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11 21:34
정선이씨의 굴욕
 글쓴이 : 산나그네
조회 : 2,626  
   만물상.hwp (14.0K) [9] DATE : 2013-09-12 22:06:56
오늘자 조선일보 A34면 만물상 '사돈의 나라'에 박대통령이 베트남 호치민시에 갔을때
호치민 당서기장이 한국은 사돈의 나라 라고 한말에 대한 김태익 논설위원이 베트남 리 왕조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화산이씨는 지구상에 남이있는 유일한 리 왕조 후손이라고 한다. 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저는 그걸보는 순간 울분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한동안 치가 떨렸습니다.
조선일보에 반박자료와 정정보도를 요구하였습니다. 조선일보에서는 저의 내용을 접수하였고
답변을 한다고 하였으니 일단은 기다려 보겠습니다. 종친여러분 인터넷에 조선일보에 들어가서
만물상 사돈의 나라 라고 검색을 하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들 한번보시고 우리의 방향을
잘 정리하여야할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않지 않습니다.
두서없이 글을 올렸는데 양해바랍니다.
정선이씨종친회 부회장 이성조 올림.





만물상(사돈의나라)---김태익 논설위원-----내용입니다
 입력 : 2013.09.11 03:01 <조선일보>
베트남을 맨 처음 방문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승만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대통령은 베트남이 2차대전 후 건국하고 처음 맞는 외국 국가 원수이기도 했다. 55년 전인 1958년 11월 일이다. 이 대통령은 바쁜 일정 중 뜻밖에도 베트남 유교사상연구회 대표들의 예방을 받고 그들을 만났다. 우리 대통령이 어느 나라에 갔을 때 그곳 유교 관계자들이 만나러 찾아온 경우는 그 후 다시 없었을 것이다.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열다섯 나라 가운데 한국과 베트남은 유달리 문화적으로 가깝다. 베트남 사람도 이름을 한자 세 글자로 쓴다. 역사 문헌들을 한자로 편찬했고 지금도 공자묘(廟)의 자취를 갖고 있다. 옛날 우리 사신들이 중국에 갔을 때 안남(安南·베트남) 사신들과는 한시(漢詩)로 교류를 했다. 두 나라 사람은 기질도 비슷하다. 중동 사막이건 시베리아 눈밭이건 가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민족은 세계에 한국과 베트남 사람뿐이라는 말이 있다. 두 나라가 중국의 잦은 침략에 꿋꿋이 맞서 나라와 문화를 지켜온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13세기 베트남 리 왕조에서 왕권이 찬탈당하는 변란이 일어났다. 왕자 한 명이 배로 피란길에 나섰다가 표류해 황해도 화산에 상륙했다. 그는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했을 때 함께 싸운 공으로 임금으로부터 '화산 이씨' 성(姓)을 하사받았다. 지금 1800명쯤 되는 화산 이씨는 지구 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리 왕조후손이라고 한다.

▶베트남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한·베트남 FTA 내년 타결, 100억달러 원전 사업 협력에 합의했다. 쯔엉 떤 상 베트남 주석은 "진정한 친구가 왔다" "한국은 사돈의 나라"라고 했다. 한국에 시집온 결혼 이민자 중에 베트남 여성이 3만9000여명으로 가장 많다. 한국 신생아 100명 가운데 두 명이 베트남계다. 역사적 문화적 인연을 이어 온 두 나라 관계가 이제 혈연의 단계로 깊어지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 파병을 두고 연방 담배를 피우며 고민하자 육영수 여사가 대통령을 따라다니며 재떨이를 열 번 비웠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 베트남은 한국 기업이 1800개, 한국 교민 8만5000여명에 이르는 동남아 최대 재외국민 거주지다. "우리는 현명한 민족이다. 과거에 얽매여 미래를 포기할 수 없다." 1992년 한·베트남 수교 때 베트남 쪽 대표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돈은 가까우면서도 예를 갖추며 존경하고 배려하는 사이다. 서로 배울 게 많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이찬걸 13-09-12 13:57
답변 삭제  
추석을 며칠 앞두고 좋지 못한 글을 접합니다.
'만물상'이 그거 그런 물건을 전시하듯 이기자 저기자가 사내 논설위원입네하고 적당히 관련 자료들을 찾아 올리는 것이 아닐진대는...이 부회장의 울분이 이해가 갑니다.

 엊그제 조선일보를 끊긴했지만 ....모 차동차그룹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J회장이 외국 자동차 생산공장에 신차 출고 기념식에 갔다가 공장장에게 (우리가 말하는) 본네트
(bonnet)를 열어보라고 하니까 열지 못해 집으로 왔다는...겁니다.

 아마 김태익기자라는 분도 H사에 근무하셨다면 "집으로!" 가셔야 했지 않을 까 싶습니다.
꼭 역사가 아니라도 "사실"과 "객관"성을 중요시해야할 기자들이 한 번 만이라도 확인하고자 했다면 이런 실수로 다른이들의 가슴을 저리게는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고 해당지의 신뢰를 실추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감입니다!!
 지난 정부에선 베트남 주석이 오셨을 때 화산이씨 종친회장과 함께 우리 정선이씨 종친회장께서 공식적으로 청와대 초청을 받아 4자 다과회를 가졌습니다. 양국의 공식행사에서 말입니다.

 양국의 친선과 교류의 교두보로 화산이씨와 함께 그 보다 99년 일찍 도래한(판 후이레 교수 논문) 우리 정선이씨의 존재는 이제 양국이 인지된 사실입니다. ...
우리 가문이 지금 검찰총장을 배출한 집안도 아닌데 왜 우리를 슬프게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일보의 김기자님 만이 정세에 어두운 것인지.....누구의 원고를 그저 베껴 입력하신건지 ㅉㅉ

 걸핏하면 쳐 보는 인터넷에 몇 자만 두드려도 '화산이씨가 유일한 리왕조 후손'이니 뭐니하는 단호한 어조로 신문사의 망신살을 자처하기는  어려웠을터입니다........

 자 이제 이성조부회장님과 종중들의 분노는 다스려주시길 부탁드리며....자 이젠, 우리가 자성할 차례입니다. 이즈음하여 우리의 조소받을 만한 짓꺼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수차례 이런 아픔을 토대로하여 역사 심포지움을 하고자 했으나 좌절되었습니다. 이런 우리 역사의 홍보가 뒷전으로 밀리고 무시당한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종친회의 간부님들이 먼저 이런 치욕을 공분하지 않으면 이런 아픔은 더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년간 아니 수십년간 지속되어도 못 고칠 지 모르는 우리의 모습을 이기회에 되돌립시다!
아픈만큼 성숙해지기보다 아픈만큼 초라해져선 우리 선조들의 기상을 후손들이 져버리는 것입니다.

 이양혼시조는 리왕조 4대왕 건덕의 제3자로서(당시 해군 제독으로 계셨다고함: 현 주한 베트남 대사님 야사 인용언급)  왕권다툼으로(판후이레,유인선 자료등) 중국을 거쳐 고려로 오셨고, 그 후손들은 이국땅에서 양반신분을 획득하기 위한 악전고투를 하셨고, 이의민 선조에 이르러 무신정변에 참가하여 무소불위의 권력, 무려 7년간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거 절대 권력을 소유하였습니다. 이나라에 어느 도래 성씨가 이런 절대 권력자가 되어 보았다는 말입니까?
 우리 정선이씨는 무인으로서 더 그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 기질은 강직과 청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선조의 명성을 드높이지 못하는 후손들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현대사에 이름만 내세워도 세상사람들이 다아는 저명인사 몇 분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종친들입니다. 우리가 협력하면 다시 위대한 선조들의 업적을 기릴 수 있습니다.
주변과 조직을 돌아보지 않는 개인주의와 방관으로 종친회는 어영부영 벌써 제 3기 회장님을 새로 추대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주실 지도자를 추대합시다!
총회에 20명도 안되는 그런 인원이라면 이젠 종친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친목회가 나을겁니다.

