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2-27 11:54
베트남 리(Ly)왕조의 정선이씨 선조들
 글쓴이 : 이정길
조회 : 3,179  
안녕하세요?
저도 정이지씨와 같은 생각입니다.
왜곡 폄훼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할 숙제가 있군요.
다 같이 힘을 합쳐야겠습니다.
항상 수고하시는 여러분들...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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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소띠 해가 밝았습니다. 이제 설 명절도 지났으니 명실 공히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은 셈이지요. 올해 2009년은 정선 이씨에게도 좀 특별한 해입니다. 우리 원시조인 이공온 선조께서 베트남에서 이왕조를 건국한 것이 1009년이므로 올해는 베트남 이왕조 개조 10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왕조는 이공온(태조)-이덕정(태종)-이일존(성종)-이건덕(인종)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아시다시피, 인종의 세째 왕자인 이양혼 선조가 고려로 이주하여 정선이씨의 시조가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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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덕(인종)의 후사는 이양환(신종)-이천조(영종)-이용한(고종)-이호참(혜종)으로 이어집니다. 이호참(혜종)은 아들이 없어, 1225년에 사위(소성공주인 소왕의 부군) 집안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면서 이왕조가 끝나게 됩니다. 역시 고려로 망명해 와 화산이씨의 국내시조가 된 이용상은 바로 이용한(고종)의 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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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이어지는 글은 제가 베트남에 관련한 책 <베트남 리포트>를 읽으면서 정선이씨 선조들과 관련한 부분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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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유교가 베트남에서 정치이념으로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이황조부터다. 이왕조의 제2대 왕인 태종(이덕정)은 1028년 즉위 직후 왕권 강화에 나섰다. 왕권 강화책의 하나로 그는 1038년 중국을 본떠 토지나 오곡을 제사하는 사직단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그는 직접 쟁기를 잡는 친경의식인 적전의 예를 행했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유교의 왕권 개념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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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태종은 난립하던 관습법 등을 정리해 성문법인 '형서'를 선포했다. 이 밥률은 중국의 당률을 모방해 지배자에 대한 불충한 행위를 예전보다 훨씬 엄격하게 처벌하는 한 편, 형벌에서도 태, 장, 도, 유, 사 등 오형제를 채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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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왕조는 중국으로부터 자주성을 유지하면서도 민생을 안정시켰던 유일한 왕조이다. 특히 성종(이일존) 재위시 지금의 중부 지역에 위치했던 참파 왕조를 격퇴한 데 이어 다시 인종(이건덕) 재위 기간에는 수십만의 대군을 앞세우고 침략해 온 송나라를 물리쳤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상걸(리뜨엉끼엣) 장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추앙심은 지금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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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송나라의 개혁사상가인 왕안석이 베트남이 가진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해 베트남을 지배하고자 했다. 이 첩보를 입수한 이왕조는 1075년부터 1077년까지 명장 리뜨엉끼엣을 앞세워 지금의 중국 광서와 광동 지역을 공략했다. 이왕조의 시각으로 보면 이 지역은 예전 베트남의 영토이기도 했다. 이에 맞서 송나라는 베트남을 공격했으나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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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상은 베트남에서 사실상의 첫 독립왕조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이왕조의 왕자였다. 그는 아들이 없어 불과 일곱살인 차녀(이불금, 소성공주)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준 혜종(이호참)의 숙부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이불금(소왕)은 시가 어른인 쩐투도(전수도)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다. 권력을 찬탈한 쩐투도는 곧이어 '눈엣가시'같은 왕족들을 시해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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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이용상은 배를 타고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망망대해를 떠돌던 그가 닿은 곳은 지금의 북한 땅인 서해안 옹진반도였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린 이용상은 때마침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주민들을 모아 이들을 물리친다. 당시의 고려 왕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이용상의 이런 무공을 보고받은 뒤 그를 화산군으로 봉하고 일대의 땅을 식읍으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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