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5-29 20:59
밖에서 본 이의민, 2
 글쓴이 : 현웅 (119.♡.97.4)
조회 : 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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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 효심에게 패전한 후 자살했는데 죽음에 임해 탄식하기를,
ꡒ만약 내가 법으로 이지순을 다스리면 그 아비가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다. 이지순으로 인해 적이 성하니 죄가 장차 누구에게 돌아가리요.ꡓ말했다. 처절한 유언이었다.
그가 죽은 곳은 기양현인데 기양현은 오늘의 경북 예천이다. 전존걸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개경으로 호송되는 길에 예천에서 자살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기양현은 본래 신라의 수주현으로 경덕왕이 고쳐 예천군이라 했고 고려 초에 이름을 보주라고도 하였고 현종 9년에 안동부에 속하게 되었다. 명종 2년에 태자의 태를 묻고 현령을 두었는데 신종 7년(1204)에 남도초토병마사 최광의가 동경적과 이 기양현에서 싸워 크게 이겨 현령을 지보주사로 격을 올렸다. 고려때는 개경에서 경주로 가는 길이 충청도에서 죽령을 넘어 예천, 안동을 거쳐 있었으니 예천이 교통의 요지였다. 동경적이 예천에 나타났음은 죽령을 넘어 충청도까지 진출하려 한 의도가 확인된다.

김사미와 효심의 난은 당시 고려의 지방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난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난에는 선량한 고려장군들의 고민과 탐욕한 집권자의 면면이 진압과정에 나타나 있다.
김사미가 반란을 일으킨 운문은 운문사가 있는 지금의 경북 청도지역이다. 효심의 발원지 초전은 울산으로 본다.
이지순의 내통에 의해 토벌대장 전존걸이 패하고 자살하자 조정에서는 상장군 최인을 남로착적병마사, 대장군 고용지를 도지병마사로 삼아 난을 평정하고 김사미 ․효심을 처형하는데 잔당들은 끈질긴 저항을 했고 1199년(신종 2년)에 명주(강릉)의 반란군들이 김사미의 잔당과 합세하기도 했다.
경주를 포함 남쪽지역에서 일어난 남적반란의 시초는 1190년(명종20) 1월 동경적의 반란이다. 이 난을 일으킨 주모자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안찰부사(按察副使=고려의 지방장관으로 일명 안렴사인 안찰사를 보좌하는 직위․지역이 넓은 충청, 전라, 경상 3도에만 둠) 주유저가 반란군을 진압하려다가 실패하고 살상자가 많이 나는 등 피해가 컸다.
3년 뒤 7월 김사미와 효심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반란수괴 김사미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사찰의 승려 출신이 유력하다. 효심도 그 이름에 나타나듯 효성이 있는 인물로 보편적 고려백성의 지지와 신망을 받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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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었다.
음력 7월이면 초가을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큰도적 김사미는 운문에 웅거하고, (작은 도적) 효심은 초전에 웅거하여 망명한 무리를 불러모아 주현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했다. 망명한 무리라 함은 죄를 지어 망명한 무리라기 보다는 권문세가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떠도는 유랑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명종왕이 보낸 대장군 전존걸과 이의민의 아들 장군 이지순․이공정․김척후․김경부․노식 등은 접전하다가 8월에 이공정․김경부 등이 모두 패배한다. 이 패배의 원인이 전술한 바와 같이 이지순이 반란군 김사미․효심과 내통해 군정을 알려준 때문이었고 군사를 잃은 전존걸은 자살한다.
조정은 진상을 알았지만 세력가 이의민의 아들을 처벌할 수가 없었고 진압군을 새로이 구성한다. 11월에 새롭게 짜여진 진압군은 대장에 상장군(정3품 군단장급․요즘 벼슬로 중장) 최인으로 그를 남로착적병마사를 삼고, 대장군(종3품 사단장급․요즘 벼슬로 소장) 고용지로 도지병마사(지병마사는 병마사의 다음 벼슬)를 삼고, 장군 김존인․사량주․박공습․백부공․진광경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2차 진압군은 김사미와 효심을 강하게 압박했고 그 결과가 다음 달인 12월에 나타났다. 남적의 수괴급인 득보가 대궐문에 나타나 자수를 청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용서해 병마사 최 인을 따라다니면서 남적토벌에 협력토록 했다.
1193년 겨울과 1194년(명종24년) 초에 걸쳐 격전이 계속되었는데 2월초에 남적 수괴인 김사미가 최인의 야전사령부인 병마사의 군영을 찾아와 항복을 청했다. 고려의 장수들은 그를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 의론이 분분했으나 지난 싸움때 고려 장졸이 많이 희생된 것을 감안하면 살려둘 수 없었다. 그를 베고 잔적 토벌을 서둘렀는데 이것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김사미의 죽음을 안 남적 잔류군들은 항복을 거부했다. 남적은 다시 효심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관군에 저항했고 그 피해도 나타났다.
“김장군의 원수를 갚자.”
“당할 수만은 없다. 관군들에게 우리 남쪽 사람들의 진면목을 보여주자!”
김사미가 죽은 지 열흘 뒤에 김사미의 잔적과 효심의 연합군들이 운문의 병마사 행영을 기습했다. 전혀 예상 밖의 기습이었다. 그들이 본진을 급습할 줄은 아무도 예상 못했다.
“고려병들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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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와-
“물러서지 마라-”
장군 사량주가 수비군사들을 이끌어 막으려 했지만 남적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윽-
장군 사량주가 그들을 막다가 일제히 달려든 남적의 창에 찔려 죽었다. 그 때 병마사 최 인은 영동지역인 강릉도에 있었는데 그것은 효심이 이 지역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릉에서 펼쳐진 관군과 효심의 대결도 치열의 도를 더했다. 병마사 최인이 정예한 졸병 수천을 거느리고 남적의 목적지인 강릉성에 먼저 이르렀다. 다행히 아직 효심의 군사는 도착하지 않았다. 강릉성 주변에 복병을 배치하고 한 여인을 달래어 남적이 오는 길에 서있게 했다.
마침내 남적이 이르러 그 여인을 붙들고 묻기를,ꡒ관군과 병마사가 어디 있느냐.ꡓ라고 물으니 여인이 말하기를,
ꡒ성중(城中)에 있다.ꡓ라고 최인이 시킨대로 답하니 남적들이 방심하였다. 성 밖에 진을 치는데 관군이 갑자기 사방에서 나타났다.
복병이었다. 기습을 당한 남적은 대오가 무너지고 급히 물러나는데 최인은 기병을 발하여 공격하고 추격하여 1백5십 급의 남적을 베었다.
이 패전으로 효심의 남적들은 북방으로 진출할뜻을 굽혔다.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 운문산에 은거했다. 관군들은 그들의 뒤를 쫓아 남쪽으로 내려 왔는데 그들이 운문의 본영에 도착하니 본영은 남적의 기습으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이 남적들을 기필코 토멸하리라.”
고려의 장수들은 복수의 염을 새겼다.
봄이 짙어지는 음력 4월이 되자 운문산은 녹음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운문산은 지금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밀양과 울산, 양산 경계의 고산지역이다. 이곳은 해발 1,100미터급 고봉들이 십 수개 연이어 있는 곳으로 산이 깊고 계곡이 깊어 은거하기에 좋다. 지금도 가지산과 영취산, 고헌산, 운문산 등이 등산지로 유명하다.