 저는 화산이씨 종중들을 존경합니다. 우리의 반밖에 안되는 1800명 숫자로 70년대에 베트남을 찾았고 뿌리를 연구했습니다. 그분들은 몇몇분들의 희생으로 종친회를 세워놓았습니다.
그분들의 희생 정신과 열혈 종중애를 닮아갑시다.
이따금 내뺨을 한 대 후려 쳐 주는 김기자 같은 분들이 있어 고맙습니다. 자던 잠을 깰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분개하는 이성조 부회장님이 고맙습니다. 당신같은 분들이 위대한 후손이기에~

 더 이상 민망스러운 후손이 되지 않기 위하여~  10월5일 총회에서 뵙시다!(예정으로 알고 있음)
이번에 많이 나오셔서 좋은 종친회 계획을 토의합시다.
정선이씨의 굴욕이 아닌 전화위복의 추석으로 맞읍시다! 즐거운 한가위되세요~

족보편찬위원장 33세 이찬걸배상
산나그네 13-09-13 17:17
답변  
이성조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메일로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먼저 본의 아니게 정선이씨 종친회와 일가 친척 여러분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졸문을 쓰면서 관련 자료를 참고했는데 그 자료에 잘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행여라도 고의로 정선이씨의 명예를 훼손할 뜻은 전혀 없었음을 말씀 드립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정선이씨와 베트남 왕실의 관계를 바로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인터넷의 제가 쓴 글에서 해당 귀절을 수정하고 다음 번 한국에 살고 있는 베트남 왕족 후손 관련 글을 쓸 때 꼭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댁내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김태익 드림
김포정인 13-09-15 06:29
답변 삭제  
다음 글을 참고하시면 어떨까요?



정사(正史)와 정사(正史)가 아닌 것의 차이



 대월 이왕조의 후손이라는 화산이씨의 족보인 화산이씨세보(花山李氏世譜)에 수록된 화산군본전(花山君本傳)을 읽다보면 그 내용이 정사(正史)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정사와 다른 점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壬子(紹興二年)十二月王薨在位六十年子陽煥立(皇祖)
    癸丑(紹興三年)王卽祚之五年丁巳十二月薨在位五年
    王第九子冠城侯天佐天佐之孫副檢公龍高龍高之子平海公君苾
    宋理宗寶慶中避亂浮海來投洪州其曾孫乾文始封新平府院君
    爲新平李氏先

    임자년(1132년) 12월 왕(인종)이 별세하니 재위한 기간이 60년이다. 
    아들 양환이 즉위하였다.(황제의 조부이다.)
    계축년(1133년) 왕(신종)이 즉위하고 정사년(1137) 12월 별세하니, 재위한 기간은 5년이다.
    왕의 아홉 번째 아들은 관성후 천좌이고, 천좌의 손자는 부검공
    용고이며, 용고의 아들은 평해공 군필이다,
    송나라 이종 보경 연간에 군필이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홍주에 와서
    살았는데, 증손 건문이 비로소 신평부원군에 봉해지니,
    신평이씨의 선조가 된다.』(화산군본전)

현재 베트남에서 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는 역사서는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이다. 한문으로 된 편년체(編年體)의 역사서로, 여왕조(黎王朝) 성종의 명으로 오사련(吳仕連)이 그전에 편찬된 사료를 참조하여 이를 개정 증보하고, 편목(編目)을 바꾸어 대월사기전서 15권으로 완성하였다. 1697년 판각된 대월사기전서는 정왕조(丁王朝) 이전의 역사인 외기전서(外紀全書) 5권과, 이후의 역사를 다룬 본기전서(本紀全書) 10권으로 이루어져있다. 베트남에서 역사 기록을 전담하는 일은 진왕조(陳王朝) 시대에 생겨났다. 쩐 딴은 월지(越志)라는 역사서를 썼는데, 이는 1272년 유명한 역사가인 여문휴(黎文休,레 반 흐우)가 조타(찌에우 다) 시대에서부터 이왕조시대까지의 역사를 30개의 장으로 정리한 대월사기(大越史記)라는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월지와 마찬가지로 현전하지 않는 대월사기는 대월사기전서의 저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진왕조(陳王朝) 태종(太宗)이 명하여, 전설로 전하는 베트남의 여명기부터 이왕조(李王朝)까지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272년 진왕조(陳王朝) 성종(聖宗) 때 완성된 대월사기이다. 진왕조 때 편찬된 역사서는 이 외에 호 똔 톡(호종작,胡宗鷟)의 월사강목(越史綱目)과 남월세지(南越世志)가 있었지만 역시 전하지 않는다. 이들 모두 몽고와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진왕조 때 이루어진 역사서임을 감안하면, 비록 레 딱(여측,黎崱)이 원의 군대를 위하여 안남지략(安南志略)이라는 베트남 안내서를 써 준 오점이 있었지만, 대몽전쟁 승리 후 한층 고무된 베트남의 민족의식을 느낄 수 있다. 대월사기전서는 이들 역사서 덕분에 탄생한 베트남 정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대월사기전서에 의하면 이왕조 4대 황제 인종이 영면한 때는 1127년  12월로 황수 63세에 재위기간은 56년간이었다. 반면 화산군본전은 1132년 영면하여 60년간 재위한 것으로 적고 있다. 또한 인종을 이은 신종 양환은 1137년 12월, 5년의 재임 끝에 별세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대월사기전서는 신종 양환이 12살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으며, 11년의 재위기간을 뒤로 하고, 1138년 9월, 2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적고 있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화산군본전이 송사(宋史)를 그대로 인용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인종의 사망과 신종 양환의 등극을 두고 대월사기전서와 송사 사이에 5년의 편차가 생긴 것은 신종 양환의 등극에 모종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화산군본전의 잘못을 논할 수는 없다. 문제는 다음 사항에 있다.

신종 양환은 황수 16세 때인 1132년 5월 맏아들 천록을 보았는데, 신종의 뒤를 이은 이는 4년 뒤인 1136년 4월에 태어난 천조였다. 천조가 적황후 여씨의 소생이기 때문이었다. 신종은 선황제들과 달리 1명의 황후만 두었다. 그런데 화산군본전은 느닷없이 신종의 9번째 아들 천좌를 소개하고 있다. 대월사기전서는 4년 후 적장자 천조가 태어날 때까지 어떠한 황자의 생산 소식도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종의 9번째 아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신종 양환은 어려서 죽은 그의 친제(親弟)들처럼 잦은 병치레를 하였다. 황태후가 신종의 병 치료를 위해 천하의 명의를 구한 이야기가 설화로 남을 정도였다. 그러니 천록이 태어난 4년 후 천조가 태어난 것은 오히려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천록의 등극을 기정사실로 믿고 있던 천록의 친모가 천조의 등장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민 일은 천조의 탄생이 얼마나 극적이었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천조의 탄생은 천하의 명의(名醫) 승려 명공(明空)의 치료 덕분에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한 명의 황자가 더 탄생하였다. 그리고 바로 신종 양환이 영면하고, 영종 천조가 3살의 어린 나이로 구전에서 제위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에 9번째 아들이라니 어불성설이다. 

신종의 9번째 아들 천좌를 소개한 것도 놀랍지만, 천좌의 6대손 건문이 신평이씨(新平李氏)의 선조라고 한 사실은 더욱 놀랍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에 의하면 신평이씨(新平李氏)의 시조는 이덕명(李德明)이라는 사람이다. 시호가 문간(文簡)으로, 고려에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신평이씨의 세보 무오보(戊午譜)에 따르면, 초조(初祖)는 이인수(李仁壽)로서 백제 때 신평호장(新平戶長)을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아우가 둘이 있었는데 이주(李珠)는 백제의 공신으로 신평공(新平公)에 봉해졌으며 이석덕(李碩德)은 신라의 아찬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또 다른 족보 기해보(己亥譜) 서문에는 신평이씨는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관적(貫籍)을 신평(新平)으로 하여 자손들이 번성하였다고 적혀 있다. 또 진무공신(振武功臣) 신양군(新陽君) 이원로(李元老)의 묘갈명(墓碣銘)에는 이덕명(李德明)을 원조(遠祖)로 삼고 사재시령(司宰寺令)을 지낸 이덕배(李德培)를 중조로 한다는 구절을 전하고 있다. 신평이씨의 상계 인물로 7세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있다. 이첨은 신평이씨를 현족(顯族)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인물로서 고려 공민왕 대에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하여 직제학(直提學) 대사성(大司成) 예조판서(禮曹判書) 좌대언(左代言)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이조전서(吏曹典書) 대사성(大司成)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 의병삼군부사(義兵三軍府事)를 거쳐 의정부사(議政府事) 등에 올랐다. 또한 하륜(河崙)·권근(權近) 등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는 등 문장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이러한 신평이씨(新平李氏) 족보 어디에서도 천좌~용고~군필~건문으로 이어지는 가문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화산이씨의 용상과 함께 고려로 온 군필 임을 생각해 볼 때, 서기 2000년 현재 용상을 중시조로 하는 화산 이씨의 총인구가 2,000명이 안 되는 것에 비해 신평이씨의 그것은 35,000명이 넘는다는 사실은 신평이씨와 건문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용상과 동행한 군필의 후손의 수가 용상의 후손의 그것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은 신평이씨가 군필의 고려도착 훨씬 전에 이 땅에 존재하던 성씨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필의 신평이씨는 충청도 당진을 근거로 하는 신평이씨와는 다른 씨족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후술되겠지만 신평(新平)은 황해도에도 존재한다. 아마도 군필의 신평(新平)은 이곳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황해도 신평이씨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혹 당진 신평이씨의 후손들이 신평이씨가 베트남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대경실색할지도 모른다.
 
