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3-05 18:44
이공온에서 이의민 까지의 짧은 생각
 글쓴이 : 정이지
조회 : 3,507  
베트남 최초의 독립국가 성립을 이씨왕조로 보는 것이 현 베트남의 정론이다.

대월이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왕조를 세우고 독립국가로 출발한 원동력이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우리 정선이씨와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당나라가 906년에 망하고 960년 송나라가 건립되기 전 중국 중원이 五代十國으로 혼란스러위 지자 939년 대월은 독립적인 왕조를 세우며 중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대월도 1009년 이씨왕조가 세워지기 전 까지 70년간 지배세력이 안정화 하지 못하고 부침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불안정한 시스템을 정리하고 베트남 최초로 안정적이며, 독립적인 왕조를 세운 사람이 이공언이다.

 이공온은 974년 고법주(古法州)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법주 호족세력 집안의 여식인 范씨  부인에게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神人으로 알려진 신비의 인물이다. 그가 2살 때 그의 어머니 范씨 부인이 李慶文과 혼인하여 그를 李家에 입적 시킨다.  이경문은 중국 복건성 출신의 이민자로 당 태종의 아들 조명왕 李明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경문은 어린 공온을 절에 보내 훈육 받도록 하였으며 ,교육은 승려 만행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아 이경문이 중국계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경문과 范씨 부인의 결합은 대월에 막강한 호족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공온은 성장하여 왕족인 黎씨와 혼인하고 중앙에 진출하여  마침내 전 왕조를 멸하고, 새 왕조를 출발 시킨다. 불가에서는 이공온의 황제 선위에 대해 도참설을 예를 들며 대대적인 홍보로 민심을 사로 잡았다. 재정과 종교 지원에 의해 이루어진 선위 과정이다.
이경문의 재정은 무역을 통하여 이루어 낸 결과물 이었다. 그는 멀리 신라의 경주로 부터, 일본…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해상실크로드의 교두보 역할를 하던 광동성 무역권의 중요한 실력가였다. 그는 이 루트를 통해 이루어지는 해상 무역으로 부를 축적해 왔다.  그의 인맥은 “빈공진사과”를 통해 당의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이었다.  이경문은 이를 운영하며 부를 축척해 왔던 것이고, 이공온의 선위를 송으로부터 신속하게 인정을 받을 때 까지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빈공진사과  과방출신이라면 곧 신라인이다. 빈공진사과는 각 도호부 이민족의 중앙진출 등용이었지만 과방출신 80%가 신라인이고 10%가 발해인이었다. 즉 90%가 극동지역의 사람들 이었다.  경주로부터 광동성 남부까지의 해상무역은 신라의 경주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각 지역 거점마다 신라인들은 “신라방”을 세워 무역루트를 관리해 왔으며, 경주의 세력가들이 중앙에서 지휘하였다. 이들의 자제들이 빈공진사과를 통해 중국의 중앙에 진출하여 중국과 관계를 원활하게 조율하였던 것이다. 이경문가의 해상무역은 곧 신라 경주와의 교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점에서 이경문과 부인 范씨, 그리고 초산사의 神人, 경주로 이적한 휘 양혼…4사람의 관계를 유추해보면 그 신인이 고려인이 아니 였을까 하는 개연성을 찿아 보게 된다.