한동안 남적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어디서도 그들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효심의 무리에는 남정네뿐 아니라 여인들과 아이들, 노인들등 가족들도 함께 동행하여 움직였다. 이런 무리 구성은 그들이 유랑민임을 알린다. 1만명 가까운 그들 무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찾았습니다. 병마사 나리”
장군 김존인과 진광경이 그들을 찾아냈다. 색적에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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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촌에서 행색이 수상한 자들을 붙들어 문초하니 그 자들이 남적의 앞잡이였습니다.”
“어디에 있다고 하던가?"
“석남재를 넘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거지벌(언양)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다가 양식이 떨어져 미리벌(밀양)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오고 있습니다. ”
병마사 최 인은 신속히 군사를 배치했다.
1만명 가까운 효심의 무리와의 대접전은 4월 중순에 저전촌 근처에서 펼쳐졌다. 효심은 관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딸린 부녀자와 아이들로 인해 효율적인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고려 기병들이 일제히 돌입하자 남적들은 화살을 쏘고 창을 세웠다. 기병들이 남적의 진영에 돌입하자 곧 전장은 아비규환이 된다.
죽여라!- 막아라!-
비명과 함께 저전촌 앞의 들판은 아비지옥이 된다.
싸움은 한나절 계속되었고 전투가 끝났을 때 들판과 계곡에는 죽음의 정적만 드리웠다. 효심이 거느린 장정 외에 부녀자와 아이들이 모두 죽었다. 전장을 살피는 병마사 최인도 이 끔찍한 살육전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엇다.
고려사에 따르면, 남로병마사 최인등 여러 장수가 남적을 밀성(밀양) 저전촌(楮田村)에서 몰아쳐 7천여급을 참획하고 얻은 각종공구와 기계, 소와 말의 수도 그와 비등하였다 했다.
이 대승으로 효심의 무리가 크게 위축되었는데 7천여명의 전사자 수는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전국 인구가 400만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니 오늘로 치면 10만명 가까운 숫자가 죽은 것이다.
주검이 산야를 뒤엎고 처참함은 극에 달했다.
전장 밀양 저전촌은 어디인가?
밀양읍지를 보면, 밀양 용전에 저전촌이 있다고 했다. 오늘의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저전마을이다. 용전리의 용암과 오치마을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부터 이 마을에 닥나무(楮)가 많아서 저전촌이다.
요즘 찾아본 마을의 사람들은 임진왜란때 피난 들어와 마을이 생겼다고 하고 청주양씨와 안동권씨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청주양씨들은 가선대부 양진원과 오위장(조선시대 임금을 호위하는 기관인 오위의 정3품 무관) 양수근이 입향조라고 하는데 안동권씨는 조선 순조 임진년에 입촌하였다고 한다. 밀양읍지 등 일부기록에 저전촌이 고려 명종때 초적의 괴수 효심의 마지막 항전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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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에서 발원한 밀양 산내천이 감돌아 흐르는 저전촌은 밀양읍에서 울산시 언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산내천을 건너는 곳이다. 당시 효심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석남재(밀양과 언양을 잇는 재로 해발 1,240미터의 가지산을 넘어감)에서 밀양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뒤를 대장군 고용지의 관군이 추격했고 최인과 다른 장군들이 저전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효심의 부대는 식솔을 거느린 대부대여서 이곳 저전촌에서 겨우 산내천을 건넜다. 당시 4월(양력으로 5~6월)의 장마로 불어난 개천을 추격군에게 쫓기며 겨우 건너자 막다른 저전촌에서 관군 대부대를 만나 당한 것이다.
김사미와 효심의 근거인 운문산 일원에는 가지산의 연봉이거나와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이 산지에는 사람들이 숨어산 흔적이 많다.
운문산 일원은 신라 진평왕때 수나라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원광법사가 머문 곳이다. 삼국유사 제5권 의해편의 원광서학을 보면 사량부 선비 귀산과 추항이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도를 묻자.”고 하여 찾아간 곳이 원광법사가 머문 가슬갑사이다. 가슬갑사는 지금의 청도 운문사인데 옛날 청도에서 언양으로 넘어가는 고개 운문재를 가슬재라고 했다. 갑은 우리 말로 곶인데 가슬갑사를 곶절이라고 했으니 일치하는 것이다. 원광법사는 선비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5계를 전해주어 이것이 화랑도의 정신이 되니 화랑의 발상지중 하나가 운문산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운문산은 신령한 영감을 주는 산으로 이 산에서 발원한 김사미와 효심의 활동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운문산 연봉인 천황산의 사자평과 같은 곳에는 고려 도요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이 도요지는 일본 이도다완의 원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남재(언양과 밀양 사이)에는 오랜 옛날 누군가가 축성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축성에 대한 기록이 없고 높은 고개 정상 일원에 남아 있는 점에서 김사미나 효심 무리가 축성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운문산이 있는 영남알프스는 6.25때 공비들의 준동처로 악명 높아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발진한 미군 쌕쌕이 제트비행기가 빨치산 근거지를 폭격하기도 했다.
김사미와 효심은 민중항쟁의 선구자요, 유랑민의 아버지였다. 변란과 반역의 시대에 신분해방과 평등을 바라던 그들이었다. 병마사 최인과 고용지가 참획한 7천여급에는 어른과 아녀자를 포함한 숫자일 것이니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저전곡을 메웠을 것이다.
저전촌앞을 흐르는 오늘의 산내천은 그 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흘러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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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효심이 발원한 초전을 지금의 경북 성주군 초전면으로 보는데 이름이 동일하여 그렇게 본다. 성주군 초전면은 금오산 줄기인 부상고개에서 흘러내린 낙동강 지류 백천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있고 성주읍과 김천을 잇는 교통요지여서 인물이 웅거할 만 하나 저전촌이 밀양임에 비추어 볼 때 밀양에 연접한 울산이 초전이다. 울산에 초전이란 지명은 없으나 태화강 주변에 펼쳐진 넓은 들이 초전으로 불릴만 하다.)