2, 『丙申(淳熙三年)五月王薨在位三十九年子龍翰立(君之兄)
    丁酉(淳熙四年)王以嗣子幼冲而王之弟賢而有德
    常慾封王世弟而禪其位以及於孺子王
    矣及寢疾顧命其弟曰
    君以延陵之賢久處周公位寡兄百世後慾傳位於君
    君涕稽首固辭曰
    寧爲斷髮文身逃避荊蠻不敢奉敎王不得巳止
    時紹聖公主適陳日照日照者閩人也
    仍時得政方見柄用

    丙申년(1176) 5월에 왕(영종)이 별세하니, 아들 용한이 즉위하였다.
    (화산군의 형이다.)
    정유년(1177) 왕은 세자가 어리고 왕의 아우가 어질고 덕이
    있다 하여, 항상 아우를 왕세제에 책봉하고, 자신의 왕위를 선양하여  유자왕에 미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병이 위독하자 아우를 돌아보고 명하기를,
    “그대는 연릉군의 어짐을 가지고서 오랫동안 주공의 지위에 있었으니,
    과형이 죽은 뒤에 군에게 전위하고자 한다.” 하였다.
    (화산)군이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한사코 사양하기를,
    “차라리 머리를 깎고, 몸에 문신을 하고서, 남쪽 오랑캐 지방으로
    도망갈지언정 감히 분부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부득이
    중지하였다.
    이때 소성공주가 진일조에게 시집가니, 진일조는 민땅의 사람이다.
    진일조는 정권을 얻어서, 자기 마음대로 전횡하였다.』(화산군본전)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영종 천조는 재위 38년만인 1175년 황수 40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세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영종치세는 어머니 여태후와 사통한 두영무의 전횡으로 더럽혀졌다. 영종은 재위 14년째이고 황수 16세인 1151년 11월 첫 번째 아들을 보았다. 바로 용창이다. 적장자였다. 용창은 태어나자 바로 현충왕에 책봉되었다. 이듬해엔 백대왕이 탄생했으나 바로 사망하였다. 이후 3명의 황자가 태어났지만 건강왕(建康王) 용익(龍益)외 다른 2명에 대한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다. 영종의 6번째 아들이 태어난 때는 재위 35년째이고 황수 38세인 1173년 5월이다. 그가 바로 용한(龍翰)이다. 영종은 용한이 태어난 2년 뒤인 1175년 7월 그의 아버지 신종처럼 40의 나이로 영면에 들어섰다. 영종이 병을 얻은 것은 황태자 용창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1174년 9월, 23살의 황태자 용창이 아버지 영종의 궁비를 살해하였다. 영종은 사건 발생 후 즉각 용창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내리고 서인으로 유폐시켰다. 어머니 여태후와 두영무의 사통을 수치로 여겼던 영종은 같은 일이 자신의 아들에게서 반복되니 여간 상심이 큰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를 내렸지만 끝내 마음의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10달이 못되어 붕어하였다. 용창의 폐위 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암투가 있었다. 이 암투의 승리자는 영종의 충직한 신하 소헌성의 지원을 얻은 여섯 번째 아들 용한의 친모인 두태후였다. 그리하여 대월 이왕조는 영종에 이어 또 다시 3살 아기 황제의 치하에 들게 되었다. 이이가 바로 대월 이왕조 7대 황제 고종 용한이요, 1175년 7월 선왕 영종의 구전(柩前,장례식장)에서 즉위가 이루어졌다.

화산군본전은 그들의 중시조인 용상을 대월 이왕조 7대 황제 고종 용한의 동생이라고 적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 정황상 용한의 동생이 태어났을 확률은 극히 낮지만 굳이 따진다면, 용상은 용한이 태어난 1173년 5월과 영종이 붕어한 1175년 7월 사이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용상은 1174년생이다. 화산군본전은 1177년 고종이 자신의 아들이 어리고 친동생 용상이 어질고 덕이 있어 왕세제에 책봉하여 자신의 뒤를 잇게 하는 마음을 먹었다고 적고 있다. 1177년이면 고종이 5살, 고종의 동생이라는 용상은 4살에 불과한 때다. 이 나이에 고종의 아들은 무엇이며, 어질고 덕이 있는 동생은 무엇인가? 게다가 선위까지 생각하였다니, 화산군본전 작가의 생각이 궤도를 이탈했음이 분명하다. 
     
3, 『壬申(嘉定五年)五月王薨在位三十六年孺子昊旵立
    癸酉(嘉定六年)孺子王初立以叔父及平海公君苾與陳日照並爲三公
    委以國政卽先王之遺敎也
    尊叔父號皇叔
    時主少國疑王之姊紹聖公主居中用事日照亦以先朝贅婿專作威福操弄國命
    皇叔痛國事之日非而知宗社之將亡謀於平海公曰
    殷之微子三仁之一而國之元子謀存宗社抱器而去
    今日之國勢卽古微子之殷也
    遂與君苾抱祭器東出

    임신년(1212) 5월 왕(고종)이 별세하니, 재위한 기간은 36년이고,
    유자 호참이 즉위하였다.
    계유년(1213) 유자왕(혜종)이 처음 즉위하자, 숙부(화산군)와 평해공
    군필, 진일조를 함께 삼공으로 삼아 국정을 위임하니, 이는 바로 선왕의
    유조였다.
    왕은 숙부를 높여 황숙이라 칭하였다.
    이때 군주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니,
    왕의 누님인 소성공주가 궁중에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하며,
    진일조 또한 선왕조의 사위로 마음대로 상벌을 시행하여,
    국가의 운명을 희롱하였다.
    황숙(화산군)은 국가의 일이 날로 잘못됨을 애통해하고 종묘사직이
    장차 망할 줄을 알고는 평해공에게 상의하기를,
    “은나라의 미자는 삼인 중의 한 분인데, 은나라의 원자로서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기 위해서 제기를 안고 떠나갔으니,
    오늘날 우리 국세는 옛날 미자의 은나라 때와 같다.” 하고는
    마침내 군필과 함께 제기를 안고 동쪽으로 나왔다.』(화산군본전)

대월사기전서는 선왕 영종의 유지에 따라 충신 소헌성(蘇憲誠)이 3살의 어린 황제 고종 용한을 가슴에 품고 섭정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소헌성의 섭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섭정 5년만인 1179년 6월 소헌성이 병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두안이(杜安㶊)가 소헌성의 뒤를 이어 8살의 황제를 대신한 섭정에 나섰다. 두안이는 소헌성이 바라던 인물이 아니었다. 두안이는 황제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누님인 두황태후를 등에 업고 간계를 부려, 소헌성이 원하던 간의대부 진충좌(陳忠佐)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였다. 두안이의 섭정은 고종 재위 14년째이고 황수 16세인 1188년 7월까지 9년간 이어졌다. 병사한 두안이를 이은 이는 태부 오이신(吳履信)이었다. 고종은 두안이가 사망한 이후에는 유람으로 세월을 보냈다. 황제가 정치를 손에서 놓고 유흥으로 세상을 낚으니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그나마 충신인 오이신 대까지는 정치가 그럭저럭 유지되었지만, 1190년 7월 그가 병사하자 정치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천하의 간신 담이몽(譚以蒙)이 오이신을 이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담이몽은 유흥에 빠져버린 고종을 부추겼다. 부추길수록 자신의 전권이 확대되기 때문이었다. 너무 유흥에 빠져서 그랬는지 고종은 황수 22세가 될 때까지 후사를 얻지 못했다. 고종의 첫 아들이 태어난 때는 재위 20년째인 1194년 7월이었다. 8년 전에 입궁한 안전원비(安全元妃) 담(譚)씨에게서 생산되었다. 안전원비는 곧바로 안전황후(安全皇后)로 격상되었다. 담이몽은 황태자 책봉 기념으로 전국의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비단 1필씩을 내리는 요란을 떨었다. 황태자란 다름 아닌 화산군본전이 이야기하는 호참(昊旵)이 아닌 참(旵)을 말한다.

