 이의방과 이고, 정중부였다. 이의민이 죽인 바가 많다고 하나 그는 하수인으로 타고난 무력을 발휘했을 뿐이다. 별장으로서 무신의 난에 참여하고 중랑장을 거쳐 장군이 되었는데 원래 그의 벼슬인 별장은 정7품의 무장으로 요즘 군대로 치면 소령 정도로 그리 낮은 벼슬은 아니다.
이의방이나 이고는 무신의 난 당시 견룡행수로 계급이 정8품 산원이었다. 산원은 별장 아래의 하위무관직이다. 당시 별장 이의민은 상장군 정중부보다야 훨씬 아래지만 이의방이나 이고보다 높다. 고려 중앙무관들의 벼슬은 상장군➡대장군➡장군(이상 장군급)➡중랑장➡낭장➡별장(이상 영관급)➡산원➡교위➡대정(이상 위관급)이다.
오늘날의 쿠데타에서도 중견 영관급이 그 주동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1961년 일어난 5.16혁명도 주동자그룹인 육사 8기들은 당시 소령이나 중령급이었다. 영관급이 주역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싸울 수 있는 단위부대의 지휘관이 되기 때문이다. 작전단위가 되는 대대의 지휘관은 병력과 무기를 자기 책임하에 동원할 수 있다. 당시 산원으로 견룡행수인 이의방이나 이고는 자신이 통솔하는 견룡부대를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무신의 난 이후 이의민에게 중랑장을 제배하는데 중랑장은 낭장위의 벼슬로 대령급이다. 두 계급을 뛰어 오른 것이다.
군대는 서열사회이다. 별장으로서 그보다 낮은 벼슬의 산원인 두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이의방의 부하로 들어간다. 이런 점이 이의민 만의 특징이다. 시류에 따라 이해득실을 계산해 어제의 부하에게 고개 숙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기회가 오면 나도 세상을 호령하게 되리라....’
이의민은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며 참았다. 잘 보면 난세의 살아남는 처신이요, 달리보면 교활한 면모를 지닌 이의민이었다.

시국은 급박하게 변해갔다.
무신의 난의 주모인 이의방도 산원에서 고려의 핵심군단인 응양용호군 중랑장으로 오르고 그의 형 이준의가 왕의 최측근 비서로서 ‘왕의 입’으로 일컬어지는 승선(왕의 측근기구인 추밀원의 정3품 핵심벼슬)이 되었다. 모든 권력이 이의방으로부터 생겨났다.
의종이 쫓겨나고 명종이 서자 이의방은 대장군(사단장급․소장급) 전중감(종3품․왕실친족담당업무) 겸 집주(고려때 추밀원 소속의 정3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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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일명 지주사로 승선위의 상위직임)에 오르고 벽상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대위(산원)가 졸지에 소장(대장군)으로 오르니 주변에서 반발이 없을 수 없다.
명종 원년(1170)에 대장군 한순, 장군(준장급) 한공, 신대예, 사직재, 차중규 등이 몰래 어울려 불만을 토로했다. 하극상이 극도로 달하니 지금까지 사직을 받들어 일해 온 자신들은 무엇인가?
“이의방, 이고 등이 제멋대로 함을 도저히 더 두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ꡓ
“임금을 마음대로 세우고 폐하는 일이 가당한가?”
“우리 손으로 그들을 해치우자.”
장군 사직재는 상장군 정중부의 선배이다. 무신난이 일어나기 23년전인 의종 1년(1147) 12월에 어사대가 왕에게 아뢰는데,
『수창궁 북문은 일찌기 조칙을 받들고 봉쇄하는 문인데 산원 사직재와 교위 정중부 등이 함부로 열고 출입을 마음대로 하오니 청컨대 이들을 처벌하소서』했지만 왕이 듣지 않고 이들을 달래어 앞으로 하지 말게 하였다. 당시 사직재는 대위급인 산원이었고 정중부는 중위급인 교위였다. 20여년 세월이 흘러 산원 사직재는 장군이었고 교위 정중부는 그보다 두 계급 높은 상장군이 되었다.
“장군들이 일을 꾸미고 있어?”
그들의 의논을 엿들은 이가 있어 이의방에게 밀고하니 이의방이 즉시 군사를 풀어 이들을 체포해 죽였는데 오직 차중규만은 평소에 이의방과 친하였으므로 죽음을 면하여 변방에 유배하였다.
차중규는 얼마후에 유배가 풀리어 북계에 병마사로 나갔다가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자 운주(평북 운산)에서 죽는다. 북쪽 압록강을 지키던 차중규는 연주(영변)를 제외한 모든 고을이 조위총에게 붙자 분대감찰어사(어사대의 북계사무소인 북계분대의 어사) 임탁재․녹사(고려때 정8품의 무관 벼슬∙산원과 동급으로 주로 지방군에 복무) 이당취 등과 함께
연주로 가다가 중간고을인 운주(운산)의 운반역에서 조위총 편의 운주 사람들에게 들켜 싸우게 되었다. 차중규는 싸우다가 그들에게 죽고 감찰어사 임탁재․녹사 이당취 등은 달아나 한밤중 연주의 성밑에 이르렀다. 그들의 뒤에는 운주의 추격군이 따라오고 있었다. 급한 그들은 병마사의 인(印)을 성에 보이며 말하기를,
ꡒ차중규 병마사가 이미 죽었으니 우리 무리가 돌아 갈 곳이 없습니다.부디 우리 무리를 살려 주시오.ꡓ하여 연주도령 현담윤과 그 아들 현덕수가 성문을 열어 그들을 들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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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규는 목숨을 얻어 4년 뒤에 북쪽 전장에서 죽은 것이다.

3

급박한 정국의 변화 속에 이의민은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생각하면 개경에 별다른 기반이 없는 자신이 아닌가? 이 상하가 전도된 난국이 자신에게 절호의 기회도 될 수 있다. 이의민은 이를 놓치지 않았고 자신을 키워준 의종을 살해하는 패역의 임무까지 맡는다.
이의민은 의종을 서기 1173년(명종3년) 경주에서 살해한다. 간의대부(중서문하성 낭관의 제4위 벼슬로 간쟁을 담당) 동북면병마사(지금의 강원북부지역 행정관겸 군사령관) 김보당이 거제에 유배된 의종을 받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원래 김보당은 중앙의 세족 출신으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김보당은 이준의등 무신들에게 부용하는 문신들을 탄핵하다가 중앙관직인 중서문하성 간의대부(정4품)에서 공부시랑을 거쳐 동북면병마사로 좌천되자 민심을 업고 반란을 일으켰다. 간의대부는 중서문하성의 벼슬로 재신이 아닌 낭관이다. 고려조정은 왕 아래에 9명의 재신이 중서문하성에서 국정을 총괄했는데 그 면면을 보면,
종1품 문하시랑(나중 문하시중)
종1품 중서령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
정2품 문하평장사
정2품 중서평장사
종2품 참지정사
종2품 정당문학
종2품 지문하성사까지
모두 9명이고,
재신보다 격이 낮은 중서문하성의 낭관을 보면,
정3품 좌·우 산기상시(2명)
종3품 직문하
정4품 좌·우 간의대부
종4품 급사중 / 중서사인
종5품 기거주 / 기거랑 / 기거사인
정6품 좌 · 우 보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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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6품 좌 · 우 습유
모두 14명이다.