“효심 대장. 몸을 피하여야겠습니다.”
“저렇게 우리 무리들이 당하는데 나만 어찌 몸을 빼겠는가!”
다시 그 저전촌의 싸움현장에서, 부하들이 효심에게 몸을 피할 것을 권한다.
“후일을 도모하여야겠습니다. 관군들이 저만치 올라 오고 있습니다.”

효심은 저전촌에서 살해되거나 잡히지 않았다. 그는 관군의 포위망을 탈출해 저전촌 뒷산인 오치고개를 넘어 청도쪽으로 달아났다. 그 곳에서 김사미의 잔적들과 함께 무리의 재건을 추진하며 암약한다.
효심의 마지막 저항은 계속되었다. 우도병마사 고용지가 운문 고을 인근에서 남적을 쳐서 40명을 사로잡아 베었다.
남적들도 끈질기게 관군을 기습했다. 고용지의 군사는 3일간 연이어 싸워 남적을 패배시켰다. 고용지도 악전교투였다. 주력이 사라진 효심이지만 3일이나 연속 관군과 접전하며 그의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게릴라전을 펼친 남적이었다.
그 해(1194) 8월, 남도에도 가을빛은 짙어졌다. 들에는 아직 추수하지 못한 곡식이 고개를 숙였는데 고용지가 이끄는 관군은 수색을 계속했다.
“임금님을 만나게 해주시오.”
갑자기 개경의 대궐밖이 시끄러워졌다. 남루한 행색의 무리 몇 명이 명종왕을 알현하기를 청했다.
병부에서 그들을 잡아 문초하였다.
“저희들은 효심의 무리입니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찾아 왔느냐?”
“항복하러 왔습니다.”
남적의 괴수 효심이 그 일당 이순 등 4인을 보내어 대궐문에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항복할테니 선처를 호소하는 것이다.
조정은 분분히 의논했는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너희들의 딱한 사정도 알겠구나. 죽이지 않을테니 가서 모두가 항복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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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하여라.”
명종왕은 이순 등에게 대정(종9품 무관 · 소위급의 벼슬) 벼슬을 주고 포백(옷감)을 주어 남쪽으로 돌려 보냈다. 그들이 효심을 달래어 항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항복은 쉽지 않았다. 전략상 토벌군의 예봉을 일시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함인지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많은 동지와 가족이 죽었으니 항복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투는 계속됐다.
초겨울인 그 해(명종 24년=1194년) 10월에 병마사 최인이 남적의 처와 아이들 3백 5십여 인을 잡아 개경에 보내자 조정은 그들을 서해도(지금의 황해도)에 분배하여 여러 성의 노비로 나누어 주었다. 전장은 여인들과 아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것이다.
조정의 정책은 강경한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남자는 모두 죽이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개경으로 보내도록 하라!”
그들은 잡혀오고 또 처형되고 노비로 팔리고 이런 반복과정을 보는 고려 장수들도 심사도 편치 않았다. 삶의 근거인 논밭과 집을 잃고 유랑민으로 떠돌며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그들에 대한 동정도 일었다.
일부 양식있는 장수들은 그들이 스스로 산을 내려오기를 바랬다.
그들은 거란이나 여진도 아닌 같은 민족이 아닌가?
고려사 세가 명종 24년(1194) 윤10월 조를 보면 왕에게 올리는 상소가 있다. 유사(有司=간관들중 상소를 맡은 대표)가 아뢰기를,
ꡒ좌도병마사 최인은 남적을 만나면 스스로 후퇴하고 싸움도 하려 하지 않고 어물어물 세월을 끌어 관비만 허비하고 있으니 청컨대 파면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그리고 우도병마사 상장군 고용지로 좌도병마사를 겸하도록 하소서.ꡓ아뢰었다.
그러나 명종왕이 유사에게 이르기를,
“남적도 나의 백성이다. 어찌 많이 죽이는 것이 옳은가? 은혜로써 복종하도록 함이 옳다. 최인이 하는 것을 너무 나무랄 일이 아니다.ꡓ라고 하였다.
어찌 명종왕을 나약하다고만 할 것인가? 목민의 군주로서 그 도리를 알고 있는 군주이다. 역사이래 어느 왕이 반란적을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엿는가.
그러나 간관들이 고용지를 편드는 반복상소를 올리자 명종왕은 마지못해 ”그리 하라.“ 답했다. 간관들이 임금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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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군 최인은 일찌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뛰어난 무인이었다. 인덕 있는 덕장으로서 사려 깊은 장수였다. 그의 라이벌인 고용지는 우수하긴 해도 그랬지 못했다. 고용지는 야전군 출신으로 조위총의 반란 진압때 두각을 드러낸 장수이다. 최인이 개경세족 출신임에 비하여 고용지는 서북지역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
고용지는 연주(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의 군사령관인 연주도령(‘도령’은 영관급 정도의 벼슬로 호족적인 성격이 강함) 현덕수의 산하장수로 연주를 수호한 일등공신이었다. 조위총의 서경반란군들이 북계의 성들중 끝내 개경편으로 남은 연주를 여러 번 공격했는데 그 때마다 현덕수와 고용지가 이들을 막아냈다. 마지막에는 서경병들이 삼중으로 연주 포위망을 짜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펼쳤다. 악전고투하며 성을 지키다가 서경병이 헛점을 보이자 고용지와 이당취가 성을 달려나가 급히 적을 쳐서서경적이 무너졌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책이라고 하였듯 병법을 알고 싸운 고용지였다.
고용지 등의 이런 각고의 노력이 알려져 금나라 군사들이 달려와 외론 연주성을 돕기도 했다.
조위총이 죽은 뒤 잔당들이 세를 올릴 때 고용지는 낭장(중령 정도의 계급)으로 북로처치사 이경백의 막료였다. 그가 영청(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던 서북병마사 두경승을 맞이하기 위해 가던 중 열배 가까운 적의 대기습을 만난다. 그는 뛰어난 무용으로 적의 포위를 깨고 살아 돌아와 화제가 되었다. 고용지는 죽음 문턱에서 살아온 장수로 삼국지의 조자룡에 견줄만한 장수이다.
그에 비하면 최인은 인덕을 지닌 점에서 삼국지의 관운장이라고나 할까. 최인과 고용지는 비교가 되는 면이 많았다.

최인이 물러난 지 두달 뒤인 명종 24년(1194) 12월, 남로병마사 고용지가 남적의 괴수 효심을 사로 잡았다. 그가 체포된 곳이 어딘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동안 나라의 큰 걱정거리였던 효심이 체포되었다니 개경에서 환호했다. 효심은 개경으로 압송되어 죽음에 처해지고 진압군의 여러 장수들은 왕에게 나아가 포상되고 벼슬이 더해진다.
12월 내려진 벼슬의 면면을 보면 조영인이 수태위(왕의 고문직) 상주국이 되고, 손석(경대승의 족형)으로 참지정사(종2품 · 재신서열 7위)를 삼고, 신보지로 수사공 좌복야(정2품 · 상서성 상서도성의 두번째 낭신이지만 실권이 없음)를 삼고, 이인성으로 동지추밀원사(왕의 근시기구인 추밀원의 종2품) 어사대부(백관규찰 어사대의 수장)를 삼고, 유공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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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추밀원사를 삼고, 기홍수로 추밀원 부사(추밀원의 정3품)를 삼고, 최인으로 형부상서(상서성의 정3품 장관)를 삼고, 고용지로 공부상서(상서성의 정3품 장관)를 삼고, 문적으로 우산기상시(중서문하성의 정3품의 수석낭관)를 삼았다.
주목할 점은, 최인이 간관의 탄핵으로 병마사 지위가 떨어졌어도 형부상서로 다시 임명되었으니 명종왕의 신임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물론 고용지도 상서로 벼슬이 올랐다. 고려 중앙에는 10명 내외의 상장군이 있었는데 상장군이 문관직인 상서에 임용되는 것은 큰 출세중 하나였다.
명종 24년(1194) 12월의 인사에서 띄는 인물의 면면을 보면 유력직위인 동지추밀원사 어사대부에 임명된 이인성은 2년 뒤 최충헌의 난때에 목숨을 잃는다. 최충헌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조정의 유력한 문신들을 감금하는데 그 때 갇힌 이가 참지정사 이인성, 상장군 강제∙문득여, 좌승선 문적, 우승선 최광유, 대사성 이순우, 대복경 반취정, 기거랑 최형, 낭중 문홍분 등 36인이었다. 어떤 중이 최충헌에게 밀고하기를,
ꡒ도망간 상장군 길인이 왕륜사의 승도들을 거느리고 거사코자 합니다.ꡓ
하니 최충헌이 놀라 가두었던 이인성 등 36명을 죽이고 사람을 보내 왕륜사를 엿보니 무고였다고 했다.
동지추밀원사에 임명된 유공권은 문화유씨의 인물이다. (문화는 지금의 황해도 신천이다) 그는 고려개국공신인 유차달의 6세손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으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의 학식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를 두 번이나 맡아 많은 인재를 뽑았는데 그가 발탁한 대표적 인물이 이규보이다. 그는 1196년 7월 별세했는데 4월에 최충헌이 난을 일으켜 어지러운 개경의 형세를 병석에서 보며 65세로 눈을 감았다. 병이 나자 가족이 약을 올리니 유공권이 말하기를,ꡒ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다. 명을 어겨 억지로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옳은가“ 하면서 마시지 않았다. 생사관이 뚜렷한 유공권이었다. 병이 심해지자 명종왕이 정당문학 참지정사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그는 성품이 청렴하고 공평무사하며 벼슬일에 있어 태만하지 않았다. 개국공신의 후예다운 인물이었다.
문화유씨는 시조가 유차달인데 태조에게 군량미를 제공해 개국공신이 되었고 원래의 성씨 차씨를 도로 찾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문화유씨와 연안차씨는 통혼을 하지 않는다. 이는 두 성씨가 한 뿌리인 때문인데 그 사연은 이렇다. 통일신라 애장왕때 유차달의 6대조인 차건갑이 신라중 -44-
신으로서 애장왕을 모시다가 죽었다. 차건갑은 아들 차승색으로 하여금 이를 계승토록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애장왕의 삼촌인 김언승(헌덕왕)이 반역을 하여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고 저항하던 차승색은 실패하고 황해도로 도망가 류씨로 변성하여 숨어 살았다. 고려가 개국하자 태조 왕건은 유차달로 하여금 류씨성과 함께 원래 성인 차씨도 회복하게 하였다. 또 부산광역시 기장의 옛이름은 차성(車城)인데 이는 차승색의 아버지 차건갑의 묘가 기장읍 만화동에 있는 때문이다.
추밀원 부사로 임용된 기홍수는 경기도 행주 사람이다. 무반 출신이지만 글이 뛰어나 최충헌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명종∙신종․희종까지 3조에 걸쳐 벼슬직에 있었고 나중 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에 올라 관리의 임면을 담당했고 마침내 문하시랑(=문하시중)이 되었다. 최충헌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핍박당한 여러 신하에 비하면 영달을 누린 자였다. 그는 거문고를 뜯으며 서예로 낙을 삼으며 최씨 무인시대에 스스로 안분자족하며 살았다. 난세를 소박하게 사는 지혜를 지닌 자로 나이 62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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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을 잡고 남적을 퇴치한 남로병마사 고용지가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명종왕이 직접 나아가 고용지를 인견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 위로하기를 두텁게 하였다.