참이 황태자에 책봉되자, 담이몽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담이몽의 권세가 높아질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갔다. 담이몽이 관련된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를 참지 못한 반란이 속출하였다. 여기에 홍수에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의 고통을 이루다 말 못할 지경에 이를 즈음인 1208년 1월 예안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군사(軍事) 범유(范猷)가 일어난 것이다. 범유의 기세는 이웃지역으로 넓혀졌고, 관망하던 담이몽은 이듬해 1월 환관 범병이(范秉彛)를 사령관으로 하는 토벌대를 파견하였다. 범병이는 실력을 발휘하여 범유의 군사들을 타도하고, 7월 탕롱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개선한 범병이가 체포되었다. 패퇴한 범유가 탕롱의 인사를 매수하여 범병이가 범유의 도주를 눈감아 주었다고 무고한 결과였다. 범병이가 체포되자, 이번에는 범병이의 수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고종은 궁으로 밀려오는 범병이의 군사들을 따돌리고 몸을 피했다. 범병이를 감옥에서 불러내어 죽이고, 그 시신을 마차 옆 자리에 앉혀, 범병이 군사들의 눈을 속여 겨우 탈출하였다.

탕롱은 곧 범병이 수하들의 수중에 떨어졌고, 범병이 수하들은 고종의 둘째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고 그로부터 책봉을 받아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다. 둘째 아들이란 1201년 8월에 태어난 7살짜리 황자 침(忱)을 말한다. 이 정부에는 놀랍게도 대공신관(戴拱辰冠)이란 모자를 쓰고 다니며 황제노릇을 하던 태보 담이몽이 껴 있었다. 참으로 재빠른 변신이었다. 한편 쫓겨난 고종은 동보두(東步頭)로 갔다. 황수 37세의 황제 고종은 귀화강(歸化江)을 따라 내려가 대산(隊山)에 머물렀으나, 그가 있는 곳의 관고(官庫)가 털리는 등 백성들로부터도 외면당하는 굴욕을 맛보아야했다.

고종이 역전을 맞이한 것은 해읍(海邑)의 유가촌(劉家村)으로 피난한 황태자 참 덕분이었다. 참은 그곳의 유력한 호족 진리(陳李)의 집에 머물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진씨 집안은 해상무역을 업으로 하는 호족으로 중국 천주시절부터 맺은 이왕조와의 인연이 있었다. 황태자 참이 이곳으로 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진리는 이왕조를 위해 힘이 돼 주었다. 황태자 참은 진리의 딸과 혼인하여 한 가족이 되었다. 한 가족이 된 진리는 군대를 일으켜 탕롱으로 진격했다. 곧 탕롱이 수복되었고 고종도 돌아왔다. 1210년 3월 진리의 처남 소충사의 집에 머물고 있던 황태자 참도 탕롱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황태자 참이 귀경한 지 7개월도 못되어 운명했다. 1210년 10월, 재위 36년 황수 38세의 고종 용한이 병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것이다. 1212년 5월에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화산군본전과는 사망일시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이렇게 크게 다른 것이다.

황태자 참은 황수 16세에 고종의 구전에서 즉위하였다. 바로 대월 이왕조 8대 황제 혜종이다. 제위에 오른 혜종 참은 곧 새로운 실세인 진씨 가문과 외척세력을 포함한 종실세력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휩싸였다. 혜종이 피난 시 혼인한 진씨 부인의 책봉을 놓고 벌인 싸움이었다. 특히 황태후의 반대가 심하였다. 혜종이 독살을 염려할 정도였다. 반면 진씨 부인의 오빠인 진사경(陳嗣慶)은 혜종에게 자신이 실세임을 공표해 달라고 압력을 넣었다. 양쪽의 압력에 이리저리 치이던 혜종은 급기야 진씨 부인을 데리고 구연주로 도망가기에 이르렀다. 구연주에서 혜종 참의 첫째 딸이 태어났다. 1216년 6월, 황수 21세 재위 6년째의 일이었다. 순천공주(順天公主)로 봉해졌다. 순천공주가 태어나자 혜종의 생각이 달라졌다. 진씨 부인을 황후로 책봉하고, 진사경을 태위로 삼았으며, 진사경의 형 진승(陳承)을 내시판수로 삼았다. 이로써 진씨 형제가 문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217년 불행이도 혜종 참이 그 동안의 정신적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앵질(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듬해  9월 혜종 참의 두 번째 딸인 소성공주(紹聖公主)가 태어났지만, 혜종의 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혜종의 와병과 더불어 이왕조의 조정은 전적으로 진씨 형제의 수중에 있게 되었다. 진씨 형제는 혜종에게 아들이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왕조찬탈에 나섰다. 1222년 먼저 혜종의 첫째 딸 순천공주와 진승의 첫째 아들 진류(陳柳)를 혼인시켰다. 그리고는 전국을 21로(路)로 재편한 다음, 이중 일부를 공주의 관할로 만들었다. 합법적인 영토분할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의 영토분할 후 진사경이 사망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진승은 황제 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천하의 명의를 구한다는 수선을 떤 다음 마지막 수순을 밟았다. 치료불가의 혜종이니, 둘째 딸 소성공주에게 선양하는 것이 옳다는 여론 몰이에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순천공주의 로(路)를 대리해서 관리 하던 진승의 사촌동생 진수도(陳守度)가 앞장섰다. 1224년 12월 마침내 혜종이 자신의 둘째 딸 소성공주에게 황제자리를 넘겼다. 이이가 바로 대월 이왕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베트남 최초의 여황제인 소황(昭皇)이다. 거창한 타이틀과 어울리지 않게 소황은 7살짜리 어린 소녀였다. 이제 남은 일은 소황을 진씨 집안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 뿐이었다. 상대는 진승의 둘째 아들 진경(陳㷡)이었다. 1225년 10월 소황과 진경의 혼인이 이루어지고, 12월 21일 소황이 진경에게 선양함으로써 대월 이왕조의 영토는 진왕조의 영토로 완전히 변경되었다.

이상과 같이 대월사기전서에는 화산군은 물론 화산군본전에 등장하는 평해공 군필 그리고 소성공주의 남편 진일조 등 삼공(三公)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다. 더구나 혜종 참의 누나라고 소개한 소성공주는 혜종 참의 둘째 딸이고, 소성공주의 남편은 진일조가 아니라 결혼할 당시 8살에 불과한 유소년 진경이었다. 따라서 화산군본전은 소성공주의 남편을 진일조라 소개한 ‘송사열전(宋史列傳)’을 참고로 하여 저술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송사열전에도 없는 화산군과 군필을 들먹이고, 은나라의 미자(微子)를 운운 하면서, 그 미자(微子)처럼 제기를 가슴에 품고 망명하였다 하여 용상에게 소미자(小微子)의 호를 붙여준 화산군본전의 집필자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 같은 진술하였는지 답답할 뿐이다.
 
4, 『先是高宗夢有一大鳥自南以來翔于西海之濱
    覺而異之使人旁求卽安南王子也
    王聞之歎曰
    嗚呼獘邑亦以夢賊之孔熾播越海島不遑啓處豈有餘波之及人
    哉具不穀之子若孫異日若有如彼之患則何異於今日之公子乎 ·······
    仍其故國花山(安南亦有花山故云)
    食采之地名特封於本縣之花山僞君
    君益歎身世而庾信自比而往往從布衣野老逍遙
    於富良江之大安洞及落來隗也
    惟玆瓮遷地粤自三韓以來邑弊民殘卽沿海之一小縣也
    與中州登萊及日本只隔一隅之海
    自麗初纍被其害知縣亦多戰歿矣
    麗王之四十年癸丑卽寶禑元年也
    秋七月蒙王也窟松柱諸王率兵一萬由東丹國渡混同江
    八月遂攔入西海先破安陵山城中死者七百人
    又率戰艦由沿邊邑直向瓮津先陷大小靑及昌麟島斬
    其守將軍民在鎭者盡抗之以爲直指沁都之計而如蹈無人之境
    其鋒銳無人可摧者
    時知縣挫於賊勢未遑杆禦而危急方在朝夕 ·······

    蒙人曰此城以小賊大天所佑非人力
    潛生譎計曰
    兩陳相對物幣相交兵家之常禮也
    頭目五人各執黃金一函請獻土産而降
    皇叔與知縣高築受降壇於郡後光大之山
    大陳兵威於花山之館以軍禮受降之際 ·······

    是松柱等卷甲班馬束手喪氣而爭走
    皇叔先勤精兵伏於路側爲奇陳張
    左右翼來擊之衆皆蹴躍大呼
    競進鼓噪之聲震動山海
    斬其數將而俘獲者凡數十百人
    我軍士女且舞且歌曰
    受降城外月如霜破虜曾經馬伏波之句而一境自此以安
    時則癸丑冬十二月日也

    이에 앞서 고려의 고종은 큰 새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와, 서해의
    물가에서 빙빙 도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고는 기이하게 여긴 나머지, 사람으로 하여금 널리 찾아보게
    하니, 바로 안남국의 왕자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아, 우리나라도 적국인 몽고가 매우 강성하여 바다 가운데 있는
    섬(강화도)으로 피천해서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으니,
    어찌 남에게 은택이 미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 불초의 아들과 손자가 후일 만약 저와 같은 환란을
    겪는다면 어찌 오늘의 공자와 다르겠는가.” ·······