 
 이공온은 선위 후에 급진 개혁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우선 외교와 민심의 안정에 전력을 다했다. 송과의 지속적인 외교관계를 통해 군사력 분산을 막고, 불교를 국교로 삼아 민심이 한 곳으로 모일 수 있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척인 전왕조  레(黎) 집안과 단절도 않았고, 혼인 정책으로 호족세력을 더욱 견고하게 규합시켜 나갔다.  이러한 집중화를 통해 이공온은 남부지역 참파를 응징하기 시작했다. 참파는 고려의 팔관회에 외교사절을 보낼 정도로 해상 무역에 막강한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중국과의 직교역이 대월에 의해 단절된 상태라 정치적 시스템과 군사력이 약세였다. 대월국 이씨 왕조 내내 참파와의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중국과 육로교역을 원하는 참파의 욕구와 해상무역 거점의 확대라는 라는 대월국의 이해가 충돌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엔 대월이 승리하지만 이들간의 갈등은 이후 600여년간 지속된다. 재정안정이 절실했던 이공온은 참파의 제압이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이공온은 장성한 아들 불마로 하여금 남부지방의 참파를 계속 토벌토록 하여.  재정확충과 외교 안정을 통해 이씨왕조는 상큼한 출발을 하였다.
  불마는 이공온과 전 왕조의 공주인 黎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이공온이 죽고 황위에 등극하려 하자,  복잡한 혼인관계에 의해 탄생한 아들 들간의 배꼽 전쟁이 일어나지만, 결국엔 불마가 이를 평정하고 황위에 오른다.  그가 2대왕 태종이다.  태종은 국토확장에 치중한다, 참파와의 전쟁이다.  태종은 정권이 안정이 되자, 일시에 1,000여 개나 되는 절을 만드는 등 불사에 집중한다.  재위 15년에는 법를을 다듬어 베트남 최초의 형법인 “형서”를 반포했으며, 재위 17년에는 대대적인 점성국 정벌에 나서 점성국 국왕과 그의 비빈을 생포해오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국호를 대구월에서 “대월”로 고쳤다..
  태종은 2명의 아들을 낳는다. 장자가 일존이고 차자가 일중이다.  일존이 3대왕 성종이 된다. 성종은 후사가 없다가 40세가 지나서야 건덕을 얻고, 2년 후 차자 숭현을 얻는다. 건덕이 제4대왕 인종이 되고, 인종이 후사없이 죽자 그의 동생 숭현의 아들 양환이 제5대왕이 된다.
  2대왕 태종의 차자 일중은 이경문가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이씨부인이 아들을 낳는 데 장자가 성경이고 차자가 성광이다. 성경의 장자가 양온이며, 성광의 장자가 우리의 선조이신 양혼이다. 양환과 우리의 시조이신 양혼은 6촌간이시며, 그 나이차이는 44세다. 
  휘 이양환이 대월을 떠나는 시기는, 건덕 말기 신하 여백옥이 숭현 후 아들 양환을 세우며 실권을 장악해 나가면서  승계권이 있는 왕자들을 척결하기 시작할 때 였다. 여백옥은 건덕의 생모인 이랑황후와 충직한 신하 이상걸이 죽고 나자 조정을 장악하려는 열망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 강력한 왕보다는 연약한 왕인 필요했으며, 다른 대통승계권자를 권력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왕위 승계권자 모두를 사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자 우리의 양혼 시조님은 가솔들을 모두 거느리고 송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후 양환이 인종 건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여백옥은 정권을 장악한다. 이때부터 이씨왕조의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휘 양혼님은 대월에서 중국의 복건성 출신인 진씨부인과 결혼하였다. 따라서 복건성 지역으로 우선 탈출하였으나 바로 고려로 이주하였다. 고려는 양혼에게 있어 왜가 쪽의 집안이며, 그 집안은 이미 고려의 경주에 적을 삼고 기반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고려에 도착하자 경주의 세력과 손을 잡고 세력을 굳건히 다져 왔다.
