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8-10-08 21:45
이의민에 대하여(역사토론방에서 퍼온글)
 글쓴이 : 이현웅
조회 : 5,846  
저는 35세 이현웅입니다
본래 우리씨족의 최대 영웅이신 이의민장군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원래 사직공장파의 후손입니다
6,25전 까지  경기도 연천군 중면(삭령면)에 30~40호가 살고 있었습니다
국가 기록원 토지조사원부의 토지소유자들에게서도 이사실을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종친들은 남한으로 피난하고 그지역은 군사분계선 부근이라고 집안 어른들께 들었습니다
또한 집성촌으로 나오는 강원도 인목면 승양리와는 같은 장소거나 바로 이웃일수 있습니다
저는 이부분을 위치는 같은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명만 바뀌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종친들께서 피난오시면서 가지고온 족보중 훼손되지않은것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족보에 이의민선조님의 기록을 보고 한국의 역사에는 어찌 기록되던 정선이씨 문중에는 최고의 영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하사극에 소개되는 이의민 장군을 보면 우리족보와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이부분은 우리 후손들이 바로잡아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물론 8~900여년이  지난 세월을 하루이틀에 바꿀수는 없지만 최소한 노력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을수 있지않을까 생각됩니다 해서 자료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중 한가지를 올려봅니다

~이의민에 대하여(역사토론방에서 퍼온글)~

이의민(李義旼)은 100여년의 무신정권 시절 10년간 정권을 잡았던 무신으로 천출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에 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1. 이의민의 출생 및 가문

  고려사 이의민 전中

<이의민은 경주 사람인바 그의 부친 이선(善)은 소금과 채를 파는 것이 직업이었고, 모친은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이었다. 이의민이 어렸을 때 이선의 꿈에 이의민이 청의(靑衣)를 입고 황룡사(黃龍寺) 9층 탑(塔)에 올라갔으므로 그는 이 아이가 반드시 큰 귀인(貴人)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정선이씨 족보中

<송나라 때에 개부(開府) 의동삼사(儀同三司)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검교태사(檢校太師) 수사공공(守司空公) 휘(諱) 양혼(陽焜)을 시조로 삼았다. 시조께서는 안남국왕 휘 건덕의 셋째 아들로서 송나라 휘종 때에 난리를 피하여 동쪽으로 와서 경주에 터를 잡아 살고 관향을 삼았고, 고려 명종 26년 병진년(1196)모월 모일에 난적인 최충헌의 혹독한 화를 입고는 9세손, 우원께서 처음으로 정선(旌善)을 관향으로 삼았다.>

 
→ 정선이씨 족보에 따르면 이의민의 6대 조상인 이양혼(李陽焜)은 안남국(安南國) 남평왕(南平王/안남국 4대왕 인종)의 셋째 아들로, 1076년 송나라가 안남국 리(李)왕조를 침공할당시, 북송에 피신하였다가 5대왕 신종의 옹립과정에서 경주로 망명한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후 이의민대에 이르러 가문의 최대 부흥을 맞이하였으나, 최충헌의 군사반란으로 몰락하고 황도와 경주에 세력을 떨치던 이의민 가문도 풍지박살이 난것으로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케도 이의민의 첫째아들 이지순의 아들 이우원(李遇元)이 몰래 정선으로 피신해 정착함으로써 그곳을 본관으로 하여 정선이씨를 가문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후 이우원의 아들 이형규(李亨奎)는 불과 18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수문전 태학사를 지냈으며, 이후 고려내내 많은 문신을 배출하였다고 합니다.

→ 또 다른 주장으로는 <정선이씨는 3대째부터 고려조정에 출사하였으며, 이의민의 부 이선은 추봉 수태사까지 지낸 인물이였으며, 모든 기록은 최충헌에 의해 날조되었다. 한편 이우원은 이의민의 손자가 아니라, 이의민의 또다른 형제인 이희민(李羲旼)의 손자이다. 한편 이의민(초명,이의방,벽산공신, 금강야차)과 이의방은 동일인물일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후로는 정사 고려사의 기록을 우선시하여, 이의민의 신분이 천출이었다고 전제합니다.

허나 천출이었다 하더라도, 만약 안남국 왕실 핏줄이 확실하다면, 이의민이 귀인이 될것이라는 이선의 꿈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비록 몰락했다고 하나 우리가문은 본시 고귀한 가문이다. 네가 비록 고려의 천출이지만 언젠가는 가문을 일으킬 큰 인물이 될것이다." 이런 바램이 이선의 꿈으로 형상화 된것은 아닐까요?