    그의 고국에서 화산을 읍으로 삼음으로 인하여(안남국에도
    화산이 있으므로 말한 것임), 특별히 그 지명을 채택하여 본 현의
    지역에 내리고, 그를 화산군으로 삼았다.
    군(화산군)은 더욱 신세를 한탄하며 스스로 김유신에게 비유하고,
    왕왕 선비들과 촌로들을 따라 부량강의 대안동과 낙래외에서
    한가로이 거닐곤 하였다.
    이 옹천 땅은 삼한이래로 고을이 피폐하고 백성이 가난하니,
    바로 바닷가의 한 작은 현이었다.
    중국의 산동지방인 등주·내주와 일본과는 다만 바다의 한 귀퉁이가
    트여 있어, 고려 초기부터 이웃나라에서 침공하는 폐해를 여러 번
    입었으며, 지현도 그들과 싸우다가 죽은 자가 많았다.
    고려 고종 40년인 계축년(1253년)은 바로 남송 이종의 보우 원년이다.
    가을 7월에 몽고 왕 야굴과 송주 등 여러 왕이 일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동단국을 경유하여 혼동강을 건너 와서,
    8월에 마침내 서해로 몰려와 먼저 안릉산성을 격파하니,
    성 안에 죽은 자가 7백여 명이었다.
    또 다시 전함을 거느리고 연변의 고을을 따라 곧바로 옹진을 향하였는데,
    먼저 대청도와 소청도 및 창린도를 함락하고, 이곳을 지키는 장수를
    목 베었으며, 진영에 있는 군사와 백성을 묻어 죽였다.
    이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곧바로 강화도로 향할 계획을 세웠는데,
    무인지경을 쳐들어 오 듯 하니 그 예봉을 꺾을 자가 없었다.
    이 때 지현은 적의 기세에 꺾여서 적을 막을 겨를이 없으니
    위급함이 조석에 있었다. ·······

    몽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성이 소수의 병력으로 큰 군대를 대적하니, 하늘이 돕는 것이요,
    사람의 힘이 아니다.” 하고는 몰래 속임수를 쓰기를,
    “두 진영이 서로 대치하여 싸울 때 물건과 폐백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
    병가의 떳떳한 예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두목 다섯 명이 각각 황금으로 만든 금함 한 개씩을 들고
    토산물을 올리며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황숙은 지현과 함께 고을 뒤 광대산에 수항단을 높이 쌓고,
    화산관에 군대를 크게 진열하여 위엄을 보인 다음 군례로써 항복을
    받았다. ······· 
 
    이에 송주 등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말을 돌려 속수무책으로
    기가 꺾여 다투어 달아났다.
    황숙은 미리 정예병을 무장하여 길가에 매복시켜서 기습 진영을
    만들어 놓았다가 좌우익을 펼쳐 협공하였다.
    군사들이 모두 기뻐 날뛰면서 크게 고함치며 다투어 진격하니,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산과 바다에 진동하였다.
    몽고의 몇몇 장군을 목 베었으며, 사로잡은 자가 모두 수백 명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들은 남녀노소가 어울려 춤을 추며 노래하기를,
    “수항성 밖의 달은 서리 빛과 같은데, 오랑캐를 격파하니,
    일찍이 마복파(馬伏波)와 같다.” 하였다.
    그리하여 온 경내가 이로부터 편안하니,
    이때는 계축년(1253년) 겨울 12월 모(某)일이었다.』(화산군본전)

화산군이 고려에 왔음으로 이제 고려에서의 활동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당연히 고려의 정사(正史)인 고려사(高麗史)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고려사에는 1253년의 일이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1253년은 몽고의 5번째 고려침략이 있었던 해이다. 몽고 정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철수하였던 4차 원정 후 몽고는 내부 갈등을 수습하고 몽케(몽가,夢哥)가 황제 헌종이 되자, 최우의 뒤를 이어 최항이 집권하고 있는 고려에 국왕의 친조와 출륙을 또 다시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최항은 강화도 건너편에 새 궁궐을 지어 출륙할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몽고는 약속이 이행되는 가를 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최항은 약속확인 차 보낸 사신임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 고종 대신 신안공 전으로 하여금 강화도를 나와 사신을 맞도록 하였다. 본국으로 귀환한 사신은 고려의 거짓을 고했고, 이로 인해 1253년 7월 몽고의 다섯 번째 고려 원정이 시작되었다.