김보당의 전직인 간의대부는 이들 중 중앙관서 서열 13위의 고관이었다. 추밀원이나 상서성, 어사대에도 고관이 있었지만 이들 고관직위를 중서문하성의 고관이 겸하는 경우가 많았던게 고려사의 관직제도이다. 김보당이 맡은 병마사 직위는 북방 양계지역의 군사령관이자 행정관이다. 병마사는 세분하면 병마사(3품) · 지병마사(3품) · 병마부사(4품)의 세 직위인데 이 모두를 통칭해 병마사라 했다. 원래 병마사는 이름 그대로 군사적 기능뿐이었지만 8대 현종때 이후 도지사로 행정관의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동북면병마사이니 양계중 동계지역의 병마사였다.
당시 김보당의 좌천을 가져온 상소는 탄핵대상이 문극겸과 이준의였다.
명종 1년(1171) 9월에 좌간의대부 김신윤∙우간의대부 김보당∙좌산기상시 이소응∙좌사간 이응초∙우정언 최당(원로대신 최유청의 아들)
등이 상소하기를,
ꡒ전조(의종)의 재상 최윤의(해동공자 최충의 현손)와 간의 이원응 및 중승 오중정 등은 환관 정함의 고신(임명장)에 서명하였고, 서해안찰사 박순고는 망녕되게 노인성(용골자리좌의 가장 밝은 카노푸스별∙겨울철 남쪽하늘에 보이는데 이 별을 동양에서 노인성이라 하였고 이 별이 보이면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하였음)이 나타났다고 아뢰었고, 지수주사(경기도 수원군수) 오록지는 망녕되게 금구(金龜=금빛거북이로 국가평안의 상징)의 서(瑞)를 바쳤으니, 청컨대 모두 자손을 가두소서.“
이 상소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상소는 계속되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음 두사람에 대한 견제이다.
“또 승선은 왕의 입이요 혀라 할만 하니 그들의 임무인 왕명의 출납이 신실하고 공정해야 함에도 이준의와 문극겸은 그 직이 승선외에 대성(臺省=중대성의 약자로 재신과 추신을 통합해 이르는 말)의 직을 겸하고 있으니 청컨대 그 겸직을 풀도록 하소서.ꡓ
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따랐으나 오직 최윤의와 문극겸의 일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간관들이 대궐에 엎드려 계속 상소하는데 이준의가 술을 먹고 취기로 인하여 순검군을 시켜 이들을 능욕하게 하였다.
명종왕이 이 말을 듣고 이준의를 불러 달래고 간관들을 가두었다.
그로부터 열흘 뒤에 왕은 상소를 주도한 자들을 좌천시켰는데 김신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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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판대부사에, 김보당을 공부시랑(정4품)에, 이응초를 예부 원외랑(정6품)에, 최당은 전중내급사(왕실친족업무를 맡은 전중성의 하위벼슬)에 발령되었다. 이들 좌천의 발령자들 중에 이소응은 빠졌는데 이는 그가 무신인 때문이었다. 그 뒤 김보당은 병마사를 맡아 다시 외지로 내쳐지자 원한을 가지고 반란을 도모한 것이었다.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폐위된 의종은 지금의 거제도 사등면 둔덕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사등면은 거제도로 들어가면 거제대교에서 우측에 보이는 지역이다.
“언제 이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머지 않아 대왕을 모시러 개경에서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죽 좋을까...”
의종왕은 호화로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그의 애첩 무비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앞에 조수가 들고나는 바닷가를 따라 갈매기들이 떼지어 날고 있다.
의종이 외론 귀양살이를 하며 바라보며 탄식한 바다가 둔덕마을 앞바다이다. 지금도 거제도 둔덕리의 하둔마을을 중심으로 고려 의종의 전설이 전해온다. 비록 많이 허물어졌어도 의종이 쌓은 것으로 알려진 폐왕성이 둔덕 마을 뒷산에 상당한 규모로 남아 있다.
마을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얘기에, ‘둔덕’은 의종이 군사를 둔진한 때문에 ‘둔덕’이고, 마을 북쪽 ‘거림’은 임금이 사니까 숲을 만들어 가렸던 곳이고, ‘농막’은 의종을 따라온 평민들이 농사를 짓던 곳이며, ‘마장’은 군마를 방목한 곳이며, ‘망골’은 반란군의 추격을 지켜보던 망터요, ‘술역’은 의종의 무리가 육지의 상인과 교역하던 수역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지명과 일치하므로 막연한 전설 이상의 호소력을 지니고 있어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의종관련 설화를 그대로 믿고 있다.
의종이 성을 쌓을 정도면 상당한 동원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의종이 거제도에서 3년간 머무르면서 통치행위를 한 것은 아닐지... 민심이 무신들을 미워했으므로 의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신하들이 이곳에 모일 수 있다.

“서북면에서는 전혀 호응이 없어?”
김보당은 놀랐다. 기치를 들었지만 서북면에서 호응이 없었다. 그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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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한 동북면은 서북면에 비해 좁은 지역이다. 거사가 성공하려면 서북지역에서 호응해주어야 했는데 반응이 없는 것이다. 문신출신인 김보당의 한계도 있었지만 북방지역에의 지역적인 연고도 부족했고 치밀한 사전준비기간도 부족했던 때문이었다.
이런 면면은 1년 뒤인 1174년에 일어난 조위총의 난과 비교된다. 조위총의 난에는 연주(평북 영변)를 제외한 서북과 동북 지역 모두가 호응했다. 조위총 역시 문관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서북지역에 오랜 연고를 두고 있었고 (고려사에는 세계를 상실했다고 했다) 서북출신 인물로 존경받고 있었다. 학식이나 문장력도 훌륭했고 뛰어난 전투력을 지녀 말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조정은 조위총을 군무의 실무장관인 병부상서로 임명했고 서북의 요새지인 서경유수를 맡겼다. 조위총은 그의 능력을 한껏 발휘해 고조선 우거왕이 왕검성을 지키고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 남건이 평양을 지키듯 서경을 지켰다.
난세에 태어나 패하여 역적으로 기록되었지만 대외항쟁의 시대였다면 조위총은 우리 한민족의 기개와 끈기를 보여줄 수 있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기치를 든 동북면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에게 유일한 지지자가 동북면지병마사(3품관) 한언국이었다. 한언국도 김보당과 같은 문신이다. 한언국은 명종 2년 7월에 우간의대부로서 동지추밀원사 김천과 함께 과거를 담당한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관리들을 선발했다. 지공거는 신료중에도 명망있는 자가 맡았는데 그런 자리에서 변장의 한직인 지병마사로 밀리니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김보당은 장순석과 유인준 등을 보내어 거제에서 전왕 의종을 받들고 계림(경주)으로 나오도록 하였다.
“경들이 이제야 나를 데리러 왔구나.”
“늦었사옵니다. 어서 빨리 육지로 나가시옵소서.”
“어디로 가는가?”
“계림으로 가야 합니다.”
장순석과 유인준이 계림으로 향한 것은 그 곳을 반란의 주요핵심지역으로 본 때문이다. 상당한 호응을 예상한 지역이 거기였다.
김보당의 난이 일어나자 애초에는 상당한 호응이 있었다. 고려사 열전 두경승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군사를 일으키매 남쪽지방이 다 호응하거늘 이의방이 그 종형인 낭장(중령급) 이춘부 및 두경승으로 남로선유사를 삼으니 이춘부의 성질이 포학하여 읍재(읍장)를 많이 죽이는지라 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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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이 조용히 타이르기를,
“처음 임금의 명을 받던 날에 생각하기를,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의 반역에 각 고을이 호응하여 난리가 서로 고을마다 연결되어 평정하기 어려울까 두려워했습니다. 그간 공의 위력으로 베어 죽임이 이미 많으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모두 이들을 너그럽게 보시고 만약 반역의 조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죄가 현저하면 죽이소서.ꡓ
라고 하니 이춘부가 이를 쫓아 살육을 자제하니 남쪽지방이 기뻐하며 복종하였다』고 했다. 개경남쪽 지방에서 김보당의 반란에 대해 상당한 호응이 있었던 것이다.
의종을 경주로 데리고 온 장순석의 군사는 수백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의민이 그들과 싸워 의종을 탈취한 것인가?
장순석의 군사는 경주에서 경주부민들에게 살해된다. 경주사람들이 그들을 죽인 것인데 내용은 이렇다.
김보당의 수하 장순석, 유인준 등이 의종을 받들고 경주에 나타났다 하니 정중부와 이의방이 이를 듣고 이의민과 산원(散員=정8품∙대위 정도의 벼슬) 박존위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게 했다. 이의민 등이 경주에 이르렀는데 어떤 사람이 막고 말하기를,
ꡒ전왕 의종이 이곳에 온 것은 우리 고장 사람들의 뜻이 아닙니다. 장순석, 유인준 등이 스스로 온 것인데 그 무리가 고작 수 백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괴수들을 제거하면 나마지는 다 무너져 달아날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곳에 머무르시면 우리가 그동안 어찌 하여 이들을 처리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우리 경주인들에게는 죄를 묻지 말기 바랍니다.ꡓ하므로 이의민이 말하기를,ꡒ내가 어디 출신인가? 아무 근심하지 마라.ꡓ
하였다. 그 사람이 경주에 들어가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ꡒ장순석과 의종의 무리는 지금의 왕이 보낸 바가 아니니 죽인들 무슨 해가 될 것인가? 우리 손으로 그들을 죽이자.ꡓ
“왕도 죽이는가?”
“왕은 죽이지 말라. 잡아 두었다가 이의민이 처리토록 하라.”
하고, 밤에 군사로써 장순석 군을 포위하고 일거에 이들을 쳐서 수 백인의 머리를 베어 그 머리를 길 좌우에 나열했다. 의종왕은 경주객사에 가두어 지키고 이의민을 불렀다.
아무리 오합지졸이라지만 수백명의 군사를 일거에 공격해 쓸어 버린 경주의 무장세력들은 어떤 군사들이었을까? 상당한 무력을 지닌 훈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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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로 보인다. 고려 초기의 호족들이 중기까지 각 지역에 남아 있었다면 그 호족세력들이 거느린 사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의민의 일족인 경주이씨도 참여한 세력일 것이다.
당시 경주에는 분명 두 세력이 있었다. 경주이씨와 같은 평민세력과 경주김씨처럼 신라·고려 양조에 걸쳐 영달하던 신라왕실을 뒤이은 귀족 세력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 경주는 천년신라왕통을 이은 곳이다. 누가 우리를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고려 왕실도 신라의 외손이 아닌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경주김씨도 있었으니 고려 8대 현종은 태조 왕건의 손자로 친외가(아버지의 외가)가 신라잡찬 김억렴(경순왕의 백부)이다. 김억렴의 딸이 왕건의 부인(신성왕후)이 되었고 그 사이에 난 아들 왕욱의 아들이 대량원군 현종이다. 물론 혹자는 신성왕후를 합천호족인 합천이씨로 보는 주장도 있다.
“아니다. 이제 골품제는 없어졌다. 고려는 새로운 시대이다. 신라는 망했다. 김씨만의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라는 이씨를 비롯 새롭게 일어난 자들의 주장도 펼쳐지던 경주였다.