고려사의 지(志) 안동부 편을 보면, 명종 27년(1197)에 남적 김삼, 효심 등이 안동주군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니 조정이 장수를 보내어 무찔렀는데 이 싸움에 안동부가 군사를 크게 도운 공이 있어 안동을 주에서 도호부로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효심은 명종 24년(1194년) 12월 체포되어 죽었다. 이 1197년의 효심은 누구인가? 죽은 효심이 다시 살아난 것인가?

김사미와 효심이 죽은 1194년으로부터 5년 뒤인 1199년(신종 2년) 2월에 명주(강릉)와 동경(경주)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난다.
명주의 도적들은 삼척과 울진 두 현을 함락하고 남하해 경주의 도적들과 합세하여 여러 주군을 침략하므로 낭장 오응부와 합문지후(왕의 측근에서 국가의식을 맡던 부서인 합문의 정7품 벼슬) 송공작을 명주로 보내고, 장작소감(관청의 건축등을 맡은 장작감의 종4품) 조통과 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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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를 동경에 보내어 적을 달래어 진압케 하였다.
다음 달인 3월, 송공작이 동경의 적 수괴 김순과 울진의 적 수괴 금초 등을 달래어 데려와 항복하시키니 왕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어 돌려보냈다. 동경적과 명주적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는데 이듬해인 신종 3년(1200) 5월, 경상도 진주에서 민란이 또 일어나 소부감(궁중의 공예품과 보물 등을 맡은 관청인 수부의 종4품 벼슬) 조통과 중랑장(대령급 벼슬) 이당적을 보내어 진주를 안무하게 하였다.
다시 밀양에서 관노들이 난을 일으킨다. 역시 신종 3년 5월, 밀양의 관노 50여 인이 관청의 은그릇을 도적질하여 운문적에 투항하였다. 김사미가 일으킨 운문적은 1194년 2월 김사미가 처형되므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잔당은 1200년까지 운문산 일원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진주에서 운문현인 청도까지 가깝지 않은 길이지만 그들은 청도로 가서 운문적이 되었다.
이런 남적의 끈질긴 존재는 계속 이어져 1200년대 초 경상도에서 대규모로 일어난 패좌와 이비의 난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이의민의 다른 두 아들은 이지순보다 더했다. 아비를 의지하여 횡포하고 방자하였는데 둘째 이지영과 세째 이지광은 그 도가 지나쳐 세인들이 쌍도자(雙刀子=두 칼이라는 뜻)라 하였다.
이지영은 자기 뜻에 거슬린 자가 있으면 죽였고 아름다운 부인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남편이 나간 틈을 엿보아 반드시 위협하여 난행하였고 길에서 아름다운 부인을 만나면 종자를 시켜 안고 가서 더럽혔다. 심지어 왕의 애첩에게까지 손을 댔다.
일찌기 이지영이 견룡(왕실호위군) 박공습과 함께 기녀 화원옥을 두고 다투었다.
“박산원. 화원옥은 내 여자니 손대지 마라!”
“어찌 기생의 주인이 따로 정하여 있단 말이오! 당치 않소.”
“네가 정녕 살고 싶지 있으냐?”
이지영은 칼을 빼어 박공습에게 겨누었다.
“오늘부터 견룡에서 해직이니 그리 알라.”
이지영은 박공습을 궁문에서 쫓아냈다. 박공습도 걸출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남적 진압에 공이 컸다. 1193년 11월 최인∙고용지등과 함께 남적을 쳤는데 1194년 2월 남적괴수 김사미를 자신이 주도해 항복시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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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1196년 4월 최충헌∙최충수 형제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궁성과 개경에 피빛바람이 몰아쳤는데 아무도 감히 최충헌 형제에게 나서지 못했다. 그 때에 장군 박공습은 상장군 길인, 장군 유광과 함께 수창궁에서 무리를 모아 최충헌에게 저항했다. 궁중의 금군과 환관, 노예 등으로 1천여명의 군사를 신속히 편성하고 이들을 이끌어 최충헌 무리와 혈전을 펼쳤다. 한나절 펼쳐진 전투는 일전일퇴를 거듭했는데 결국 패하고 만다. 전세가 기울자 박공습은 자살했다. 강골의 장수다운 죽음이었다.
그가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과 기생을 두고 서로 원수가 되었으므로 이의민을 죽인 최충헌의 편을 들어 싸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에게 영달의 기회가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공습은 강고한 장수답게 최충헌에게 저항했고 그가 죽자 저항세력도 무너진다. 그와 함께 저항한 상장군 길인도 궁밖으로 달아나 자살하니 세상은 최충헌 형제의 것이 되었다. 최충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무인 박공습이었다.