 고려에 있어 경주는 개성과 주류권 싸움을 벌이는 또 하나의 세력권이었다. 신라 때 부터 국제무역권을 쥐고 있던 경주와 변방이었던 개성은 경쟁관계였다.. 개성 상권세력은 호족과 결탁하여 “왕”씨를 지지하였고, 왕씨가 신라 왕조를 멸함으로써 세력중심을 경주로부터 빼앗아 갔다.  그러나 중국 중앙관료 지지와  각 무역거점인 “신라방”의 확고한 기반을 지녔던 경주계는 호락호락 넘어가질 않았다.  고려에 의한 신라의 합병은 전쟁이 아니라 선린외교에 의한 것 이었는 데 이것은 경주왕족의 무분별한 타락을 못 마땅해 하던 신라 6性 귀족이 개성세력과 합의한 결과라 봐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고려 왕조는 경주의 6性 세력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고려왕조는 초부터 말기까지 개성세력과 경주세력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는 정국이 지속됬다.  개성세력은 우선, “팔관회”라는 명분 아래 호족세력과 상권을 개성으로 집중화 시키려 했으나, 경주계는  반발하였다. 팔관회는 오랜기간 동안 경주를 중심으로 했던 해상무역권이 개성으로 옮겨지는 중차대한 일 이었기에 경주계는 어찌하든 막아야 할 행사였다. 경주계가 팔관회를 막을 수 있는 명분과 사상적 기초가 필요했으며, 경주 신라인들이 얻어 낸 해답이 유학이었다. 유학은 신라 때부터 기반을 닦아 온 경주계에게 있어서는 강력한 무기였다. 유학은 그 선대들이 이미 중국에서 기초체력을 단단하게 키워 들여 온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 유학은 경주계의 자만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그 자만은 고려 말 무인의 난이 일어나게 될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무인시대도 마찬가지로 경주계와 개성계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경주계 무인세력은 내분으로 멸하고 경주계의 완전한 몰락으로 이어진다.  최충수와 휘 이의민 장군의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고려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의민은 경주계의 대표격 무인이다. 그러나 같은 경주계인 최충수에게 살해 당한다.  최충수는 이의민 장군을 죽이고 경주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개혁안을 발표하면서…그러나 그도 형제인 최충헌에게 죽임을 당한다.  최충수가 이의민을 죽인 사건은 “여자” 때문이었다. 자기가 좋아 했던 여인을 이지영이 차지하자  분에 못 이겨 동지를 배반하고 뒤에서 칼을 들이 댄 사건이다.
 고려 말, 잦은 정변으로 사회의 기강이 무너져 갔다. 권신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의 토지를 수탈하고, 지방관리들은 조세와 부역을 과대하게 책정하여 백성들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다.  권력가들은 백성으로부터 탈취한 부를 이용하여 송나라에서 수입한 사치 물품으로 치장하며 장리를 놓고 백성을 더욱 옥 죄어 갔다.  경주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 핍박이 심해지자 “신라의 영광”에 대한 동경심이 깊어져 갔다. 그들은 타락한 불교(교종)을 멀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기다리며 신라의 토속신앙에 몰두하였다. 그 신앙이 바로 “두두을”이다.  신라인들에게 있어 왕이란 말보다는 그들만의 “차차웅”이란 말이 있다. 차차웅은 제사장이다. 그들은 시대의 고통을 덜어 줄 정신적 제사장이 필요했으며,  새로운 영웅...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두을” 신앙의 중심에 이의민 장군이 있었던 것이다.

이현웅 09-03-05 22:18
답변 삭제  
오랫만입니다 건강하시겠죠 글 잘보았습니다
그런데,,,우리가 해야할일이 명백한것 같군요 이의민 장군의 출신내력 말입니다
역사에서 말하는 소금장수의 아들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족보뿐 아니라 여러곳에서 이의민 장군의 오류를 지적하는것을 보았습니다
하물며 남들도 잘못을 지적하는데 우리문중에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이제 두번다시 잘못된 기록이 `무인시대,처럼 공공연 하게 놔둬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신 휘 이의민 선조님의 위상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일이 있으면 우리 문중이 나서서 막아야 함은 물론입니다 건강하십시요
영선 09-03-18 11:10
답변  
올리시는 글 항상 읽고 있습니다.
정이지님은 어떤 분이신지..궁금합니다.^^^
수고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