경주는 고려 내내 반란이 잦은 지역이었다. 신라때 17만호가 살았으므로 고려 중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도 경주에 가면 경주 주변 일원에서 신라때의 마을터를 논 가운데나 밭 가운데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신라가 망했어도 사람은 남았고 그들은 각기 경주의 독자적 무장세력이 되어 있었고 자주 반란을 일으켜 주현관들을 괴롭혔다.
‘전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의민은 망설였다.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 하늘에 두 태양이 없듯 지금 왕이 이미 있는데 다른 왕이 있을 수 있는가?’
‘살려두면 화근이 될 것이다.’
이의민은 의종을 살해하기로 했다. 살해장소는 경주 곤원사 절의 북쪽 못가였다. 곤원사는 경주 오능 서쪽에 있던 사찰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조에 ‘곤원사 북연은 신원사의 남쪽 2리에 있다’고 했고 ‘신원사는 귀교에 있다’고 했다. 신원사지는 경주시 탑동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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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부근에 있고 인근에 귀교의 석재가 남아 있으니 현재의 오능 근처에서 의종을 살해한 것이다.
고려사에,
『의종을 끌어내어 곤원사 북쪽 못 위에 이르러 술을 두어 잔 드리고 이의민이 의종의 등뼈를 추리니 손을 움직임에 따라 의종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문득 크게 웃었다. 왕을 죽여 시신을 요로써 싸고 두 가마솥을 합하여 시신에 달고 연못 가운데 던졌다』했다.
끔찍한 죽음이다. 손으로 등뼈를 추렸다 하니 이의민의 완력이 어떠 했는지 짐작이 간다. 수박의 일종으로 기압을 넣어 죽인 것으로 보인다. 의종은 물에 수장되는 비참한 운명이었다. 의종이 죽기 전 왕위에 있을 때 관상을 잘 보는 금나라 사신이 개경에 왔다. 왕이 사신에게 물었다.
“나는 몇 살이나 살까?”
금나라 사신이 답하기를
“왕의 수명은 지금 뜰의 신하들이 모두 죽고난 뒤까지 살 것입니다. 또 임천(臨川)에서 별세하실 것입니다.”
했다. 임천은 물가를 가리킨다. 의종은 자신이 장수한다는 얘기로 듣고 기뻐했다. 신하들보다 더 오래 산다고 했으니 90살 이상으로 살 줄 믿었다. 그러나 곧 무신의 난이 일어나 신하들이 먼저 비명에 가고 자신도 물가에서 죽임을 당해 물에 던져졌으니 금나라 사신의 말이 그대로 맞았다. 변란시대 다운 예언이요, 그 죽음이었다.
의종의 사망에 대해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있다.
『이의민의 부장 박존위가 의종의 시신을 요로써 싸고 두 가마솥을 합하여 넣고 연못 가운데 던지니 홀연 바람이 일고 티끌과 모래가 날리는지라 사람들이 모두 떠들며 (놀라) 흩어졌다. 곤원사 절의 승려 중에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 물에 뛰어 들어가 가마솥은 취하고 의종의 시신은 버리니 시신이 물가에 나와 여러 날이 되어도 물고기나 새들이 감히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주의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 등이 비밀리에 관을 갖추어서 담고 물가에 묻었다. 이의민은 왕을 살해한 것을 자기의 공으로 삼아 올려 지위가 대장군에 올랐다』
라고 했다.
무도한 무신시대에 의종을 몰래 장사치른 경주의 양심도 있었다. 전 부호장 필인 등이 비밀리에 관을 갖추어서 담고 물가에 묻었다고 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단종의 시신을 거둔 영월호장 엄흥도의 경우와 같다.
‘호장’이라는 직위는 무엇인가? 고려의 호장은 나중 조선시대에 아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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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변하는데 고려의 호장은 조선의 아전보다 격이 훨씬 높았다. 특정 지역의 실질 권력자가 호장이요 아전이다.(호장과 아전직은 향직이라 하여 경직에 대비되는 직위이다) 고려시대가 정립된 뒤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각 지방의 호족들이 지방유지로서 호장이 되었다.
호장은 오늘날 선출직 시장이나 시의장과 유사하지만 비공식적인 군사동원력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호장의 원류는 신라시대 대등이다. 대등은 귀족회의의 구성원을 말하는데 삼국시대에는 진골 이상의 중앙귀족만0이 대등이 될 수 있었고 대등들의 회의기관인 화백의 장이 상대등이있다.
통일신라 때가 되면서 각 지방의 호족들도 대등으로 불리었다. 통일신라의 지방벼슬로 당대등과 대등이 있는데 당대등은 약 200명의 지방 남정을 거느렸고, 대등은 약 100명의 남정을 거느렸다. 신라가 망하면서 이름이 바뀌어 당대등은 호장이 되고 대등은 부호장이 되었다. 이들 고려의 호장은 자신의 군사력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는데, 북방 변경지역의 군사령관인 ‘도령’이 호족적 성격을 띤 지휘관으로 보인다. 남쪽지역에 ‘호장’층이 있었음에 비해 북쪽에는 ‘도령’층이 있었다.
70세가 넘은 호장은 특별한 예우를 하여 ‘안일호장’으로 불렸으니 동래정씨의 시조인 정지원과 같은 이가 대표적인 안일호장이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성씨들중 호장이 시조가 된 경우가 많다. 시조가 호장인 대표적 성씨를 보면, 단양우씨, 창녕성씨, 합천이씨, 한산이씨등이다.
고려시대에는 각 지방관청마다 호장과 기관(記官=문서기록 담당자), 색리(각종 잡역담당)가 있어 중앙에서 발령받아 온 수령을 보좌했다.