"마마. 저희 못난 자식을 처벌하소서."
"그런 일로 경의 자식을 처벌해서야 되겠는가?"
궁중에서 기생을 가운데 두고 칼싸움을 벌리는 아들 이지영을 보다 못한 아버지 이의민이 왕에게 죄 주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치 않았다.
이의민의 눈치를 보는 왕이었다.
이의민이 기생 화원옥을 밖으로 내치기를 청하매 왕이 내시부 관리 이덕우를 보내어 기생 화원옥을 가둔다.
그러자 이지영이 감옥에 돌입하여 이덕우를 쫓아내고 화원옥을 데려갔다. 제멋대로인 이지영이었다. 왕의 분노도 높아갔다.
‘짐과 제 아비도 무시하는 이 패륜아 같은 놈!’
나중 이지영이 왕의 총애받는 폐희를 협박하여 간음하였어도 죄를 주지 못하니 조야가 더욱 분하게 여겼다.
이지영이 일찌기 삭주 분도장군(分道將軍=장군들의 관할지역이 넓어 지역조정으로 생긴 새로운 사이지역 담당 장군)이 되었는데 관례를 벗어나 제마음대로 하였다. 감창사(고려시대 서북방 양계에 둔 정 6~7품의 관직으로 창고 재물관리및 조세관리)겸 합문지후(정6품직으로 궁정의전실장) 최신윤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삭주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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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윤은 경력이나 배경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고려 관료들중 문극겸과 함께 최고의 신료중 한사람으로 인정받는 최유청의 손자였다. 최유청은 유학과 불경에 밝아 중서문하평장사(재신 서열 5위)를 지냈고 아들 최당도 상서를 지낸 남다른 명가집안이었다. 최신윤은 이런 가풍에 따라 의식과 범절이 반듯한 인물이었다. 이지영이 최신윤을 맞는데 왕명을 먼저 맞이하지도 않고 평복차림으로 공관에서 식사나 하자고 하니 최신윤이 보기에도 도가 지나치다. 아무리 권신의 자제라 하나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
“이장군. 이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요!”
최신윤의 질책에 이지영의 눈이 쌍심지가 되었다.
“이 놈이 날 누군지 몰라?”
부아가 난 이지영이 일어나 손으로 최신윤을 잡았다. 쳐죽이고자 하였다. 두 사람이 잡고 싸우는데 이지영이 힘이 부친 사이에 최신윤이 도망하였다. 이지영은 최신윤이 두고간 의복을 불태우고 분에 못이겨 최신윤의 부하 나장 한 사람을 죽였다.
이지영을 질책한 최신윤의 집안인 최유청의 가계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최유청은 1095에 태어나 1174년에 별세했는데 그는 고려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 태사를 지낸 최준옹의 6세손이었다. 최준옹은 철원최씨(일명 동주최씨)의 시조로 고려시대 내내 철원최씨는 영화를 누렸고 존경받는 가문이었다. 철원최씨가 배출한 최대인물로는 고려말 이성계에 대립한 최영 장군이다.
최신윤의 조부인 최유청은 예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욕심이 없었고 나중 임금의 조서를 꾸미는 문한직인 직한림원이 되었으나, 인종 초에 이자겸의 간계로 파직당하고 이자겸 몰락 후에 다시 관계에 나갔다. 좌사간(도병마사의 후신인 도평의사사의 간쟁 담당 정6품관)․시어사(백관을 규찰하는 어사대의 종5품 서열 6위 관직) 등을 역임하고, 1132년(인종 10) 예부원외랑(상서6부의 종6품)때 사절로서 송나라에 다녀왔고, 1142년 간의대부로서 금나라에 가서 황제의 책명을 받았는데 당시 금나라 사람들이 그의 박식과 명민함에 탄복했다. 이후 벼슬이 중서문하평장사(정2품·재신 서열 6위)로 판병부사(상서 6부의 병부장관)를 겸임했다. 그에게도 환해의 풍파가 있었으니 그의 처남인 낭중(상서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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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5품 관직) 정서(정과정곡의 저자∙동래정씨)가 의종의 동생인 대녕후 경과 친하여 참소를 입는다. 남경유수사(서울시장)로 좌천되고 이어 1157년 충주목사, 광주목사 등으로 좌천되었는데 그는 좌천의 어려운 상황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집무함에 아무런 불평이 없자 의종왕이 그를 평장사직으로 복귀시키려 했지만 일부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최유청은 결국 수사공 좌복야의 비교적 한직으로 벼슬을 그만 두는데 1170년 경인년에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상황이 역전된다. 정중부와 이의방 등 쿠데타 주도 세력은 다른 문신들을 참살한 것과는 달리 최유청과 그의 친척들을 보호한다. 그를 참소하며 영달한 이들이 도리어 참살되니 세상은 새옹지마인 것이다. 명종이 즉위하자 최유청은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고 1172년(명종 2년)에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상서6부의 예부 장관)에 이르러 벼슬길을 물러났고 2년 뒤인 1174년(명종4)년에 80세로 죽었다.
그는 유교의 경전과 역사에 밝고 특히 불경에 밝아 그가 이르는 곳마다 스님과 학생들의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글씨도 잘 썼다. 어려서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공부하는 자세로 평생을 살았는데 저서에 남도집 · 유문사실 · 최문숙공집 · 이한림집주 등이 있다.
최유청은 아들 8형제를 두었고 모두가 훌륭했지만 특히 최선과 최당이 뛰어났다. 모두가 강직하여 최선은 인종의 아들로 출가해서 스님이 된 충희 태자가 궁내에서 음행을 일삼자 이를 꾸짖다가 좌천되었고 나증 최충헌의 집권기에 중용되었다.
최신윤의 아버지 최당도 나중 벼슬이 참지정사(재신 서열 7위)에 이르렀고 은퇴한 후에 유유자적하여 당시 존경받던 8명의 선인(仙人) 중 한사람으로 불렸다. 최신윤은 벼슬이 상서에 그쳤지만 그의 아들은 유명한 최린이다. 최린은 고종때 시박된 몽고침입때 고종의 아들 왕창을 데리고 몽고로 가서 몽고황제를 달래어 군사를 회군케 했다. 최린은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그가 죽을 때 죽은 뒤의 나라와 가정의 앞날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했다.
최유청의 후손들은 고려가 망할 때까지 계속 벼슬직을 이었고 그의 5대손이 유명한 최영 장군이다. 최영 장군은 태조 이성계의 라이벌이었고 최영 장군으로 인해 혼이 난 조선은 최영 장군의 가문인 철원최씨의 벼슬길을 의도적으로 막았다. 조선사마방목을 보면 여느 성씨와 달리 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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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가문의 과거 급제자는 둘 뿐으로, 조선 중종때 진사를 거쳐 선원전 참봉이 된 최언형과 철종때 진사급제한 최학현이다. 선원전은 전주이씨선조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니 최영 장군의 후손이 선원전 참봉이 되니 생각하면 장군의 후손에게 굴욕을 안겨준 처우였다. 철원 인근의 연천을 본으로 하는 삭녕최씨가 75명의 급제자를 낸데 비하면 철원최씨의 급제자 2명은 너무도 적은 숫자이다. 철원최씨는 시조 최준옹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고 마지막 최영이 고려를 위해 죽으니 그 가계는 고려를 지키던 가계라 할만 하다.

이의민의 막내아들 이지광도 쌍도자로 불렸으니 이지영과 다를 게 없었다.
또 이의민의 처 최씨는 마음이 흉하여 질투로 인하여 이의민의 사랑을 받던 가비(家婢=여자하인)를 죽이고 노(奴=남자하인)와 사통하니 이의민이 성나 그 노를 죽이고 처를 내쫓았다. 이의민은 양가의 여자로서 미색이 있는 자를 들여서 혼인하였다가 다시 버렸고 그 딸도 음탕하기가 어미와 같았다. 이의민의 집안은 흡사 콩가루 집안인데 과연 그랬을까? 믿기지 않는 부분이다. 이의민이 천민출신이라서 특별히 차별받은 점이 없지 않았을까. 고려사의 저자는 이의민에 대해서는 특별한 반감을 지녔음이 그 기술과정에 나타난다. 신분사회의 족쇄를 벗지 못한 이의민이다.
고려사 세가에 나타나는 이의민의 전횡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명종22년(1192) 10월의 기록이다.
이의민이 어사대부(정3품․판어사대사에 이은 어사대의 2위 벼슬) 왕도가 수덕궁(의종이 세운 궁으로 안에 천녕전이 있다) 곁에 집을 지었다는 이유로 이의민이 탄핵하여 파면시키니 조야가 무척 실망하였다.
왕도는 1180년(명종10년) 비서소감(전적과 축문을 맡은 비서성의 종4품 벼슬) 시절 금나라 사신으로 다녀왔고 1191년 12월에 추밀원부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추밀원부사로 일할 때에 지추밀원사(왕의 비서기구인 추밀원의 서열 3위․종2품) 김영존과 추밀원부사(왕의 비서기구인 추밀원의 서열 6위․정3품) 손석(경대승의 족형)이 추밀원에서 서로 싸우기를 범이 성내 우는 것 같이 하니 사람들이 겁을 내어 피했지만 오직 부사 왕도가 나서 조용히 달래어 화해시켰다. 능력이 있고 온건하여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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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망이 높던 왕도였다. 그의 집이 궁 곁에 있다는 것은 표면적 이유였고 실제이유는 그의 인기가 높다는 점 때문이다. 왕도를 탄핵하므로 이의민은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고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게 하였다.
그때부터 권신으로 말리는 사람이 없게 된 이의민이었다. 자신의 목이 개경 저자거리의 장대에 걸릴 줄이야 더욱 몰랐던 이의민이었다.