야굴(也窟,야고,也古,헌종의 숙부)을 사령관으로 하는 몽고의 고려원정군은 동해안과 서해안 두 경로를 따라 남하하였다. 첫 번째 전투가 8월 12일 황해도 안악(安岳)의 양산성(椋山城) 전투였다. 전투 결과, 성이 함락되고 방호별감 권세후(權世侯) 이하 4,700여 명이 전멸하고 말았다. 양산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벼랑과 같았고 사람과 말이 겨우 통행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만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 그러나 권세후는 지형의 험준함을 믿고 몽고군을 방비할 대책을 세우는 데 소홀하였다. 이후 몽고군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여러 성들을 거침없이 도륙했다. 그러나 몽고는 남한산성 전투에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1232년 이세화(李世華)가 몽고군을 격퇴한 이래 남한산성은 몽고군이 애를 먹는 지역이 되었다. 8월 27일 강원도 철원의 동주산성이 몽고의 공격에 분전하였으나, 방호별감 백돈명과 백성들의 불화로 끝내 점령당하고 만다. 9월에는 강원도 춘천에서 봉의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춘주(春州,춘천) 안찰사(按察使) 박천기(朴天器)가 몽고의 군대를 맞아 15일간 분전했으나 역부족으로 끝내 봉의산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몽고군은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한 후 목책(木柵)을 2중으로 세우고 참호를 한 길이 넘게 파놓고는 며칠 동안 계속 공격을 가했다. 성 안의 우물과 샘이 모두 말라서 마소를 잡아 피를 마셨으며, 군사들도 극도로 지쳐버렸다. 안찰사 박천기(朴天器)는 더 이상 대처할 방도가 없고 힘이 다하자 먼저 성 안의 재물과 곡식을 불태운 후 결사대와 함께 목책(木柵)을 부수고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나 참호에 부딪쳐 한 사람도 탈출하지 못했으며 끝내 성도 무참히 짓밟혔다. 강원도의 삼각산성 또한 몽고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리나 등주(登州,지금의 강원도 안변군)의 학성산성(鶴城山城)은 몽고의 공격을 잘 이겨냈다. 등주를 철수한 몽고군은 10월 강원도 통천의 금양성(金壤城)으로 몰려들었다. 금양성이 공방을 이어 가는 가운데, 경기도 양평의 양근성(楊根城)에서는 방호별감 윤춘(尹椿)이 군민(軍民)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함으로써 전투를 마감하였다. 이어 벌어진 황려(黃驪,경기도 여주시)의 천룡산성(天龍山城) 공방에서도 현령 정신단(鄭臣旦)과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이 성 밖으로 나가 항복했다. 그리고 양주(襄州,강원도 양양군)의 권금성(權金城)도 함락되었다. 반면 강원도 원주성을 지킨 방호별감 정지인은 몽고의 공격을 끝내 방어하였다. 특히 난공불락의 장수란 별칭을 얻은 충주산성의 김윤후(金允侯)는 70여 일간의 싸움 끝에 방어에 성공하였다. 김윤후는 1232년 몽고의 2차 고려원정 때 처인성(용인)에서 원정군 사령관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몽고군의 철수를 이끌어낸 부곡민 출신 승려이다. 이러한 맹장의 지휘아래 충주성민들은 결사항전을 외쳤다. 김윤후(金允侯)는 노비문서를 불태우며 하층민들의 결집을 유도했다. 그러자 하층민들이 대거 몽고항전에 참여하면서 결국 몽고의 대군을 70여 일간 막아낸 것이다. 충주에서 거센 저항을 받는 동안 몽고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총사령관 야굴이 평소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탑찰사 진영을 습격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즉시 몽고 황제 보고되었고, 야굴은 황제로부터 소환장을 받게 되었다. 기병 1천 명을 데리고 귀환하는 야굴은 부장인 아모간(阿母侃)과 고려의 역적 홍복원(洪福源)에게 충주성 함락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야굴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두 부장들은 12월 중순 결국 충주성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5차 원정 동안 몽고군은 공성전(攻城戰)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평지의 무고한 백성들을 사로잡아 도륙을 내는 관계로 고려는 더욱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고려는 야굴이 보낸 사신을 고종이 강화도 건너편 승천부의 궁궐에 나와 맞이하고, 고종의 둘째 아들 안경공 창을 몽고에 보냄으로써 몽고의 5차 공격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이에 이듬해 정월 몽고군이 돌아갔다. 그러나 몽고는 실권자 최항이 굴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7월 제6차 고려원정에 나섰고, 고려는 몽고 침략 이후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상과 같이 고려사에는 1253년의 몽고침략과 이에 대항한 고려의 응전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그러나 고려사 어디에서도 이용상의 대몽항쟁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고려 고종이 꿈을 꾸었을 정도이고 화산군에까지 봉해진 인사가 몽고군을 상대로 항복을 받는 등 혁혁한 전과를 세웠는데, 기록이 없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난감할 뿐이다. 더욱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몽고함대의 공격사실까지 기재하였으니 더욱 안타깝다. 고려에서의 몽고군의 해전(海戰)은 3년 뒤인 몽고군의 제7차 고려원정 중에 처음 시도되었는데, 고려 조정이 은신하고 있는 강화도 공략을 염두에 둔 전라도 신안의 압해도(押海島)공격 때의 일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고려인의 도움을 받았고, 압해도 주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로 끝났다. 학자들도 이 점을 들어 화산군본전에 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고종이 하사하였다고 주장하는 수항문(受降門)이라는 편액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기록에 이용상이 식읍으로 하사받았다고 하는 화산에 이용상의 호를 딴 미자동(微子洞)을 비롯하여, 부량강(富良江), 교지리(交趾里), 정해리(精海里), 일남리(日南里), 대안동(大安洞) 등 대월의 지명은 물론 낙래외(落來隗), 망국단(望國壇) 등 망명을 암시하는 명칭까지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화산군본전의 진위 판별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화산군본전이 소개하고 있는 평해군 군필과 그의 증손 건문을 다른 각도에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군필과 건문의 존재는 혈연관계와 상관없이 용상이 혼자 고려에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거기에 화산에 대월의 지명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들 외에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고려 초기부터 '대식'이라 불리는 아랍 상인들이 수백 명씩 사절단을 이루며 개성을 드나들었고, 몽골의 간섭을 받던 고려 말에는 한반도에 그들만의 집단 공동체를 이루며 모스크까지 짓고 살았을 정도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당시의 고려 정부와 사회가 외국인들의 집단거주를 용인하였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늘 아랍 상인과 해상무역을 동행한 대월의 상인과 해상무역 종사자들의 고려 방문 또한 그들만의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고국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거주지에 고향의 지명을 붙이는 일은 베트남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일로 보인다. 대월 이왕조의 2대 황제 태종 불마가 전쟁포로에 대하여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마을이름을 자신들이 살던 곳과 같게 하였다는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권국이었던 대월은 정복전쟁을 통하여 많은 전쟁포로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정착촌을 마련해주면서 살던 곳의 지명을 쓰도록 허용하는 일이 상례였고, 이러한 것을 학습한 대월의 고려 정착민 또한 이를 모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용상과 군필은 해상무역과 관련하여 고려에 정착한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 화산군본전에서 용상과 군필이 정착한 곳이 바닷가이고, 중국 산동의 등주와 내주 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이 자주 있었던 곳이었다는 설명은 그곳이 곧 무역항구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필은 곧 황해도 북부 내륙인 신평(新坪)으로 본거지를 옮긴 듯하다. 그리하여 고려에 눌러 살게 된 이들은 각각 화산(옹진)과 신평(황해북도)을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들의 세계(世系)를 구성하면서 대월 이왕조를 임의로 그들의 세계(世系)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에 따라 추산하면, 용상이 대몽항쟁을 벌일 때의 나이는 팔십에 이른다. 앞서의 설명처럼 용상이 고종 용한의 동생이라면 그는 1174년생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253년 신출귀몰의 작전으로 몽고군을 격퇴시켰다는 용상은 세계 최강의 몽고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쟁취한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만한 최고령의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이용상이라 할지라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었다. “수항성 밖의 달은 서리 빛과 같은데, 오랑캐를 격파하니, 일찍이 마복파(馬伏波)와 같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몽고를 격파한 감격에 겨운 백성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이용상이 대월의 진정한 왕자라면 입을 꿰매어서라도 막아야 했다. 마복파(馬伏波)란 다름 아닌 앞서 소개한 한나라 장수 마원(馬援)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나라 광무제 때의 장군인 마원은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한 쯩 자매의 난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전술한 바와 같이 베트남인들의 자존심인 동고(銅鼓)를 두 도막낸 것으로 유명한 자다. 베트남의 지도층 인사들을 잡아다 가족들과 함께 아예 한나라로 보내고, 한나라 출신 병사들을 현지민화 시켰던 인물이며, 제도나 기타 모든 것을 한나라 방식으로 고쳤던 인물이다. 그야말로 베트남의 문화자체를 아예 없애버리고 한나라와 동화시켜 버리려 애쓴 작자이다. 베트남 말살정책을 쓴 이러한 작자를 노래했다니, 이용상이 진짜 대월의 왕자라면 화산군본전을 저술한 그의 후손은 조상의 얼굴에 먹칠을 해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5,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이용상의 대월 이왕조 내에서의 행적부재와 몽고항쟁 사실의 증거 불충분 때문에, 자연히 그 후손의 역사적 사실도 의심을 받게 됨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화산이씨 세보는 천은(川隱) 이맹운(李孟芸)을 이용상의 5대 손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맹예(李孟藝)라고도 하는 이맹운의 생졸년은 미상으로 적혀있다. 그러나 1174년생인 이용상으로부터 추산하여보면, 한 세대를 충분히 잡아 30년으로 했을 때, 이맹운의 출생은 1324년 정도로 볼 수 있다. 화산이씨 세보에는 이맹운의 전기라 할 수 있는 천은선생본전(川隱先生本傳)이 따로 수록되어 있다.

천은선생본전은 이맹운을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으로 소개하고, 그의 아버지 해은(海隱) 이유(李裕)와 함께 고려가 망한 후 조선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충절을 지켰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화산이씨세보의 네 번째 수보(修補)의 서문은 이유(李裕)와 그의 아들 이맹운(李孟芸)이 두문동 70현자들과 함께 부조현에 올라가서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하였는데, 이유(李裕)가 “백이(伯夷)가 있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계도해 주겠는가?” 하자, 아들 이맹운(李孟芸)이 “뇌수산(雷首産)에서 청풍(淸風)을 쐬고 싶다.”라고 하고는 두문동으로부터 해주(海州)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종신토록 충절을 지켰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 사람도 아닌 부자(父子) 두 사람이 충절을 보였으니, 두문동 72현 중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의 산법대로 해은(海隱) 이유(李裕)의 생년을 따져 보면 해은(海隱)은 대략 1294년생이다. 그렇다면 위의 대화가 조선이 건국된 1392년의 일이라고 해도 해은의 나이는 거의 100살에 가깝다. 70세 아들과 100세의 아버지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을 캐어 먹으며 충절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일반적인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유와 이맹운의 충절사실을 보증한다는 두문동 72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두문동 72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이성계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창하자 새 왕조에 출사를 거부하고 두문동에 은거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던 고려의 조신들은 말한다. 두문(杜門)이란 “문을 닫다.” 또는 “문을 막다.”의 뜻이므로, 두문동(杜門洞)이란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 외부와 단절하며 사는 마을’ 이라는 뜻이다. 두문동은 기존에 존재했던 지명이 아니라 고려의 절신이 은거한 이후 붙여진 명칭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따라서 특정 지역이 아니라 유신들의 충절지역을 일컫는 관념적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의 72인은 공자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례(六藝)에 통달한 제자는 72인이었다.” 라고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학계에서는 72란 숫자를 구체적인 숫자가 아닌 다수(多數)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와 관련하여 규장각(奎章閣)이 소장한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 중 ‘두문동제선생실기(杜門洞諸先生實記)’는 “고려 말 충신 중 입절사의(立節死義,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고 죽은 사람)한 분들이 많았고, 그 나머지는 산거야처(山居野處)하여 두문병적(杜門屛跡,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버림)하였거나, 혹은 벼슬을 주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정절을 지킨 분을 통칭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니 대개 그 뜻이 같다고 하여 통칭하였을 뿐이지 반드시 개성 두문동에서 함께 은거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라고 하였고,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 발문(跋文)에는 “중국으로 들어가 마친 바를 알지 못하고, 먼 땅에 유배되었다가 유환(宥還)되지 못한 분이라도 두문동에서 동은(同隱)한 제현(諸賢)과 같으니 두문동에서 은거한 분이 그 수가 72인에 미만(未滿)하여도 통칭 두문동 선생이라고 지금까지 전한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새 역사에 동참하지 않은 반골들이었으므로, 두문동 충신의 존재는 부각될 수 없었다. 그들의 존재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시기는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이 최고조에 이른 조선 영조 때이다. 영조 이전까지 조선왕조실록에는 두문동에 대한 기사가 단 한 건도 기록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엄격히 금지되었을 것이다. 영조가 1740년 조선 2대 임금 정종과 그의 비 정안왕후의 능인 후릉(厚陵) 참배 차 개경 부근의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었다. 영조가 지명의 연유에 대해 묻자 신하들이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직후에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개경 동남쪽 고개에 올라 출사를 거부하고 조회 때 쓰는 관과 조복을 소나무에 걸어놓고 뿔뿔이 달아났다 하여 부조현(不朝峴)이라고 칭하며, 부조현(不朝峴)을 지나면 두문동(杜門洞)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듣고, 영조는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 해에 부조현비(不朝峴碑)를 세우게 했다. 이어 1751년(영조 27년 9월)에는 고려 두문동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고, 어필로써 “고려 충신의 명성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에 (비를)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14자를 써주고 두문동비(杜門洞碑)를 세우도록 하였다.