“우리가 나서 왕의 시신을 거둡시다.”
필인은 여러 부호장과 호장들을 설득했다. 패륜한 무신을 미워하고 백성의 충직한 도리를 앞세워 의종을 장사치르도록 나섰다. 필인은 당시 경주에 수 백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호장들 중 한명으로 그를 지지하는 여러 호장들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나선 것이다.
‘물고기나 새들이 의종의 시신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서술에서 의종을 추모하는 민심을 읽을 수 있다. 상당수의 경주부민들이 죽은 의종에게 동정을 표했다. 의종을 죽이도록 이의민을 끌어들인 경주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곤원사에서 의종이 죽자 필원처럼 동정을 표한 ‘반이의민 세력’이 있을 정도로 경주내의 사정은 복잡했다. 필인이 경주의 호장이란 점에서 신라왕실의 후예였을 가능성도 높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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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의종이 죽는 것은 김보당의 난이 진압된 후였다. 이를 일지로 정리하면
·명종 3년(1173) 8월
○동북면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반란을 일으킨다.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이 김보당에 호응했다.
○김보당이 장순석 등을 보내어 거제에 가서 전왕 의종을 모시고 경주로 가게 했다.
·명종 3년(1173) 9월
○정유일에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을 잡아 죽였다.
○계묘일에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평안북도 안주 소재)가 김보 당 등을 잡아 보내니, 이의방이 이들을 저자거리에서 죽이고 문신들을 많이 죽였다.
○정사일에 계림 사람들이 전왕 의종을 객사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명종 3년(1173) 10월
○경신날 삭(초하루)에 이의민이 전왕 의종을 데리고 곤원사 북 쪽 연못 위에서 살해했다.
김보당이 난을 일으킨 기간은 불과 한 달여에 불과했다. 한언국이 잡혀 죽은 정유일과 김보당이 잡혀 개경으로 끌려온 계묘일과 차이는 불과 4일이다. 그러므로 한언국은 잡히자 바로 죽임을 당했고 김보당은 한언국과 함께 잡혔어도 개경으로 압송됐고 압송되어 죽음에 이르는데 걸린 날이 나흘이었다. 사실 변변한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김보당은 잡혔다.
의종을 경주사람들이 유폐하는 정사일은 김보당이 죽은 계묘날의 14일 뒤이다. 그러므로 경주사람들은 김보당의 피살소식을 들은 뒤 장순석, 유인준을 죽이고 의종을 가두었다. 혹시 김보당이 성공할지 모르므로 그 때까지 김보당의 군사들은 경주성내에 있었고 의종을 가두지 않았다. 김보당이 실패하고 잡혀 죽었다는 확실한 소식이 오자 경주사람들은 김보당의 패거리인 장순석, 유인준과 수백명의 병사들을 급습해 살해하고 이의민을 맞아들인 것이다. 장순석및 의종 일행이 경주성내에 있을 때 성밖에는 이의민이 성을 공격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의종이 죽자 시신을 요로써 싸고 가마솥에 달아 못 가운데 던진 박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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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이후 장군으로 진급해 분도장군(分道將軍=장군이 관할하는 주요 방수지역 사이 일정 소지역의 관리책임을을 맡은 군지휘관)이 된다. 그가 지키던 지역이 운중도(평안도 동북지역으로 흥화도와 함께 연도에 많은 성이 있었음∙평북 운산을 비롯한 그 일원지역이 됨)인데 그는 매양 자신이 의종을 죽이고 솥을 달아 던진 일을 자랑했다. 운중도의 사람들은 그 때마다,
“저 박존위를 누가 죽여줄 것인가?”
하며 미워했는데, 이를 해결해 준 이가 조위총이었다. 그들은 서경유수 조위총를 찾아가 박존위를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
“걱정 마시오. 박존위 쯤은 하루 아침 해장거리도 되지 않소.”
조위총은 난을 일으키자 가장 먼저 박존위를 잡아 목을 베었다. 군신의 도의를 저버린 박존위는 의종이 죽은 이듬해에 뎅겅 목이 달아나 장대에 걸리는 팔자가 되었다.

이의민은 1174년부터 1176년까지 일어난 조위총의 난에 출전해 공을 세운다. 병부상서겸 서경유수 조위총은 서경세력과 서북및 동북세력의 호응을 받아 난을 일으킨다. 전년의 김보당의 난 때에 무고한 인명들이 많이 희생되자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조위총이 맡앗던 벼슬 병부상서는 상서 6부의 국방실무총책을 맡은 정3품 직위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서가 정3품관으로 조선의 정2품 판서보다 낮다. 고려의 병부는 중서문하성의 재신이 겸하는 판병부사가 병부의 장이었고 그 아래에 병부상서➡지병부사(종3품)➡병부시랑(정4품)➡병부낭중(정5품)➡병부원외랑(정6품)이 있었다. 서경유수는 평양에 둔 정3품관의 행정관으로 3경(서경·동경·남경)의 행정수장중 한 명이었다.
조위총이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라면 진압군의 이의민은 장골형 골수 무장이었다. 난이 발발하자 이의민은 정동대장군 지병마사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함경도 안변과 강원영서 지역인 회양군을 연결하는 중요고개인 철령 일원에서 동북면의 반군을 맞아 싸운다. 난의 원 발원지는 조위총이 있는 서경이었지만 동북지역인 영흥만 일원의 여러 성도 조위총을 지지했다. 서북쪽에서는 조위총이, 동북쪽에서는 이름은 밝혀지지 않은 반군장수들이 군사를 이끌어 철령을 넘어 강원북부지역에 들어온다.
이의민이 그들의 접근을 막는다.
“장졸들은 후퇴하지 마라!”
동북의 징수가 누구였는지 알려지지 않았어도 그 역시 대담한 용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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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을 지닌 자로 이의민과 당당히 맞섰다. 평소 여진과 싸우면서 기병전으로 실력을 닦은 동북의 반군들이다. 전투 기세나 세력이 만만치 않다.
“관군들은 나를 따르라! 앞으로!”
이의민은 고함을 지르며 앞장서 말을 몰아 달려갔다.
곧 이의민에게 반란군들의 화살공격이 집중되었다.
앗- 날아온 화살이 이의민의 눈가에 맞았다. 피가 눈가에서 샘처럼 솟았으나 이의민은 손으로 이를 뽑고 급히 달려가 치니 적이 물러났다.
“물러나지 마라! 개경의 저 역적놈들을 쳐부숴라!”
반군장수는 군사들을 독려하는데 반군장졸은 차츰 힘에 부쳐 뒷걸음질 친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이의민은 그 특유의 뚝심으로 앞장서 올라온다.“
“군사들은 물러나지 말라! 물러나는 내가 참할 것이다!”
반군들의 대오가 잠시 흐트러지자 이 기회를 놓치지 읺고 관군들이 공격해 반군을 철령까지 추격했다.
철령 정상으로 물러난 반군들은 아직 대오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 바로 아래에 이른 고려 관군들도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의민은, “진격! 앞으로!” 공격을 명령해 올라가 적을 고개 아래로 내쫓았다.
이의민은 철령 정상에서 신속히 군사를 재배치해 적의 반격에 대비했다. 예상대로 얼마뒤 반군의 반격이 있었고 미리 준비한 대로 이의민의 관군이 포위하여 사방에서 일어나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포위망을 좁히니 적이 대파되었다. 그러나 이의민은 철령 뒤쪽으로 추격하여 더 진격하지는 않았다. 그곳은 반군의 소굴이니 대병력이 아니면 들어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이의민은 개경으로 돌아왔고 동북의 반군을 완전 섬멸하는 임무는 후일의 두경승에게 주어졌다.
이듬해 련주(漣州=평남 개천)를 칠 때도 이의민은 참여했다. 1176년 3월 관군은 련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련주는 교통요지이다. 서북면에서 평양 다음 가는 중요 요지로 평양에서 출발한 길이 련주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운중도가, 왼쪽으로 가면 흥화도가 된다. 주변의 수십여 성들을 제압하거나 성들 사이의 연락을 차단할 수 있는 곳이다. 련주를 점령당하면 북계의 모든 성이 위험했다.
련주가 반군에 가담하자 서경의 조위총은,
“거사가 절반은 성공이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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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근의 연주(延州=평북 영변)는 연주도령 현담윤과 그 아들 현덕수의 지도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련주에 입성한 조위총의 반군들은 연주를 수차에 걸쳐 공격하므로 관군은 련주를 먼저 회복하기로 했다. 련주를 치는 관군의 총대장은 원수 윤인첨이었고 이의민은 막하의 대장군으로 참전했다. 관군은 련주를 포위하고 치열한 공격을 가했는데 수성하는 련주군 역시 만만치 않다.
공성에 여러 날이 걸렸고 반군들도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저기 북천(청천강) 밖에 보이는 군사들은 어디서 오는 군사들이냐?”
수성하는 반군들이 내려다 보니 청천강 건너편에서 한무리의 군사들이 오고 있다.
“흥화도의 군사들입니다.”
반군들의 사기가 올랐다. 청천강 건너편 흥화도에서 반군을 돕는 지원군들이 오고 있다.
흥화도는 개경의 서쪽역로로 황주에서 평양을 거쳐 함경북도 귀주와 삭주, 위원등에 이르는 길이다. 고려의 중심관도로 주변에 큰고을이나 중요한 성이 많다. 개경을 오가는 금나라 사신들도 이 길을 이용했다. 고려의 관도는 역참로이자 고을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였다. 고려 관도는 모두 22개가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흥화도 - 황해도 황주에서 평안북도 의주에 이르는 관도.
29역. 서북면의 주요관도.
○ 운중도 - 서경에서 평안도 내륙에 이르는 관도로 모두 43역.
서북면의 주요관도.
○ 산예도 - 개경에서 황해도 연안을 따라 옹진까지 가는 관도
10역.
○ 금교도 - 개경에서 황해도 내륙을 따라 곡산까지 가는 관도.
16역.
○ 절영도 - 황해도 봉산에서 자비령(절령)을 넘어 서경으로 가는 관도 11역.
○ 흥교도 - 평안남도 해안을 따라 가는 관도. 12역.
○ 도원도 - 황해도에서 강원 북부에 이르는 관도. 21역.
○ 삭방도 - 강원북부인 고산에서 추가령지구대를 따라 원산만 북부에 이르는 관도. 모두 42역. 동북면을 연결하는 관도.
○ 청교도 - 개경에서 남경(서울)을 거쳐 경기도 파주에 이르는 관도.
15역.
○ 춘주도 - 춘천에서 횡계에 이르는 강원도 지역의 관도. 24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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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구도 - 남경(서울)에서 남한강을 따라 죽령을 넘어 경북 봉화에 이르는 관도. 30역.
○ 명주도 - 강원도 횡계에서 영동지역을 거쳐 양양군에 이르는 관도.
28역.
○ 경주도1 - 경기도 광주에서 이천, 음성을 거쳐 충북 괴산에 이르는
관도. 15역.
○ 충청주도 - 경기도 수원에서 천안을 거쳐 충남 홍산에 이르는 관도. 34역.
○ 전공주도 - 전주 삼례에서 전북 지역 내륙을 거쳐 대전 회덕에 이르 는 관도. 21역.
○ 승나주도 - 나주에서 광주등 전남내륙을 거쳐 전남 승주군에 이르는 관도. 30역.
○ 산남도 - 전주에서 육십령을 넘어 경남 거제에 이르는 관도.
28역.
○ 남원도 -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순천에 이르는 관도.
12역.
○ 경주도2 - 경주에서 대구를 거쳐 경북 영양에 이르는 관도.
23역.
○ 금주도 - 김해에서 창녕등 경남 내륙을 거쳐 울산 언양에 이르는 관 도. 32역.
○ 상주도 - 경북 문경에서 안동, 군위를 거쳐 청송에 이르는 관도.
25역.
○ 경산부도 - 경북 성주에서 황간, 옥천 등을 거쳐 김천에 이르는 관 도. 25역.