그나저나 이선의 꿈이야기는 필시 이의민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 이의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신이 천출이었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이의민이 "나는 본시 천출이 아니고, 안남국 왕실 핏줄이다."며 자신을 치켜세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편, 당시법에 아비가 평민(백정/고려시대에는 평민을 백정이라 칭했습니다.)이라 해도 어미가 노비이면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됩니다. 따라서 이의민은 어릴적부터 옥령사(玉靈寺)의 노비였을것으로 추정됩니다. 허나 노비라 하여도 절에서 기거하는 것이 아닌, 부모와 함께 인근마을에 살면서 노역만 제공하는 수준이었을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의민 3형제가 시골마을에서 횡포를 부렸다는 고려사 기록으로 미루워 장성해서는 절의 노역도 마다했을것으로 역시 추측합니다.

 
-고려사 기록中

"성인(成人)이 되어서는 신장이 8척이요, 힘이 절등하였으며 형 2명과 함께 그 시골 구석을 횡행하여 고을 사람들의 우환거리가 되었으므로 안렴사(按廉使/안찰사/現 도지사급) 김자양(金子陽)이 잡아다가 심한 고문을 해서 두 형은 옥중에서 죽었으나 이의민은 죽지 않았다. 김자양이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겨 경군(京軍/중앙군/2군6위)으로 뽑아 넣었다. 이의민이 처와 함께 짐을 지고 이고 서울에 당도하니 마침 해가 저물어서 성문이 벌써 닫혀 있었으므로 성 남녘에 있는 연수사(延壽寺)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날 밤 꿈에 긴 사다리가 성문으로부터 대궐까지 뻗쳐 있는지라, 그는 그것을 타고 올라가다가 꿈을 깨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절의 노비였던 이의민 형제들이 절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았음을 알수가 있으며, 마을에서도 힘깨나 쓰고 다녔다는것을 짐작할수가 있습니다. 김자양이 이를 괘씸히 여겨 이들을 잡아다 죽을정도로 심하게 고문하였으나 워락 강골인 이의민은 이를 이겨냈지요. 결국 김자양은 이의민을 황도 중앙군으로 올려보냅니다. 죽을 죄를 지었으나, 엄청난 용력을 나라를 위해 사용하여 죄를 사면하라 뭐 그런 뜻이였겠지요.

 
여기서도 꿈애기가 나오는데, 이후로도 한두번 더 이의민의 꿈애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워, 이의민의 야망이 대단하였다는 반증이 되겠지요.

 2. 출세

 고려사 기록中

"이의민(李義旼)은 수박(手搏)을 잘하니 의종(毅宗)이 사랑하여 대정(隊正)으로부터 별장(別將)으로 승진했다. 정중부의 난 때는 이의민이 살해한 사람의 수가 제일 많았다. 그리하여 이의민은 중랑장(中郞將)으로 되었다가 즉시 장군으로 승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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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계급을 살펴볼까요! 장교들의 군계급은 현재와 거의 유사합니다.

위관급 : 대정(소위)▶교위(중위)▶산원(대위)

영관급 : 별장(소령)▶낭장(중령)▶중랑장(대령)

장군급 : 장군▶대장군▶상장군

 
2군6위 중앙군의 총 장교수는 상장군8명/대장군8명/장군49명/중랑장103명/낭장238명/별장246명/산원236명/교위987명/대정1947명이고, 여기에 현 군무원격인 장사6명(소령급)/녹사12명(대위급)을 포함해 총 3840여명 이였습니다.

각 계급별 통솔병력은 평균적으로

장군 1000명/중랑장 500명/낭장200명/별장200명/산원200명/교위50명/대정25명 정도입니다.

 또한 지방예비군인 주현,주진군의 장교수는 중랑장이하 3500여명이 있었습니다. 지방군의 장교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장교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이 지방호족들이 중랑장~대정까지 직책을 받고 있었지요. 하지만 직책상 중랑장이었지만 도병마사의 통제를 받았으며, 중앙군의 직책에는 미치지 못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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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병력수를 살펴볼까요!

● 중앙군(2군6위 = 45000명)

본시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대치하면서, 개경 주위에 중앙군을 육성하였는데요. 그수는 대략 44000여명쯤 되었습니다.

내군1천+중군3천(우천군1천+천무군1천+간천군1천)/좌군 2만(지천군1만+마군1만)/우군 2만(보천군1만+마군1만)

이중 내군과 중군3천은 2군의 뿌리가 되었으며, 좌,우군 4만은 6위의 뿌리가 되었지요.