영조가 두문동비의 건립을 하명하면서 두문동 72현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앞서의 설명처럼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라, 다수의 충신을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정조는 개성의 성균관에 두문동 72현을 위한 표절사(表節祠)를 세우기 전, 개성부 유수 서유방(徐有防)에게 이에 대한 조사를 하명했다. 그러나 정조 7년(1783) 서유방의 상소는, “두문동 태학생 72인들은 우뚝한 충절이 진실로 정몽주 길재 등이 성취해 놓은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는데, 그 72인 중에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와 성이 맹(孟)가인 세 사람이며, 맹가는 성만 전해지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350년이나 지났으니 명단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중화사상에 심취해 72이라는 숫자에 집착한 것이 문제였다. 확인된 사람이 세 사람 밖에 없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조상이 72현 중의 일인이므로 국가에서 인정해달라는 상소를 올리는 유생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순조(純祖,1800~1834) 대에 이르러는 그 숫자가 대폭 늘어났다. 국가에서는 그런 상소를 모두 받아들여 72현에 포함시켜 주었는데, 학계는 이것을 두문동 72현을 통한 충효이념 확산을 이용하여 멸망의 위기를 넘겨보려는 조선왕조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새로운 72현이 나타나 위기의 조선을 구해주기 바라는 염원의 발로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문벌을 미화시키기 위해 조상을 두문동 72현에 포함시키려는 유학자들의 사적인 욕구가 두문동 72현 추인 요청 상소의 증가를 부채질했다.

두문동 충신의 숫자가 72현으로 고정된 최초 문헌은 고종 9년(1872년)에 나타난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문집(文集)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이 그것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꼽은 문헌도 출현했는데, 바로 1924년 강호석이 펴낸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인물지(人物誌)이다. 이는 철종 11년(1860)에 간행된 고려 말의 학자 신현(申賢)의 학문과 언행을 모아 엮은 책인 ‘화해사전(華海師全)’의 명단을 참조해 새롭게 두문동 72현을 선정하였다고 한다. 두 문헌의 명단에는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인물이 30명이고, 42명은 서로 다르게 선정되어 있다. 학계는 이에 대해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말 충신들을 포괄적으로 선정했고, 전고대방(典故大方)은 두문동에 들어갔던 시기를 중심으로 정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헌종 정미년(1847)에 간행된 두문동서원지에 “개성부 종봉산 아래 동두문동 48현이 있고, 개성부 만수산 아래 서두문동 72현이 있어서 합봉 120현이다.” 하였으므로, 두문동 72현의 숫자는 이미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의 설명처럼 자신의 조상을 두문동 72현에 포함시키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유학자들 덕분으로, 조정의 두문동 72현 확인 지정 사업이나 민간의 그것이나 모두 엄밀한 고증에 의해 이루어지기 보다는 각 문중의 족보를 참고하는 등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의심을 품는 학자들의 판단 근거가 되고 있다. 1993년에 창립된 고려숭의회(高麗崇義會)가 발표한 72현은 무려 3백70여현인 것을 보면 두문동 72현 등재를 둘러 싼 유학자들의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두문동 72현 등재를 기화로 금품수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처럼 문란한 두문동 72현 등재소동에 관하여 신채호 선생은 1924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 투고에서, “누가 두문동의 칠십이현을 충의지사라 하느뇨. 다만 이조 초년에 출사하였다가는 궁궐의 건축이나 군대의 확장 같은데 원납(願納)이나 시킬까 공(恐)하여 금(金)을 옹(擁,끌어안음)하고 문(門)을 두(杜,닫음)함이니라.”고 두문동 72현을 쫓는 세태를 비난하였다.

유감스럽게도 화산이씨세보의 천은선생본전(川隱先生本傳)에도 화산이씨 후손들에 의한 두문동 72현 등재 노력의 흔적이 남아 있다. 먼저 해은(海隱) 이유(李裕)와 천은(川隱) 이맹운(李孟芸)의 두문동 72현 등재가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과 1923년 간행된 규장각 소장의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에서는 보이지 않고, 1924년 강호석이 펴낸 전고대방(典故大方)에만 기록되어 있다.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의 부록 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漂傍錄)은 삼인(三仁) 삼절(三節) 십은(十隱) 십의(十義) 십건신(十蹇臣) 십열(十烈) 구헌(九獻) 구정(九貞) 구일민(九逸民) 구충(九忠) 구효(九孝) 팔정(八精) 팔청(八淸) 팔고사(八高士) 팔판(八判) 팔종영(八宗英) 등으로 고려의 명사를 분류하여 소개하였는데, 천은선생본전(川隱先生本傳)도 이를 그대로 전제하고 있어, 천은선생본전(川隱先生本傳)이 1923년 이후에 작성된 것임을 보여 주거니와, 기우집(騎牛集)과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에는 72현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가 전고대방(典故大方)에만 기록된 사실의 이면에는 두문동 72현 등재와 관련한 후손들의 노력이 숨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앞서의 신채호 선생의 비난 시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화산이씨세보는 숙종 23년(1706) 공조좌랑으로 추증된 후손 이평(李枰)에 의해 한 권으로 된 초보가 발행된 이래 네 번의 중수(重修)를 거쳤다. 1777년 후손 진사 이희지(李羲之)에 의해 중수된 두 번째 족보에서는 이맹운이 고려 공민왕 때 채귀하(蔡貴河), 김약(金瀹)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이 되었음을 알리고, 선초(鮮初) 이맹운을 효자로 한 정려비(旌閭碑)가 세워졌다고 적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맹운은 일찍 관에서 물러난 효심이 가득한 화산이씨의 선조였다. 그러나 세 번째 족보에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헌종 3년인 1837년 후손 이언형(李言亨) 등이 중수한 이 족보에서부터 이맹운은 그의 아버지 이유와 함께 이른바 ‘두문동 선생’이 되었다. 물론 이 사실만 가지고 두 사람의 두문동 72현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이성계가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없고 떠도는 이야기 모음집 정도인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며, 72현이라는 것도 기록에 따라 말이 다를 뿐 아니라, 동두문동, 서두문동이라 하는 것 모두 근거가 부족한 야사이며 실제 역사라 보기 어려운 허구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인데, 화산이씨세보에 혹 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6, 두문동 서원

1934년 개성에 세운 두문동서원은 정조의 두문동 충신 72명에 대한 실태조사에서 조의생(曺義生), 맹모(孟某)와 함께 그 실체가 확인된 임선미(林先味)의 후손 임하영(林河永)이 주동이 되어 창건하였는데, 고려 말 불사이군의 대의를 지킨 72현 및 정몽주, 이색 등 절의를 지킨 고려 말 충신 등 119위를 모신 서원이다. 이 서원에서 처음으로 구국의 밀사 중랑장 두두리 이초와 화산이씨의 이유 그리고 그의 아들 이맹운이 조우하였다. 비록 사후의 일이고, 후손들의 노력으로 이유와 이맹운이 두문동 서원에 봉안된 사실에 의심이 가지만, 베트남과 연관된 양가의 인물이 역사적으로 처음 한 자리에 모인 셈이다. 베트남의 왕자 이용상과 두문동 72현 이유와 이맹운의 역사가 사실이라면 매우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문동서원에 모셔진 봉안자 명단은 아래와 같다.