흥화도 20개 고을의 장병들은 기치창검을 번쩍이며 이쪽으로 오고 있다. 청천강은 겨울이라 꽁꽁 얼어 있어 건느기도 어렵지 않다.
“누가 나가서 저들을 무찌르겠느냐?”
원수 윤인첨이 말한다.
“저가 나가겠습니다.”
이의민이 나섰다. 이의민은 장졸의 선두에서 말을 달려 강을 향한 언덕을 내려간다. 졸병들도 장수의 뒤를 따르는데 그들의 뒤로 먼지가 인다. 반란군들도 창검을 겨냥하며 달려온다.
창- 째쨍-
장졸간의 격돌은 번개불과 피가 튀는 격전이다. 이의민은 반군의 창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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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내리치며 적진 가운데로 달려 들어간다.
“누가 대장이냐! 나와 붙어보자!”
“나는 용주도령 최 약이다. 임금 죽인 네놈을 살려두지 않겠다!”
최 약은 마상에서 화극을 휘두르며 덤빈다. 용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이고 도령은 지역 군사령관이다. 도령은 호족으로 그가 거느린 군사는 사병에 가깝다. 당시 변방의 방수는 호족들과 중앙군이 반반 정도씩 나누어 맡고 있었다. 그들이 싸우는 동안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청천강 강바람을 따라 눈발이 날려 군사들은 차츰 눈을 덮어써간다.
두 장수는 수십 차례 접전을 펼치는데 차츰 도령장수 최 약이 뒤로 밀린다. 그는 이의민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윽-
최약이 이의민의 칼에 맞아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적병은 놀라 물러갔다.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자 반군들이 이의민 군사가 보이면 달아났다. 이의민의 용맹이 전선에 걸쳐 소문이 났다. 옛말에 용장밑에 약졸이 없는 법이다. 소문을 들은 명종왕이 상장군 벼슬을 이의민에게 주었다.

1176년 서경이 함락되면서 조위총은 잡혀 죽지만 그 잔당은 이후 오랫동안 조정에 저항했다. 1177년 9월에 조위총의 잔적이 서경 담화사 일원에서 암약하다가 묘향산으로 옮겨 반란을 일으켰고 이 묘향산의 적을 토벌하기 위해 명종 8년(1178) 1월 이의민이 서북로병마사로서 여덟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가서 이들을 쳤다.
“이의민이다!”
잔당들은 그를 보자 달아났고 진압군은 300여 명을 참하고 진압했다. 명종왕은 이들 반란군들을 위력으로 귀순하여 백성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바랬지만 이의민은 그답게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장군. 반란한 자들도 고려의 백성이오. 살상을 자제하기 바라오.”
명종왕은 완곡히 이의민에게 부탁했는데 이의민은 이를 무시했다.
당시 남쪽에서도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는데 남북 모두가 시끄러워지니 실권자인 무인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정월에 개경 흥왕사 스님이 중방에 밀고하기를,
ꡒ흥왕사 스님 중에 덕수현(德水縣=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 덕수현 봉동면 흥왕리에 고려국립사찰인 흥왕사지가 있다) 사람과 더불어 난을 일으키기를 모의하는 자가 있습니다. 산원(散員=대위 정도의 무관벼슬) 고자장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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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니, 중방이 자세한 사실도 조사하지 않고 이 흥왕사 스님과 고자장을 체포하여 먼 섬으로 유배하고 몰래 사람을 뒤따라 보내어 바다 가운데에서 물에 던져 죽였다. 고자장은 성질이 포악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였는데 고자장은 그를 미워한 어느 승려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은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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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의 난 진압과정에서 이의민이 공을 세웠지만 조위총의 난을 진압한 최대공로자는 아니었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한 1등공신은 두경승과 윤인첨이었다. (두경승편 참조요)_
명종왕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금나라 사신의 귀환길을 연 두경승의 공로를 치하해 그를 상장군 지어사대사(규찰기관인 어사대의 정3품 서열 3위 직위)를 거쳐 수태위 참지정사(중서문하성의 종2품 서열 7위의 재신) 판이부사(상서6부의 이부의 장관으로 재신이 겸직함) 수국사(사관의 종2품 관직․사관서열 2위)에 옮겨 관리의 임명과 면직을 맡게 했다. 두경승이 총애를 받은 것이다. 또 그의 모습이 벽상에 그림으로 그려지는 벽상공신이 되고 평장사(중서문하성의 정2품 서열 5위)의 지위에 올랐다.
이렇게 두경승에 대한 왕의 신임이 두텁자 이를 가장 아니꼽게 여긴 이가 이의민이었다. 두경승이 벽상공신이 되는 날 축하잔치가 열렸는데 양부(兩府=중서성과 추밀원) 문무백관이 그의 집에 가서 하례하고 중방의 여러 장수들이 술에 취하여 각각 악기를 잡아 연주하였는데 두경승은 노래하고 수사공(사공은 왕의 고문기구 · 수는 품계가 낮은 사람을 높은 직위에 임명할 때 붙이는 접두사) 정존실은 소관(小管=황죽으로 만든 피리․대금처럼 옆으로 부는데 입술구멍이 하나이고 손 집는 구멍이 셋으로 8음을 냄 · 지금은 전하지 않음)을 부니 이의민이 노하여 꾸짖기를,
ꡒ어찌 재상들이 시중의 광대와 같이 노는가!ꡓ
하고 성을 내니 사람들이 흥이 깨졌다.
“저 괴팍한 성격에 남 잘되는 것은 못 보는군! 못 봐.....”
사람들은 잔치를 파하고 돌아가면서 이의민을 욕했다. 시기심이 많은 이의민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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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이의민도 두경승과 함께 문하시중의 품계에 올랐는데 같은 문하시중이라도 그 서열이 두경승의 아래였다.
“왜 나는 늘 자네 밑에 있어야 하나!”
이의민이 중서문하성에서 크게 욕하였는데 두경승이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니 명종왕이 두경승을 더욱 사랑했다.
이의민은 임금에게 미운 털이 달린 존재였다.