 
고려초기에는 6위와 내군(장위부/위위시+천우위)만으로 이루워져 정규군45000명과 망군정인(예비 정규군 자원/1령당 600명) 27000명이 중앙군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거의 모두 직업군인으로 녹봉(?)을 지급받았습니다. 또한 세습이 가능했지요.

망군정인은 각지역에 징병기구인 42도부를 설치해, 세습군인의 자식이나 관료,군인들의 추천등을 받은자, 용력이 뛰어난자를 골라내, 중앙군에 결원이 생겼을 때에나, 증원이 필요할때 곧바로 징병할수 있도록 한 예비자원들이었습니다. 고려 때에는 참 군사적으로 체계화 되고, 세분화 되었던듯 싶네요. 중앙과 호족들의 절묘한 조화가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어 낼수 있었지요.

 
성종때에는 6위의 병력들을 동북면에 집중배치하면서, 교대로 국경과 황도를 수비하게 하였는데 자꾸 군영을 옮기다 보니, 전투력이 떨어지고 막대한 자금이 들어 최승로의 건의에 의해 중앙군과 지방군이 확실하게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명실상부하게 고려의 최정예 정규군으로 개경주변에서 주둔하게 되었지요.

 
목종과 현종때를 거치면서, 강력한 친위대의 필요성을 느껴 기존6위에서 병력을 가려뽑고, 내군(장위부/위위시등)의 병력을 보강시켜 2군을 창설합니다. 2군은 병력 3천으로 고려 최정예 국왕 친위부대였지요.

 이리하여 이의민 시절의 중앙군은 2군6위 체계가 확립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2군(응양군1000+용호군2000)

6위(좌우위13000+흥위위12000+신호위7000+금오위7000+천우위2000+감문위1000)

<중앙 수군의 존재는 해군의장대인 천우위 소속 1천명밖에 파악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태조 태봉의 해군장군일적에 1백명이 족히 승선할만한 배 100척을 건조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워,

상당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은 되지만, 통일후에도 유지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다만 강감찬의 대여진 정벌전에 동원된 수군이 2600명인것으로 미루워 2~3천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지방군(주진군+주현군)

-성종때 주현군은 총29만7278명이였습니다. 이때는 중앙군과 지방호족군이 혼재된 상태였지요.

주로 북계(패서지역/황해도)와 동계(함경도)에 주병력이 배치되었구요. 나머지 지역에는 도마다 1만정도만 배치되었습니다.

북계(22만 6035명)+동계(2만 3938명)+교주도(3,884명/현 강원도)+양광도(1만 1364명/현 충청도)+경상도(1만 3140명)+

전라도(1만 1104명)+서해도(5,804명/개경근처)+경기도(2,009명)= 계 29만 7278명

 
-이러덧 것이 최승로의 계책에 의해 중앙군과 지방군이 확실히 역활분담을 하면서, 지방군은 철저하게 지방호족들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지방 호족들에게는 자치권을 부여하고, 일정지역의 부역의 의무를 지운셈이죠. 지방호족들은 도령중랑장에 임명되어 평상시 지역치안 및 방어를 하다가 교대로 지역장병들을 징집해 전방 각진을 지켰지요.

도령중랑장은 정규군의 중랑장에는 격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참고로 고려초기에 동북계에 설치한 진이 대략 22개 였습니다.

 
북방민족의 침입을 경계해야 했던 동북계에 배치된 병력을 주진군이라 했으며

그수는 북계 10만3천명[초군+우군+좌군+보창4만 / 신기,보반2천 / 평민 농민군(백정 6만1천명)]

동계 1만3천명[초군+우군+좌군+영새군+특수군]

도합 11만6천명이 되겠습니다.

주진군의 사령관은 <북계병마사+동계병마사>로

→ 이의민 때에는 <서북면병마사+동북면병마사>로 주로 중앙에서 문관이 파견되었습니다.

 
기록에 당시 동계의 장교수는 780명이다 하니, 아마 도령중랑장은 20여명쯤 되었슬겁니다.(6주13현의 호족들)

또한 평균적으로 호족들이 이끄는 사병(노예+농민)의 수는 대략 2천명쯤 되었겠지요.

( 참고 : http://cafe.naver.com/goryeosa/204 )

 
또한 나머지 5도는 주현군이 편성되었습니다.

병력수는 총48237명(보승군8601명+정용군19754명+일품군19882명)으로 주로 지방 호족들이 교위와 대정 벼슬을 받고 통솔하였습니다. 비상시에는 각지역마다 중앙에서 고급장교들(장군~낭장)이 파견되어 지휘토록 되어 있었지요.