이의민을 죽이는 직접적 사단은 아들 때문이었다. 1196년에 아들 이지영이 장군이 되었는데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우봉최씨 가문의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가진 발합(鵓鴿)을 빼앗자 최충수가 노하여 형 최충헌에게 고하고 이의민 부자를 죽이고자 모의했다.
발합이 무엇이건대 최충수가 깊은 원한과 살의를 품게 되었을까? 발합은 보통 비둘기로 번역되고 있는데 비둘기를 빼앗겨서 그리 화를 냈을까?
발합에 대해서 고려사의 다른 기록을 참고하면 그 답이 나온다.
고려사 세가 고종 14년 12월조를 보면,『어사대(관리규찰기관)가 마을에서 발합응삽(鵓鴿鷹颯)을 기르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는 공직에 있는 자는 공무를 폐하고 그 직이 없는 자는 서로 쟁송을 일으키기 때문이다.(御史臺, 禁閭里養 鵓鴿鷹颯, 以有職者, 廢公務, 無職者, 起爭訟也)』
했다. 새에게 공무도 잊을 정도로 몰두하며, 새 때문에 서로 다툼이 많이 생겨나자 국가기관인 어사대가 이를 키우는 것을 금했다. 이는 고려사람들의 중요한 오락으로 보아야 한다. 요즘도 본업까지 잊고 빠져드는 오락이 있다. 도박이나 경마, 카지노, 컴퓨터게임 같은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당시 고려사회에서도 무언가 사람들로 하여금 몰두하게 하여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발합응삽’을 필자는 사냥용 매로 본다. 매를 키워 산야에서 꿩이나 짐승을 잡는 매사냥은 당시 큰 인기였다. 해동청으로 대변되는 우수한 고려의 매는 몽고인들도 탐내었다. 해동청은 우리나라의 매가 푸른 빛을 띄기 때문에 그리 불렀다. 해동청은 해청, 해동청골로도 불린다. 골은 송골매를 뜻하는데 송골매가 바로 해동청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신라 진평왕이 매사냥을 즐겼다’고 했고, 일본서기에도 일본의 닌토쿠왕이 백제왕족 주군으로부터 매사냥을 배웠다고 했다. 옛자료를 보면 황해도 해주와 백령도에 좋은 매가 많이 난다고 했다. 해주와 백령도는 개경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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깝다. 고려는 나중 응방을 두어 몽고에 매를 진상했다. 매는 그 해에 나서 길들여진 것을 ‘보라매’라 하고 야생으로 여러 해 된 것을 ‘산진이’라 하고 집에서 키우면서 여러 해 된 것을 ‘수진이’라고 했다. 보라매로 길들인 지 한살 된 매는 ‘갈지개’라고 했고 ‘삼계참’은 사람 손에서 3년 이상을 산 장수매를 가리킨다. 또 빛깔에 따라 대체로 매의 빛이 흰 것은 송골매, 청색인 것을 해동청이라 했다.
이지영과 최충수가 다툰 발합응(鵓鴿鷹)은 ‘보라매’이다. 보라매는 난 지 1년이 안 된 매인데 어려서 길들이기 쉽고 활동력이 왕성해 최상품사냥매이다. 매로 인해 다툼이 잦았다 하니 최충수가 가진 훌륭한 보라매를 이지영이 빼앗으려 했고 매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최충수는 이의민과 이지영에 대해 깊은 원한을 지니게 되었다. 왕도와 같은 신망 있는 신하를 내치는 이의민에 대해 명종왕은 우려하고 있었고 이 왕의 심사누구보다도 최충헌은 잘 알고 있었다. 평소 이의민의 전횡에 대해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 최충헌은 살해모의에 박차를 가했다.
초여름이 시작되던 1196년 4월(음력) 이의민을 죽일 기회가 왔다.
그 때 명종왕이 보제사에 행차하는데 이의민이 병을 칭탁하여 왕을 따르지 않고 몰래 미타산의 별장에 갔다. 장군 최충헌이 동생 최충수와 생질인 대정(종9품 소위급 벼슬) 박진재, 족인 노석숭 등과 함께 칼을 소매에 넣고 별장 문 밖에 숨어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의민이 돌아오려고 문 밖에 나와 말을 타니 최충수가 먼저 돌입하여 그를 쳤으나 맞히지 못했다.
“이놈! 최충수! 네가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의민의 고함과 함께 이의민의 호위사병들이 이의민을 싸고 보호하면서 싸움이 펼쳐졌다.
“이의민. 내 칼을 받아라!”
이의민이 놀라 말 뒤로 숨으며 외쳤다.
"너희 형제들이 무슨 원한이 있어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의민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최충헌이 앞으로 달려나가 호위병들을 뚫고 이의민의 어깨를 베니 이의민이 허공을 잡으며 쓰러졌다. 피가 뿜어지고 이의민이 나등그러지자 이의민의 시종들은 이기기 어려울 줄 알고 달아났다. 최충헌은 신음하는 이의민의 머리를 한칼에 베어 족인 노석숭에게 주었다. 노석숭은 개경으로 달려가 저자거리에 이의민의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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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매달았다.
"이의민이 죽었다.“
이의민의 머리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 떠들면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최충헌 일가와 불화하여 이의민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인데 그 이면에는 개경인근지역인 우봉지역(지금의 황해도 금천)의 최씨 세력이 급성장해 상당한 물리력을 가지면서 이의민 세력과 대립케 된 점이 있다. 최충헌의 아버지는 군단장급인 상장군(정3품) 최원호이다. 명가의 자손으로 윗대부터 상당한 지역적 바탕을 지니고 있었다.
최충헌은 이의민의 아들들을 모두 죽인다. 그의 아들들중 가장 먼저 죽음을 당한 이는 둘째 이지영이다. 그는 해주에 있는 안서도호부의 절도사로서 변란을 모르고 있었다. 최충헌이 보낸 장군 한휴가 해주에 나타났다.
“역적 이지영은 어디 있는가?”
도호부의 대청에 나타나 놀라 쳐다보는 이지영은 목은 즉시 바닥에 떨어졌다. 이지영의 죽음을 확인한 최충헌은 즉시 이의민의 남은 두 아들을 찾는다.
다른 아들 이지순과 이지광은 최충헌에게 저항한다. 그러나 그들이 거느린 군세가 약하고 목숨을 바쳐 돕는 이가 없자 자수한다.
“부디 목숨만 살려주시오.”
빌지만 최충헌은 이들을 용서하지 않고 목을 벤다.
반역의 시대에 이의민 자신과 그 아들들이 행한 만행의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았다. 23년전 이의민이 경주 곤원사에서 의종을 목졸라 죽일 때 이런 자신의 운명도 예고된 것이다.
경주에 남은 이의민의 친족이나 동류세력 처치가 과제였다. 친족들은 최충헌에게 저항하는데 성급한 진압이 반란을 불러온다. 이들을 동경적으로 부르는데 몽고가 침입해 올 때까지 경주의 반란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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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과 관련된 기록중 신기한 것이 있다. 고려사 열전 이의민 편의 마지막에,
『이의민은 문자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무격(무당)만 믿었는데 경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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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매(木魅=나무귀신)가 있어 이를 믿었다. 나무로 만든 이 목매를 경주인들이 두두을(豆豆乙)이라 불렀는데 이의민이 두두을을 집의 신당에 모셔두고 매일 엎드려 제사하며 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두두을 목매는 당시 경주 사람들의 신앙이었다. 동국여지승람 경주부에는 두두을의 발원지를 ‘왕가수(王家藪)’로 적고 있다. 왕가수는 ‘왕가의 숲’이라는 뜻인데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나타난 계림숲을 가리킨다고 동국여지승람은 적시하고 있다. 그 외 새로운 사실도 적고 있는데,
『왕가수는 경주부 남 10리에 있으며 목랑 즉 세칭 두두을를 제사하는 곳이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 몽고의 살례탑이 침입하자 경주에서 ‘우리 목랑 다섯 분이 적과 싸우고저 하니 무기와 안장 낀 말을 보내달라’ 하여 당시 실권자 최우가 안장낀 말을 그린 그림을 내시부 관리 김지석을 통해 경주에 보내 주었다.』했다.
몽고의 침입을 막는 호국의 두두을이었다. 고종 18년에 침입한 몽고의 장수는 살례탑이었는데 몽고군은 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문책하기 위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압록강을 건너 내려 왔다. 그들은 연도의 고을을 불태우고 저항하는 성은 칠저히 짓밟았는데 대표적으로 평주(지금의 황해도 평산)에는 성에 닭이나 개 한 마리 남지 않았다고 했다.
살례탑은 안북도호부(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에 머물고 당고 등 막하의 세 장수가 개경 인근에 포진하였는데 고종 18년(1231) 11월에 북계분대어사(관리규찰기관인 어사대가 북계에 설치한 분사무소의 종6품 감찰어사) 민희가 살례탑을 만나 보고한 기록을 보면,
『몽고진영에 한 원수가 있어 자칭 권황제(權皇帝=황제의 권한을 지님)라 하고 이름은 살례탑이라 하였습니다. 전려(모피천막)에 앉아 비단 수를 놓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부인들이 좌우에 나열해 있었는데 말하기를, “너희나라 고려가 나라를 고수하려면 고수하고, 항복하려면 속히 항복하고, 우리와 싸우려면 싸우도록 속히 결정해서 통보해줄 일이다.” 그는 저에게 “너의 관직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므로 대답하기를, “분대 의 관인입니다.”고 하였더니, “너는 낮은 벼슬의 소관(小官)이다. 대관인(大官=고관)이 속히 와서 항복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이 자못 거만한 살례탑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그 해 최우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대로 경주의 목랑에게 빌어 승전하고자 했고 그 효험때문인지 다음 해에 살례탑은 용인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쏜 화살을 맞아 전사하고 고려 조정은 한숨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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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을 신이 이의민에게 도움을 준 구체적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고려사 열전 이의민 편에 기이한 것이 있는데,
『하루는 홀연히 이의민의 두두을 신당 안에서 곡소리가 울렸다. 사람도 없는데 곡소리가 들리니 이의민이 괴이하여 “두두을 신이여! 무슨 일입니까?” 물으니 두두을이 말하기를, “내가 너의 집을 수호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 하늘에서 장차 화를 너에게 내리려 하는구나. 네가 화를 입으면 내가 이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이를 슬퍼해 곡한다.” 답했다. 이로부터 얼마 안되어 이의민과 그 일가가 최충헌에게 죽었다』
두두을은 이의민의 몰락을 예언한 것이다. 신통력이 있는 두두을이었다. 두두을은 당시 경주인들의 전통신앙이자 호국신앙이었다.