“난신들을 모두 베라-”
20대의 젊은 장군 경대승이 일어났다.
1179년(명종 9년)에 장군 경대승이 권신 정중부를 베자 이의민은 당황했다. 이제 무신의 난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모두 죽고 이의민 혼자 남았다. 대궐에서 신하들이 경대승의 거사를 축하하였는데 경대승이,
“임금을 죽인 자가 아직 있는데 어떻게 축하를 받겠습니까”
하니 이의민이 이를 듣고 자신을 가리킨 말로 알고, 두려워 검객과 용사를 집에 모으고 장차 있을 경대승의 칩입에 대비하였다.
이의민은 경대승의 사설경호기구인 도방사람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자신이 사는 마을 거리에 대문을 세우고 밤을 새워 경계하였는데 이를 ‘여문’이라고 했다. 경대승의 도방사람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개경의 사람 사는 방리(方里=방리는 땅을 잴때 사방 일 리가 되는 넓이인데 그 넓이의 거주구역을 지칭)마다 이의민의 여문을 본받아 세웠다. 치안질서가 무너지고 스스로를 지키는 자위의 시대가 되었다.
명종 11년(1181)에 이의민은 형부상서(정3품) 상장군이 되었다. 명종왕은 실권자 경대승이 미워하는 이의민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이것은 차츰 정중부처럼 변해가는 경대승을 이의민이 적절히 견제해주기를 바랜 때문이다.
“두 사람의 군사들이 싸웠다고?”
“혹시 대궐이 다시 피바다가 되지 않을까?”
“경대승과 이의민을 함께 두면 필히 난리가 날 것이다.”
차츰 분위기가 위험스러워졌다. 두 호랑이가 싸워 자칫 개경이 피빛 전장터가 될까 우려되자 명종왕은 이의민을 북쪽으로 보낸다.
이의민이 북계의 행정관인 병마사를 맡아 북쪽국경에 갔다. 병마사는 남쪽의 안렴사와 같은 직위이다. 북계의 병마사에는 병마사(2품) 1명 · 병마지사(3품) 1명 · 병마부사(4품) 2명 등 모두 4명의 병마사가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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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모두 병마사로 불리었고 독립적인 지위였다. 이의민이 이중 어느 병마사였는지는 불확실하나 3품인 병마지사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개경에서 경대승이 같이 쿠데타를 주도했던 허승을 죽였는데 어느 사람이 잘못 전하기를,ꡒ누가 경대승을 죽였다.ꡓ하니 이의민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경대승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아직 실행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누구의 모의인가? 그가 나보다 먼저 손을 썼구나.ꡓ했다. ‘고놈 잘 죽었다’ 식으로 말하니 경대승이 이를 듣고 ‘이놈!’ 하고 마음에 새겼다. 당시 실권은 경대승에게 있었으니 이의민이 실수를 한 것이다. 병마사의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가면 자칫 살육전이 일까 우려한 이의민은 병을 칭탁하여 고향 경주로 돌아간다. 그의 세력기반인 경주로 돌아간 것이다. 차라리 경주에 있는 쪽이 안전한 것이다.
그가 경주로 돌아가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과 함께 뭔가를 도모했는모양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명종왕은 그가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했다고 했다. 명종왕이 그를 개경으로 부르는데 그는 개경으로 돌아가기를 거절했다. 아직 경대승이 설치고 있으니 그가 돌아가기는 위험했다. 차라리 경주에서 군사를 모아 거사를 하는 것이 낫겟다 본 것이다. 이의민이 경주에 머문 것은 현명한 처신이었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그는 개경을 칠 준비를 거의 갖추었다.
그런데 희소식이 날아왔다. 1183년 경대승이 병으로 죽는다. 이의민이 기다리던 기회가 온 것이다. 명종은 경대승이 죽은 그해 12월, 그에게 공부상서 벼슬을 주며 개경으로 올린다. 명종은 이의민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는데 고려사를 보면,『명종왕은 속으로는 두려워하고 꺼리면서도 겉으로는 그에게 감사하고 벼슬을 더하니 모든 신하들이 왕의 유약함을 탄식하였다』고 했다. 이 꺼리는 대상이 이의민이었다.
고려사의 저자는 명종왕을 비판하는데 과연 명종왕은 유약한 왕이었을까? 당시 무신들의 발호와 감시 하에 명종왕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가?
고려사 세가 명종 24년(1194) 윤10월조를 보면 명종의 어려운 입장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유사(有司=신료중 특별한 소임을 맡은 자)가 아뢰기를,
ꡒ좌도병마사 최인은 일찍 김사미의 난을 치러 내려간 이후 한 번도 싸움하려 하지 않고, 어물어물 세월을 끌어 군비를 허비한 것이 적지 않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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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 청컨대 파면하여 죄를 다스리시고, 우도병마사인 상장군 고용지로 좌도병마사를 겸하도록 하소서.ꡓ
라고 하니, 왕이 답하기를,
“적(賊)도 또한 백성이니 어찌 많이 죽이는 것이 옳겠는가? 은혜로써 그들을 감복해 복종하도록 함이 옳다. 최인을 굳이 나무랄 일이 아니다.ꡓ라고 하였으나, 유사가 굳이 청하므로 마지못해 이를 따랐다.
명종은 사태의 실체를 정확히 보고 가능한한 무력보다는 피를 덜 흘리는 귀순과 화합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주장하는 강고한 면이 부족했을 뿐이다.