1) 표절실 순절반 봉안 (表節室 殉節班 奉安) : 17명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 죽산인(竹山人), 휴암(休菴) 임선미(林先味) 순창인(淳昌人), 원촌(遠村) 조의생(曺義生) 창령인(昌寧人), 용호(龍湖) 맹호성(孟好性) 신창인 (新昌人), 두문자(杜門子) 성사제(成思齊) 창령인(昌寧人), 산광(山狂) 조대운(曺大運) 창령인(昌寧人), 퇴우당(退憂堂) 신익지(申翼之) 평산인(平山人), 신귀제(愼歸齊) 신이(申彛) 평산인(平山人), 성사(省事) 신우(申瑀) 평산인(平山人), 복애(伏崖) 국유(鞠濡) 담양인(潭陽人), 밀직(密直) 고천상(高天祥) 개성인(開城人), 악은(岳隱) 심원부(沈元符) 청송인(靑松人),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 하빈인(河濱人), 적암(積巖) 서중보(徐仲輔) 장성인(長城人), 직랑(直郞) 신순(申珣) 평산인(平山人), 온수감(溫水監) 신기(申淇) 평산인(平山人), 태학생(太學生) 현계생(玄繼生) 의창인(義昌人)

2) 표절실 항절반 봉안 (表節室 抗節班 奉安) : 31명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 경주인(慶州人),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여주인(驪州人), 어은(漁隱) 이치(李致) 합천인(陜川人), 뇌은(耒隱) 전귀생(田貴生) 담양인(潭陽人), 해은(海隱) 이유(李裕) 옹진인(甕津人), 송은(松隱) 구홍(具鴻) 능성인(陵城人), 앙천제(仰天齊) 곽추(郭樞) 청주인(淸州人), 송촌(松村) 송인(宋寅) 남양인(南陽人), 도총제(都摠制) 고천우(高天祐) 개성인(開城人),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 정선인(旌善人),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인천인(仁川人), 전서(典書) 박침(朴枕) 밀양인(密陽人), 천은(川隱) 이맹예(李孟藝) 옹진인(甕津人), 모려당(慕麗堂) 변숙(邊肅) 원주인(原州人), 고죽제(孤竹齊) 조안경(趙安卿) 함안인(咸安人), 신답(新沓) 서보(徐輔) 이천인(利川人), 해은(海隱) 박심(朴諶) 면천인(沔川人), 법촌(法村) 박령(朴寧) 면천인(沔川人),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랑야인(琅耶人), 황의옹(黃衣翁) 신안(申晏) 평산인(平山人), 양촌(陽村) 원선(元宣) 원주인(原州人),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함안인(咸安人), 집현전랑(集賢殿郞) 신감(申鑒) 평산인(平山人), 미산(眉山) 성단(成단) 창령인(昌寧人), 음촌(陰村) 김약시(金若時) 광산인(光山人), 직제학(直提學) 조유도(曺由道) 창령인(昌寧人), 쌍회당(雙檜堂) 도동명(陶東明) 순천인(順天人), 감무(監務) 임탁(林卓) 라주인(羅州人),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 공주인(公州人), 모은(茅隱) 이오(李午) 재령인(載寧人), 존암(尊庵) 이수생(李遂生) 수안인(遂安人)

3) 표절실 정절반 봉안 (表節室 靖節班 奉安) : 7명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흥해인(興海人), 문하평리(門下評理) 변빈(卞斌) 초계인(草溪人), 밀직(密直) 이성인(李性仁) 안성인(安城人), 영호군(領護軍) 채옥택(蔡玉澤) 평강인(平康人), 충제(忠齊) 최문한(崔文漢) 강릉인(江陵人), 한림(翰林) 이탕휴(李湯休) 영천인(寧川人), 현령(縣令) 허징(許徵) 양천인(陽川人)

4) 순절실 순절반 봉안 (殉節室 殉節班 奉安) : 11명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영일인(迎日人),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성주인(星州人), 인제(麟齊) 이종학(李種學) 한산인(韓山人), 이유헌(理猷軒) 신득청(申得淸) 평산인(平山人), 초옥자(草屋子) 김진양(金震陽) 계림인(鷄林人),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경주인(慶州人), 부사(府事) 손등(孫登) 밀양인(密陽人), 헌납(獻納) 하경(河敬) 진양인(晉陽人), 경제(敬齊) 홍로(洪魯) 부계인(缶溪人),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 정선인(旌善人), 운암(雲巖) 차원부(車原부) 연안인(延安人)

5) 항절실 항절반 봉안 (抗節室 抗節班 奉安) : 33명

목은(牧隱) 이색(李穡) 한산인(韓山人), 손암(遜菴) 최윤덕(崔允德) 탐진인(耽津人), 석계(石溪) 최첨노(崔添老) 경주인(慶州人),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 성주인(星州人), 고산(孤山) 공은(孔隱) 곡부인(曲阜人),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중인(李中仁) 용인인(龍仁人), 조은(釣隱) 이옹(李邕) 아산인(牙山人), 병제(丙齊) 남을진(南乙珍) 의령인(宜寧人), 송은(松隱) 장안세(張安世) 인동인(仁同人), 동포(東浦) 맹희도(孟希道) 신창인(新昌人), 만육당(晩六堂) 최양(崔瀁) 전주인(全州人), 회곡(檜谷) 최호(崔瑚) 평양인(平壤人), 두노(杜老) 최유강(崔有江) 경주인(慶州人), 도총제(都摠制) 박덕공(朴德公) 죽산인(竹山人), 금은(琴隱) 조열(趙悅) 함안인(咸安人),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남평인(南平人), 오은(梧隱) 김사렴(金士廉) 안동인(安東人), 퇴제(退齊) 신우(申祐) 아주인(鵝州人), 좌윤(左尹) 손호정(孫孝貞) 밀양인(密陽人), 절제사(節制使) 이옥(李沃) 양성인(陽城人), 동강(東岡) 이린(李璘) 원주인(原州人), 송은(松隱) 박천익(朴天翊) 밀양인(密陽人), 둔옹(遯翁) 최이(崔邇) 경주인(慶州人), 건곡(虔谷) 조유(趙瑜) 옥천인(玉川人), 정은(正隱) 옥사온(玉斯溫) 의춘인(宜春人), 호은(湖隱) 허기(許麒) 김해인(金海人), 묵은(默隱) 정희(鄭熙) 하동인(河東人), 죽송오(竹松塢) 서견(徐甄) 이천인(利川人), 여강(驪江) 윤충보(尹忠輔) 무송인(茂松人), 보승(保勝) 최원(崔原) 수원인(水原人), 호촌(壺村) 신포시(申包翅) 고령인(高靈人),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원주인(原州人), 금은(琴隱) 이양소(李陽昭) 순천인(順天人)

6) 정절실 정절반 봉안(靖節室 靖節班 奉安) : 20명

농암(籠巖) 김주(金澍) 선산인(善山人), 안정백(安定伯) 라천서(羅天瑞) 안정인(安定人), 사암(思菴) 민유(閔愉) 여흥인(驪興人),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담양인(潭陽人), 자포옹(自逋翁) 김전(金鈿) 안동인(安東人), 삼가(三可) 조공(趙珙) 자천인(自川人), 회정(晦亭) 전자수(全子壽) 담양인(潭陽人), 악은(岳隱) 노신(魯愼) 함풍인(咸豊人), 한천자(漢川子) 신아(申雅) 평산인(平山人), 만은(晩隱) 홍재(洪載) 풍산인(豊山人),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고령인(高靈人), 상서(尙書) 이춘계(李春啓) 합천인(陜川人), 상서(尙書) 맹유(孟裕) 신창인(新昌人), 묵제(默齊) 양우(梁祐) 남원인(南原人), 수운암(睡雲菴) 송교(宋郊) 여산인(礪山人), 불강(弗降) 김약(金약) 광산인(光山人), 퇴휴당(退休堂) 선윤지(宣允祉) 보성인(寶城人), 어일(漁逸) 민유의(閔由誼) 여주인(驪州人), 사인(舍人) 이조(李條) 경주인(慶州人), 군사(郡事) 민보문(閔普文) 여주인(驪州人)

7) 미봉안 두문동 72현 : 24명

우현보(禹玄寶), 유순(柳洵), 조견(趙견), 허석(許錫), 이수인(李守仁), 길재(吉再), 조홍(趙洪), 이사경(李思敬), 이행(李行), 이양중(李養中), 김육록(金六鹿), 변귀수(邊貴壽), 안종약(安宗約), 김준(金俊), 윤육(尹陸), 민보(閔普), 임극(林隙), 신석(申釋), 신자악(申自嶽), 김위(金瑋), 박의중(朴宜中), 박태시(朴太始), 길인적(吉仁迪), 반(潘)

특이한 사항은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의 부록 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漂傍錄)에서 이초와 함께 구헌(九獻)으로 선정되었던 윤이(尹彛)가 순절사에 봉안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으로선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지만, 두 분 가운데 죽음으로써 충절을 대신한 이가 이초 뿐 이었기에 벌어진 일로 사료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유와 이맹운의 본관이 화산이 아니라 옹진(甕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당시에는 옹진이씨였다가, 일제강점시의 창씨개명이 환원되는 과정에 화산이씨로 한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