두두을은 일명 ‘두두리’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귀신 두두을을 믿는 사람 또는 그 지역을 ‘두두리’라고 했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문무왕때 삼국통일에 간섭하는 당나라군을 막기위해 영랑법사가 사천왕사에서 펼친 비술 ‘문두루’가 나오는데 이것도 두두을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두두을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두두을의 시작은 신라 진평왕때이다. 비형랑의 출현부터이다. 진평왕때 이미 죽은 진지왕의 영혼이 사량부의 도화랑이라는 미색이 뛰어난 여인에게 나타나 그 사이에 낳은 자식이 비형랑이니 비형랑은 귀신의 아들인 것이다. 비형랑은 하루밤 사이에 다리를 놓고 집을 짓는다. 그가 만든 다리가 귀교(鬼橋)이다. 비형랑이 귀신과 함께 놀며 기이함을 보이자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신원사 북쪽에 다리를 놓아보라.’ 명령하니 비형랑이 수하의 길달 등을 데리고 귀신들을 동원해 다리를 놓았다. 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귀교’편과 삼국유사에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것이 동경 두두리의 시초이다.(귀교는 구 신원사 곁에 있었는데 지금도 석재등 유물이 남아 있다.)
두두리의 첫째 작업은 개천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토목공사와 관련된다.
비형랑의 수하중 뛰어난 존재인 길달은 각간 임종의 후사(양자)가 되었다. 길달이 흥륜사의 누각문을 짓고 길달문이라고 했는데 차츰 길달이 사악해지자 비형랑이 그를 죽였다. 그 때 서라벌 사람들이 가사를 지어 부르기를 ‘이 집이 비형랑의 집이다 귀신은 머물지 말라.’ 노래했다. 두두리의 두 번째 의미는 진경축사(경사를 부르고 사악함을 쫓음)의 의미
를 담고 있다. 신라 처용과 동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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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불우 영묘사편을 보면 ‘두두리’에 대해서 나오는데 중요한 사항을 담고 있다.
『영묘사는 경주부의 서쪽 5리에 있다. 당나라 정관 6년에 신라 선덕여왕이 창건했다. 남아있는 불당(대웅전)이 3층으로 그 체제가 특수하다. 신라때의 불당이 한 둘이 아니었으나 다른 곳은 다 무너지고 헐어졌는데 이것만은 홀로 완연히 어제인 듯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이 절터는 본래 큰 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 하루 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드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 한다』
영묘사는 두두리가 만든 것이다. 큰 못을 메우고 절을 짓는 쉽지 않은 난공사를 두두리에 사는 사람들이 하루 밤에 못을 메우고 사찰을 건립했다. 영묘사는 서라벌 일원의 봉성사, 감은사, 봉덕사, 사천왕사, 영흥사, 봉은사와 함께 신라 왕실의 7대사찰이었다. 영묘사는 특별히 녹사라는 파견 관리를 둔 특별사찰이었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사찰을 두두리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 불당이 신라때부터 조선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이 저술되던 조선 중종때까지 일천년 가까이 영묘사가 남아 있었는데 이는 건축학의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무슨 비결이 있어 신라시대 목조 건축물이 1천년 동안이나 존재했을까?
당시 신라 두두리들이 튼튼하게 건립한 때문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두두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기술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런 항구적인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었을까?
석굴암과 같은 석조물과 축조물, 쇠붙이등은 오늘날도 그 재현이 쉽지 않다. 봉덕사신종(에밀레종)의 종두고정용 쇠자루는 불과 손가락 굵기에 불과한데도 72톤의 동종을 오늘까지 튼튼히 고정하고 있다.(이 쇠자루를 만든 기술은 현대인들도 알 수 없다고 한다)
현재 에어콘으로 습기를 뽑아내어 겨우 전굴암(電窟庵)으로 지탱하는 석굴암의 결로방지 기술도 미스테리이다. 불국사 석조기초의 그랭이 공법이라든지 다보탑과 석가탑의 조형미, 감은사탑에 아직도 그대로 꽂혀 있는 신라의 철봉등 미스테리의 기술은 서라벌 두두리의 소산이다. 신라의 찬란한 문화유적과 유물은 두두리라는 장인들이 이룬 것이다.

두두리는 서라벌 내의 특정지역이며 특정사람들이며 특정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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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족이나 귀족이 불교를 믿을 때 두두리 거주인들은 전통신앙 두두리를 믿으므로 차별화되었다.
두두리는 장인들을 가리키거나 장인정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전해온다.
두두리는 평민들이다. 성씨로 보면 두두리는 이씨와 같은 평민들이다. 신라에는 김씨, 석씨, 박씨의 3성왕족과 6두품인 최씨가 있었다. 그 외의 성씨들은 신라사에 보기 어렵다. 신라의 평민들은 오늘날의 이씨, 손씨, 정씨와 같은 성씨들이다.
경주의 평민세력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안존했고 그들이 배출한 대표적 존재가 이의민이었다. 골품제 하의 신라시대에는 빛을 볼 수 없었던 이씨들이 고려시대에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었다.
두두을이 목매라 함은 목상을 깎아 모신 때문이다. 어떤 모습일까? 비형랑의 얼굴모습인가? 신라 처용의 형상과 유사한 것인가?