명종 14년(1184)에 이의민은 수사공 좌복야로 벼슬이 올랐다.
이의민이 받은 수사공과 사복야는 어떤 벼슬인가? 수사공의 사공은 왕의 고문으로 정1품의 명예직이다. 앞의 수(守)는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직위를 받을 때 받는 접두사이다. 이의민의 상장군은 정3품직이니 정1품의 사공을 받아 ‘수’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 반대의 경우는 행(行)을 붙인다.(이를 행수법이라 한다) 좌복야는 상서도성(상서성은 상서도성과 육부로 구성된다)의 상서령 다음의 정2품 벼슬이다. 정3품의 상장군에 비해 높은 벼슬로 중서문하성의 평장사와 동급 2품이지만 실제 하는 일은 별로 없으며 명예직에 가깝다. 좌복야를 받은 점에서 이의민은 경대승이 죽은 이후에 별 중임을 받지 못하고 실권의 변두리에 있었다. 왕은 패악한 그에게 실권직이나 최고위직을 줄 생각은 없었다.
경대승이 죽은 지 한참 뒤인 1190년에야 비로소 실권이 있는 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의 벼슬을 받아 9명의 재신중 한 명이 되었다.
고려사 열전에는 명종 12년(1182)에 중서문하 평장사 판병부사가 되었다고 하여 8년의 시차를 보이는데 세가의 기록 1190년이 전후관계상 맞다. 이의민은 경대승이 죽은 뒤 늦게 다시 벼슬길에 나왔고 그를 견제하는 명종왕과 그를 미워하는 여러 신료들 때문에 승진이 늦었다. 그는 늦은 벼슬자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억지트집을 부려 주변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경대승은 1183년 7월에 별세했는데 실권자였던 그가 별세하기 전과 후의 벼슬임용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명종 11년(1181) 12월 임용 =경대승 별세전]
한문준 ☞ 보문각 대학사 판예부사(상서성 6부 예부의 수장)로 임명되 었다. 한문준은 당시 문신의 대표격으로 왕과 백성의 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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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높았고 과거를 주관하는 예조에서 지공거(과거책임자) 를 맡아 많은 인물들을 뽑았다.
1185년부터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했고 1190년에 별세했 다.
문극겸 ☞ 수태위(임금의 자문직)로 임용되었다.
최유청 ☞ 한림학사 승지로 임용되었다. 당시 고령으로 본인이 벼슬 그만두기를 원했다. 1184년 별세했다.
최세보 ☞ 지추밀원사(종2품)로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출세를 계속했고 1193년 별세했다.
송청, 한약 ☞ 추밀원 부사(정3품)로 임용되었다.
송청은 상장군으로 이후 등장할 최충헌의 장인이다. 성정이 곧아 일찌기 신숙과 함께 사흘간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하 여 국정의 잘못을 바로 잡기도 했다.
정황재 ☞ 병부상서(정3품)로 임용되었다. 일찌기 남적을 친 공로가 있 었다.
두경승 ☞ 호부상서(정3품)로 임용되었다.
조원정 ☞ 공부상서(정3품)로 임용되었다.
문장필 ☞ 추밀원지주사(정3품) 좌산기상시(정3품)로 임용되었다. 섭대 장군(대장군과 장군의 사이의 직) 출신으로 지병마사(3품) 와 승선(정3품)을 역임했다. 일찌기 의종때에 유자량이 끌 어 문인들과 교유했는데, 그의 덕으로 무신의 난때 문신들 이 많이 살아 남았다.
참지정사(종2품)와 상장군을 역임했는데 벼슬에 연연하는 뜻이 없었다. 왕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우승선에 재직할 때 문극겸을 구명하기 위해 권신 송유인을 만나 설득했고, 설득이 실패하자 지탄 받아 경대승이 난을 일으켰다. 그 후 탐욕한 조원정을 그가 탄핵하자 조원정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광식 ☞ 전중감에 임용되었다. 1176년 대장군으로서 서경적(조위총 의 반란군)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독고효 ☞ 추밀원 우승선(정3품)으로 임용되었다. 1184년 추밀원 부사 (정3품)가 되었다.
이지명 ☞ 우산기상시(정3품)로 임용되었다. 1191년 정당문학(종2품) -29-
의 자리에 있을 때 죽었다. 문신 출신으로 문명이 드높아 지공거(과거책임자)로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뽑았다. 그가 뽑은 대표적 인재가 이규보이다.
무신의 난 때 그가 갇히자 목민관으로 선정을 펼쳤던 충주 사람들이 그를 위해 구명운동을 펼쳤다. 왕명을 받아 외교 사절로 거란에 왕래했다.
신보지 ☞ 어사중승(어사대의 종4품직)에 임용되었다. 장군 출신이다. 1194년 수사공 좌복야(상서도성의 종2품 명예직에 가까움) 에 올랐고 1198년 죽었다.

[명종 13년(1183) 12월 임용 = 경대승 별세후]
이광정 ☞ 수태보 판이부사에 임용되었다. (※태보는 왕의 고문기구인 태사 · 태보 · 태부 · 대위 · 사도 · 사공 중 한 직위. 판이 부사는 상서성 6부의 수장이었다. 판이부사는 관리의 임면에 관여하는 주요보직이다.)
항오(졸병)출신으로 무신의 난 이후에 크게 출세했다. 꾀를 써서 전임판이부사인 민영모를 물러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해 세상의 지탄을 받았다. 1194년 별세.
한문준 ☞ 판병부사(6부중 병부의 수장으로 판이부사에 이은 두번째 직위)로 입용되었다.
문극겸 ☞ 중서시랑평장사(정2품) 판호부사(6부중 호부의 수장으로 판 병부사에 이은 세번째 직위)로 임용되었다.
중서시랑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중요재신이니 문극겸에 대 한 임금의 각별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장필 ☞ 동지추밀원사(종2품) 어사대부로 임용되었다.
어사대부는 백관을 규찰하는 요직이니 명종왕의 각별한 신 임을 받고 있다.
두경승․염신약․조원정 ☞ 추밀원부사(정3품)로 임용되었다.
염신약은 문신 출신으로 문명이 높았고 과거담당인 지공거 를 맡아 인재를 많이 뽑았는데 1192년 별세.
이의민 ☞ 공부상서(정3품)로 임용되었다.
이상의 임용과정을 보면 새롭게 등장한 이가 이광정과 이의민이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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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은 이광정과 이의민을 싫어해 그들의 등용을 막았는데 그가 죽자 이광정과 이의민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후 조정에는 무신들이 많아져 무신들 특유의 고함소리와 난투극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날 중서성에서 이의민이 두경승과 힘자랑을 하여 서까래가 움직이고 주먹이 벽을 뚫는 일이 일어났다.
문신들이 혀를 끌끌 찼다.
이의민이 두경승과 함께 관청에 앉아 일을 의론하다가 이의민이 주먹으로 기둥을 치며 말하기를,ꡒ네가 무슨 공이 있어 벼슬이 내 위에 있느냐.ꡓ하며 탄식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말하기를,ꡒ대궐에는 이(李=이의민)와 두(杜=두경승)요, 밀원(추밀원)에 손석(경대승의 친척으로 나중 참지정사와 평장사를 지냄. 1196년 최충헌 형제가 난을 일으키자 아들인 장군 손홍윤과 함께 진압을 시도하다가 죽임을 당함)과 김영존(무신 출신으로 평장사를 지냄. 나중 최충헌의 난 때에 아들 김준거와 김준영이 최충헌을 죽이려 하다가 실패하자 여주에 유배됨)이라!“
하였고 혹자는 시를 지어 무신들을 조롱하였는데, 그 시가
ꡒ나는 이(李=이의민)와 두(杜=두경승)를 두려워하는데 위풍이 당당하여 진짜 재상같아라. 그런데 황각(대궐의 정청)의 3~4년 동안에 주먹바람만이 만고에 제일이더라ꡓ(吾畏李與杜 屹然眞宰輔 黃閣三四年 拳風一萬古)였다. 앞의 양 귀에서는 이의민과 두경승의 외모를 칭찬하는데 뒤의 두 귀에서는 이들의 거친 면을 비꼬고 있다.
그래도 1183년 경대승이 죽고 1196년 최충헌이 난을 일으키기까지 그 사이 13년 기간이 명종 치세의 절정기라 할만 하다. 조정의 권신들은 상호견제 속에 균형을 이루어 정국의 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두경승이란 어진 신하가 있어 이의민의 발호를 막았는데 이는 명종왕이 무신간 인사 및 문무간 인사를 교묘하게 해 균형이 이루어지게 했다.

명종 21년(1191) 12월에 난 조정의 인사를 보면 두경승이 판이부사(상서성 육부중 이부의 장관․후일의 이조판서․판이부사는 6부중 선임장관) 수국사(종2품의 실록편찬관)가 되고, 이의민이 판병부사(상서성 육부 병부의 장관․후일의 병조판서)가 되었다. 두 사람이 실권자가 되었는데 아직도 이의민은 두경승을 추월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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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다른 사람들의 인사를 보면 이혁유가 중서시랑평장사(서열 4위 재신), 권절평이 참지정사(서열 7위 재신)․판호부사(상서성 호부의 장관․후일의 호조판서)가 된다. 조영인으로 참지정사 정당문학(서열8위 재신) 한림학사 승지를 삼고, 유승으로 수사공 좌복야(상서성 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로 재상반열에는 못 들어가는 명예직 성격)를 삼고, 김영존으로 지추밀원사(왕의 비서기구인 추밀원의 서열 4위의 종2품직)로 삼고, 김순으로 동지추밀원사(왕의 비서기구인 추밀원의 서열 5위로 종2품)를 삼고, 손석(경대승의 족형)과 왕도로 모두 추밀원 부사(왕의 비서기구인 추밀원의 정3품)를 삼았다.
이상의 인물들 중에 이혁유는 인주(인천)이씨로 문종때의 권신인 이자연의 증손이다. 이자연은 세 딸이 문종의 비인 인예태후․인경현비․인절현비가 되므로 장악하였다.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지만 인주이씨는 그 명가의 맥을 이어갔고 이혁유가 명종때에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이혁유는 문벌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부귀로서 사람에게 교만하지 아니하여 귀감이 되었고 사람들이 중히 여겼으므로 정중부의 난에도 아무 해를 입지 않았다. 명종 21년 12월의 인사에서 고위직에 오르듯 그동안 그는 조정의 신료사회에서 거친 이의민을 잘 다루고 견제해 화합을 이루었으나 이듬해 2월 갑자기 사망하면서 조정의 균형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손석과 함께 추밀원 부사로 임명된 왕도도 조정의 높은 신망을 받는 이였다.
권절평∙김영존∙손석은 나중 최충헌의 난이 일어나자 저항하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 세 사람은 무장인 아들들과 함께 최충헌에게 저항하다가 피살된다.