-이것으로 미루워 2군6위 주진,주현군이 정착된 이의민 시절에는 중앙군45000명+주진군11만명+주현군5만+예비중앙군3만으로

대략 23만정도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고려초중기 비상시절에 운용했던 30만의 광군이나 17만의 신기군은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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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황도 개경을 한번 살펴볼까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고려 황도 개성의 호수가 13만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13만이면 인구로 환산하면 대략 60만명쯤 되었겠네요. 둘레 63km(동서15km)의 공간에 60만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니 대단히 복잡한 도시였던듯 싶습니다.

 당시 개성은 궁성,황성,외성의 3겹의 구조였지요.

1.궁성 : 왕궁으로 태조 왕건이 궁예의 명으로 맨처음 터를 잡고 만들었지요. 문은 총 15개로 2번째 문인 신봉문이 가장 화려하다고 하네요. 정문은 33단의 계단을 올라가면 웅장하게 서있었다고 합니다.

2.황성 : 궁성 다음으로 쌓은 성으로 주로 관청이 들어 있었지요. 황성은 광종 때 황제국임을 천명하면서 축성하였습니다.

황성의 규모는 둘레 2600칸(1칸에 3m가량 되므로 대략 8000m 정사각형이라 간주하면 대략 가로세로 2 X 2km)
문은 20개였습니다.(문은 대략 400m마다 1개씩)

3.외성(나성) : 현종 때 강감찬의 주도하에 축성한 성으로, 거란침입에 대비코자 장정 23만 8,938명과 기술자 8,450명을 동원하여 20년동안 축성하였습니다. 무려 1만2천간(둘레 21km)이나 된다고 합니다. 성 둘레에는 큰 문 4개, 중간 문8개, 작은 문 13개를 설치하였고 성안은 도시를 5부 35방 344리로 구획하였습니다. 고려나성(외성)은 정사각형 중국식 황성과는 달리 주위 산악지형을 이용해 맞추워서 실용적이였지요.

여기에 고려말 수도방위를 목적으로 외성안에 내성을 새로 축성하였는데, 하늘에서 바라본 모양이 반달이라 하여 반월성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문은 총7개였는데, 현존하는것은 남대문 뿐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고려 개성은 4겹의 성으로 둘러쌓여진 요새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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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참고설명이 길었는데요, 다시 이의민으로 돌아가보면, 경주 안찰사의 추천으로 중앙군에 들어오게 된 이의민은 타고난 용력을 바탕으로 2군중에 최정예 부대인 견룡군에 들어간듯 싶습니다. 보통 무반가문의 자제만이 장교가 될수 있었으며, 뛰어난 용력을 지닌자가 왕의 눈에 들어 장교가 되기도 하였지요. 대표적인 자가 천출출신의 상장군 정중부가 되겠네요.

 평민이 직업군인이 되는 과정은 보통 크게 세가지인데,

첫째는, 앞에서 언급한 망이정군으로 선발돼 정규군에 편입되는 경우

둘째는, 선군을 통해 중앙군에 들어가는 경우

셋째는, 유력한자의 추천으로 정규군에 들어가는 경우가 되겠습니다.

망이정군이나 추천으로 정규군에 들어가는 경우는 어느정도 뒷줄이 있어야 가능하구요.

선군은 법적으로는 6품이하 관리의 자제부터 평민인 백정의 자제까지 모두 지원할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하사관학교정도 될까요.

장교들은 주로 문반,무반의 자제들로 대부분 대정(소위), 유력가문이면 교위(중위)부터 시작합니다.

대정이면 25명의 군졸을 거느릴수가 있지요.

반면에 선군을 통해 군에 들어가면 대정과 잡졸들 사이의 부사관 역활을 하게 됩니다.

이의민의 경우는 출신이 천출이였지만, 경주 안찰사의 추천으로 아마 부사관으로 임관하였다가, 점차 뛰어난 용력을 바탕으로

장교로 승진한듯 싶습니다. 이 배경에는 당시 야심을 품고있던 견룡행수 이의방의 존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견룡군은 용호군 소속의 부대로 왕을 호위하는 최정예 부대로 병력수는 1백명입니다. 견룡군의 대장은 산원(대위)로 견룡행수라 불리웠습니다. 견룡행수는 고위장성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였지요. 거의 유력가문의 자제들만이 거칠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무신난 당시에 견룡행수는 바로 이의방이였지요.

 -길어져 2편에 계속됩니다.-

-2편에는 이의방과 이의민과 관계/이의방의 가문/이의방의 야심등을 다뤄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