두두을은 오늘까지 한국인의 장인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두두을에 담긴 정신은 아직까지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으니 연구과제이다. 한국인의 놀라운 정신중 하나가 두두을로 한국인의 정신적 고향이 경주이듯 한국인의 평민정신의 원류가 두두을이다.
신라 처용은 춤이란 무형문화재이자 예술로 계승되었고 두두을은 한국인의 근로정신과 직업정신으로이 계승되었다.
특히 고대 야철의 장인들을 두두리라고 불렀다. 사철이나 토철을 녹여서 철을 뽑았는데 물 좋고 연료림이 좋은 곳에 용광로인 토둑을 쌓아 며칠이고(주로 겨울철에 했다) 불을 때어 쇳물을 뽑아냈다. 이 쇠를 얻는 과정을 쇠부리라고 했고 판장쇠를 얻는 과정을 생부리, 솥을 만드는 과정을 익부리라고 했다. 전주가 돈을 대고 도편수나 불매꾼 등이 분업과 협업으로 쇠를 얻는데 자칫 쇳물을 쏟는 등 실패나 안전사고를 우려해 완벽한 작업이 되도록 시원신(쇠의 신)에게 빌기도 했다. 야철은 고대의 가장 중요한 생산작업중 하나로 이를 두두리라 했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산업의 원류 두두리의 정신은 오늘날 한국의 모든 산업의 정신으로 되었다. 우리 장인정신의 본류이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산업, 건설, 생명공학등 2,000억불 수출을 달성하는 한국번영의 바탕은 바로 신라 두두리 정신이다.
제조업에서 튼튼하고 내구력 있는 상품을 제조하는 뿌리는 일천년 무너지지 않는 신라 영묘사를 건축한 그 두두리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끊임없는 도전과 창조정신으로 축적된 기술력과 정신력은 한국인에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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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계승되어 오늘날 한국의 공업적 번영이 이룩되었다.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신라 두두리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져야 한다.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발굴하고 미래의 지속적 번영을 위해 필요하다.

9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죽고난 뒤에 경주에도 그 여파가 미쳤다.
최충헌 등이 지후(정7품 벼슬) 한광연을 경주에 보내어 이의민의 3족을 멸할 것을 명종왕에게 청했다. 사자를 여러 고을에 보내 이의민의 노예나 이의민에게 붙은 당을 베었다.
이의민의 3족이 경주에 있었다니 이의민의 혈연적 연원은 경주이씨일 가능성이 크다.
이의민 족인들에 대한 숙청은 간단히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시 갇혔다가 풀려난다. 이후 수년에 걸쳐 경주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이의민 사후 4년 뒤인 신종 3년(1200)에 경주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해 12월에 개경 조정에서 인사발령이 있었는데 경주부유수(慶州副留守=정3품의 유수를 보좌하는 벼슬로 지금의 경주부시장) 방응교가 파면되고 낭중(정5품으로 상서 6부의 실무벼슬) 위돈겸이 부유수가 되었다.
이는 그 해 8월에 경주에서 일어난 이의민의 족당 발호사건을 잘못 처리한 것에 대한 문책이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의 족속들을 죽일 때 경주별장(별장은 소령 정도의 무관벼슬) 최무가 중앙의 명을 받고 이의민의 족인(친족)인 사경 등 몇 사람을 잡아 처벌하였다. 이에 사경의 족인(친족)인 백유․직재 등이 이를 원망하여 경주부유수 방응교에게 호소했다.
ꡒ별장 최무가 난을 일으키고자 합니다.ꡓ
그러자 방응교가 이 말을 믿고 최무를 체포했다. 방응교가 자신의 수하인 최무를 가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방릉교의 지원을 계기로 이의민의 족인들은 역습했다.
“네가 우리를 죽여? 이 놈 네가 도리어 죽어야 돼!”
사경의 친족이자 이의민의 잔당인 백유와 직재가 밤에 감옥에 쳐들어가 최무를 죽였다.
“최무가 죽었습니다. 백유와 직재 일당이 쳐들어와 죽였습니다.”
옥리의 보고에 방응교는 이상하게도 그 살인죄를 불문에 부치고, 도리어 최무의 족인(친족)인 용웅과 대의 등을 잡아 죽이고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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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를 지원하고 최씨와 대립한 방응교였다.
그래서 최무쪽 사람들이 분하고 원통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대세가 다시 역전되어 최무의 족인인 용웅․대의 등이 이의민의 친족인 백유․직재를 죽였고 용웅도 또한 상대편에게 피살되었다. 이의민의 족인의 수괴는 모두 죽고 최무의 족인인 대의만 남았다. 대의 등이 경주 거리 가운데에서 무뢰배를 모아 함부로 횡포하였으나 부유수 방응교가 또 능히 제어하지 못하자 조정에서 방응교를 파면했다.
고려사 세가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신종 3년(1200) 8월 경주의 이의민의 족인들이 풀려나자 경주부의 관리들과 틈이 생겨 싸워 서로 죽였는데 이의민의 족인들이 이기지 못하였다. 그 때 경상도안찰사인 전원균이 경주에 들어와 이를 제어했는데 방수(房守=수비담당)․별장(최무를 가리킴)․통인(지방수령의 명령을 시달하는 연락인)이 모두 피살되고 안찰사 전원균은 다른 읍으로 달아났다. 한때나마 경주가 치안부재의 공백지역이 되었다.
전원균은 낭중(상서 6부성의 정5품 중견공무원) 시절인 1182년에 금나라에 만춘절(황제의 생일) 축하 사신으로 갔다오는 등 상당한 경력을 지닌 이였다.
이의민 잔당과 방응교가 한편이 되어 고려 조정의 실권자인 최충헌에 게 저항한 것은 방응교가 경주에 연고를 둔 자였기 때문이다. 방씨는 지금 온양을 본관지역으로 하지만 원래 뿌리는 경주이다. 충남 온양이 방씨의 본거가 된 것은 고려초이다.
방씨시조인 월봉 방지(方智)는 신라에서 벼슬을 했고 그의 후손 방헌규도 울산지역 지방관인 계변사사의 장을 지냈다. 방씨는 그 집안이 백제계와 대립되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신라 제31대 신문왕때 백제 무왕의 조카인 복신과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의자왕의 둘째아들인 풍이 돌아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하다가 내분이 생겨 풍이 복신을 죽였다. 풍은 홀로 신라에 저항했으나 세불리하여 웅진 부근에 은신잠복하고 있는 것을 방씨인 방헌규가 체포하여 서라벌로 송치해서 죽였다. 백제유민들은 이 일로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서기 927년(경애왕 3년) 견훤이 신라 포석정에 침입해 신라왕을 죽이고 서라벌을 분탕할 때 견훤은 풍에 대한 복수로 방씨를 모두 죽였다. 그 때 겨우 탈출한 방씨 일부가 왕건에게 협조했는데 이후 방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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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대해 여느 성씨와는 다른 각별한 애착을 지녔고 이의민계와 밀착하였다. 이런 사실은 방씨득성소원록에 나와 있다.
방응교는 이의민과 밀착되었던 인물이었다.

이 1200년의 난리후에 전원균은 1202년 일어난 경주적 이비의 난에 초토처치병마부사(병마도사 김척후에 이은 토벌군 副대장)로서 참전해 이비의 난을 무사히 평정한다.
부유수 방응교도 9년 뒤인 1209년(희종 5년)에 예부시랑(시랑은 상서6부의 정4품 차관급∙예부는 외교와 교육 등 담당)으로 상장군 김원걸과 함께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등 복권되었다.
이런 저런 저항 사건들은 이의민의 뿌리가 경주에 깊이 남아 있었음을 알려준다.
[끝]

매수 354장
작자 이양훈 011-225-5330

이광춘 10-06-01 11:12
 211.♡.82.235 답변 삭제  
자세한 글 잘 읽었읍니다.

한편의 대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듭니다.
바쁘신 중에도 이런, 좋은 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무부장  이광춘  올림
현웅 10-06-03 20:07
 119.♡.97.43 답변  
사무부장님 요즘 좀 어렵죠?
조금만 참아주십시요 미안하고 염치 없습니다만,,,
위 글은 이의민 선조님을 우리문중이 아닌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까 찾던중 발견한 글입니다
비교적 중립적이고 객관적이 라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미쳐 우리도 감지하지 못한 부분까지 지적하는 세심함이 맞는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꽤 심혈을 기울인 듯 합니다

물론 우리 자료부장님의 자료에 비교할수는 없지만 타 문중에서도 이렇게 연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이의민 선조님의 위상을 짐작케 합니다
하루 빨리 실체를 정립하여 연구가 아닌 누구나가 우러러 볼수있는 위인으로 모시는 길만이 우리 후손들이 할일이 아닌가 합니다

점점 다가오는 더위 모든 가족과 우리 부장님도  건강하십시요  이현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