이의민은 1192년에 조정의 실권자가 된다. 왕이 이의민을 공신으로 책봉하면서부터 그의 시대가 열리는데, 그가 공신이 되는 날 양부(兩府= 재부와 추부)의 여러 문무 신하들이 모두 그 집에 가서 축하하였다. 그는 수년 전 두경승의 축하자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여 광대같다고 하여 잔치판을 깨뜨렸는데 그날은 어떻게 놀았는지가 궁금하다.
이후 이의민이 전주, 즉 인사를 맡았는데 마음대로 하여 정사가 뇌물과 재화로써 이루어지고 파당과 지당이 생겨나 조신들은 누구도 감히 이의민에 대해 어찌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의민의 무리가 민가를 점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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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저택을 일으키며 남의 논밭을 빼앗으니 사람들이 원한을 갖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의 무덤을 파가고 있었던 것이니 그에게 집권의 자리는 죽음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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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개경에는 최세보라는 자가 있었다.
원래 출신이 별볼 일 없는 인물로 글을 알지 못하였다. 의종 때에 금군(왕을 지키는 군사)으로서 대정(소위급 벼슬)이 되었는데 의종 21년(1167) 정월 밤 일어난 ‘유시의 변’(김돈중의 말이 놀라 화살통에 부딪혀 화살이 의종의 어가에 떨어진 사건)에 그가 왕의 측근에 있었으므로 그를 의심하여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복직되었다. 그는 일자무식군이었지만 사관직인 동수국사(종2품으로 사관 서열 2위∙서열 1위인 감수국사를 시중이 겸직했으므로 대표사관) 직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장군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사관이 되자 문극겸이 기입한 사실 그대로의 정사를 뜯어고쳐 무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쓰는 등 역사왜곡을 하여 지탄 대상이 되었다. 그는 명종 23년(1193)에 죽었는데 죽은 뒤 그의 아들 최비가 동궁지유(동궁은 태자의 거처 · 지유는 영관급에 대한 총칭으로 별장 낭장 중랑장이 세분된 영관급 계급이라면 지유는 이들을 총체적으로 지칭)로서 동궁을 경비하다 태자가 사랑하는 폐비(嬖婢)와 스캔들이 생겼다. 폐비가 궁원내에서 귤을 던져 잘 생긴 최비를 유인하여 간통하였다. 이 일이 누설되어 왕이 법으로 처리코자 하였으나 이의민이 생전의 최세보와 친했으므로 말려 처벌을 못하게 했다. 이의민은 특정 사안에 대해 간섭하여 왕을 난처하게 하는 등 규범의식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도성에 물난리가 잦으니 대책이 없을까?”
어느 날 명종왕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둑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그 역사를 한단 말인가?”
“저가 하겠습니다.”
왕이 보니 이의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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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달부터 이의민이 낙타교에서 저교에 이르도록 둑길을 쌓기 시작했다. 실권자이자 독재자인 이의민이 호령하며 축조를 독려하니 공사진척은 놀랍도록 빨리 이루어졌다. 토목공사는 약 석 달후에 완료되었다.
둑은 높이가 수 척이고 둑에 버들을 심으니 개경에 새로운 풍치가 생겼다. 홍수도 막고 새 길도 생기고 버드나무 경치가 아름다우니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개경 사람들이 이의민을 가리켜 ‘신도재상’(新道宰相=새길을 만든 재상)이라고 칭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개경부를 보면 낙타교가 나온다. 신도가 시작되는 낙타교는 보정문(일명 장패문) 안에 있고 옛이름이 ‘만부교’라고 했다. 고려 태조 왕건때 거란족이 낙타 50필을 가져 왔는데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켜 이웃이 될 수 없다 하여 왕건이 거란 사신들을 먼섬으로 귀양을 보내고 낙타는 다리 아래 매어 굶겨죽여 낙타교라 하게 되었다.
신도가 끝나는 저교는 동국여지승람에 저우교로 나오는데 남대문 밖에
있으며 그 아래 흐르는 물을 흑천이라고 했다. 흑천은 자남산과 덕암봉에서 흘러온다. 신도를 따라 흐르는 개천(낙타교에서 저교까지)은 사천(임진강)의 상류로 당시에는 ‘앵계’라고 불렀다. 중국의 유명한 명승지 앵무주의 이름을 딴 앵계는 이름 그대로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다. 고려의 대표적 문인 중 하나인 이규보는 시를 지어 ’앵계에서 집자리를 정하니 바라 보이는 곡령이 난간이 되는구나‘ 읆었다.
앵계의 길이는 약 3킬로미터 정도였다. 개경 도성 내의 주요하천은 대천∙앵계∙흑천∙웅천 등이 있는데 이 하천들은 임진강 하류로 흘러든다.
개경의 지세를 보면 중앙의 자남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덕암봉, 서쪽에 오공산, 남쪽에 용수산, 북쪽에 송악산등 여러 산들이 있어 빗물이 개경 남대문 앞을 흐르는 대천으로 모여 홍수가 자주 일곤 했다. 고려의 저자인 시전과 마을들이 저지대인 남대문에서 서소문에 이르는 냇가에 모여 있어 자칫 침수가 잦았다.
이런 시가의 홍수 피해를 토목공사로 극복한 이의민이었다. ‘신도재상’이라는 호칭에는 악의보다 선의의 칭찬이 담겨 있다. 비록 실정으로 비명에 간 역신이었지만 한가지 좋은 업적은 이루었으니 고려시대에도 ‘개발독재’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듯 권세는 영원한 것이 아니니 이의민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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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에 따른 죽음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권세가 넘치는데 자족하지 못하므로 앞의 여러 무인들과 같은 길을 걷는다.
당시 떠도는 세상의 참언에ꡐ용손(龍孫)이 12대로서 끝나고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된다.‘가 있었다. 십팔자(十八子)는 이자(李字)이다. 이성계가 왕이 될 때도 유사한 참언이 세상에 떠돌았다.
용손은 고려의 왕이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서해의 용녀와 결혼했기 때문에 고려왕은 용손으로 불리고 있었다. 개경 만월대의 동북 광명사 절에 개성대정이라는 큰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을 왕건의 조모 용녀가 판 것으로 전해 온다. 용녀는 이 우물을 통해 서해의 친정인 용궁에 내왕했다고 한다. 개성대정의 제사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이의민이 왕이 되려 한 것은 신라 부흥과 연관된다. 그가 경주 출신이라서 신라을 부흥시킬 뜻을 지니고 남적 김사미, 효심 등과 내통했다. 이의민은 일찌기 붉은 무지개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꿈꾸고 이를 게시로 믿었다. 떠도는 ‘십팔자’ 참언에 따라 왕이 될 뜻을 품어 욕심을 억제하고 명사를 거두었다. 남적 김사미와 효심과 은밀히 내통하였는데 남적들이 이의민에게 거만의 재물을 주었다.
김사미와 효심의 난은 1193년(명종23)에 김사미가 경북 청도에서, 효심이 울산에서 일으킨 난이다. 관군이 내려가 이들과 싸워 이듬해 2월 김사미가, 12월에는 효심이 체포되어 처형되므로 반란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그 잔당들은 계속 남아 영남과 영동지역에서 활약했다.
이 두 반란의 진압과정에서 이의민이 내통했음이 드러났는데 이의민은 아들을 통해서 접촉했다.
이의민에게는 모두 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이름이 이지순∙이지영∙이지광인 이들은 아버지의 휘광을 받아 영달을 누렸다. 욕심 많은 맏아들 이지순은 남적인 김사미와 효심 집단이 재물 많음을 듣고 끌어 들이고저 하여 옷과 양식, 신발, 버선 등을 보내니 남적들 역시 금은보화를 그에게 보낸다. 이로 말미암아 토벌군의 동정과 비밀이 누설되어 여러 차례 싸워도 패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토벌대장은 대장군 전존걸이었고 그 휘하에 이의민의 맏아들인 장군 이지순 외에 장군 이공정∙김척후∙김경부∙노식 등이 있었다. 이지순이 장군으로 전존걸의 휘하이지만 아비의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했고 전존걸은 권력자의 아들인 이지순을 처벌할 수가 없었다. 그는 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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