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21 14:25
기타파 정선이씨
 글쓴이 : 김포정인 (211.♡.182.32)
조회 : 692  
정선이씨는 2000년의 인구조사에서 4천명이 못되는 성씨족(姓氏族)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동보 발간을 시작한다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동보 발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동보 발간에 앞서 정선이씨 실태파악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선이씨를 추적하다보니 인구조사에서 나타난 정선이씨의 적어도 반수 이상이 현재 무인보에 바탕을 둔 계파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위 ‘기타파’라 불리는 이들이 정선이씨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래의 글이 이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두두리 이초(李初)의 순절사건(殉節事件)에다가 조선 정부가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원인을 이초·윤이의 무고(誣告)로 돌렸으니 이초의 후손들은 조선 내내 심한 제약을 받았다. 그들의 관직 진출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응시도 금지되었다. 이초의 직계와 후손들은 조선왕조 창립과 더불어 모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초의 동생 이우(李瑀)가 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초의 장자(長子)이자 경주귀환 두두리 13세 이용(李龍)과 차자(次子) 이분(李芬)은 각각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와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경주귀환 두두리 14세이자 용(龍)의 장자(長子) 이자생(李自生)도 안렴사(按廉使)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자생(自生)의 장자(長子) 이존실(李存實)은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 진출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퇴임지에 터를 잡고 세를 이뤄 오늘날 경주귀환(慶州歸還) 두두리 정선이씨(旌善李氏)의 한 축을 이루었다. 13세 용(龍)과 그의 아들 자생(自生)은 황해도 재령(載寧) 지방을, 13세 분(芬)과 그의 아들 이지형(李之衡)이 함경도 안변(安邊)을 세거지(世居地)로 한 것이 그것이다.

재령에는 유명한 애정(艾井)이 있다. 애정(艾井)은 이자생(李自生)의 이야기와 재령 정선이씨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이다.

『애정은 황해도 재령군 북쪽 10리(里) 되는 지점에 있다. 고려말엽 자생(自生)이 황해도 안렴사로 지방을 순행할 때에 이곳에 이르러 “이곳은 땅이 비옥하고 골짜기가 넓어서 살 만하다.”하니 막하의 손님들이 이곳에 물이 없음을 아뢴 즉, 공(公)이 쑥 두 뿌리가 총생(叢生)하는 곳을 가리키며 “이 곳을 파면 샘물을 얻을 수 있다.”하고 즉시 역졸(驛卒)을 시켜 쑥을 뽑아내게 한 후 겨우 몇 자를 파자 맑은 샘물이 용솟음쳐 나오니 매우 시원하고 상쾌하였다. 공은 임기가 끝나고 이곳에 우거(寓居)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마침내 마을을 “애정(艾井)”이라 이름 하였다.』(재령군지)

1780년 10월 20일 세워진 애정유적비문은 27세손 이정규(李正奎)가 글을 짓고 26세손 이휘무(李彙茂)가 글씨를 썼다. 애정은 황해도 일대에서도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해 보인다. 오태석 선생 작(作) ‘춘풍의 처(春風의 妻)’에는 기녀 추월이가 춘풍의 처에게 불러주는 창 한 대목이 나오는데,

    “갈 테면 가세꾸먼.
      배천(白川)으로 말하면 소개 같은데
      연안(延安)으로 말하면 송청 같은데
      수안(遂安)으로 말하면 무란 같은데
      항주에 누릉지 같은데
      봉산에 양아동 같은데
      재령(載寧)에 쑥우물(애정,艾井) 같은데
      해주(海州)에 독굿 같은데
      갈 테면 가세꾸먼.
      큰 대촌에 기와집 짓고
      일 년 열두 달 마다 달마다 자식 놓고 철마다 양식 거두고.”

라고 황해도 일대의 살기 좋은 곳을 열거하면서 그곳에서 자식을 낳으며 정착하고 싶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나마 그 같이 살기 좋은 곳에서 재령 두두리들이 중앙으로부터 밀려난 한을 삭힐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용(龍)~자생(自生)~존실(存實)로 이어지는 황해도 재령의 두두리들은 존실(存實)대에 이르러 극정(克精), 극효(克孝), 극선(克善)으로 세가 늘어났는데, 이들이 각각 참군공(參軍公)파, 사직공(司直公)파, 교위공(校尉公)파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한편 분(芬)~지형(之衡)~흥망(興望)으로 이어지는 함경도 안변의 두두리들은 흥망(興望)대에 이르러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등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가운데 인(仁)이 승지공(承旨公)파, 의(義)가 진사공(進士公)파, 예(禮)가 선전공(宣傳公)파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황해도 재령의 두두리들과 함경도 안변의 두두리들이 과거에 나아간 것은 중종(中宗,1506~1544) 이후의 일로 조선 500년간 과거급제자를 수록한 조선 사마방목(司馬榜目)에 따르면 이익재(李益材,숙종1년,1675,생원급제,재령), 이제한(李齊漢,숙종8년,1682,진사급제,평양), 이기중(李基中,순조19년,1819,생원급제,재령), 이장훈(李長勳,헌종14년,1848,진사급제,재령), 이대윤(李大潤,고종17년,1880,생원급제,평양), 이종백(李鍾伯,고종17년,1880, 생원급제,재령), 이달원(李達源,고종19년,1882,생원급제,안변), 이병익(李炳翼,고종22년,1885,생원급제,해주) 등 8명이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무과(武科) 합격자도 있는데, 이계감(李繼瑊,효종2년,1651,재령), 이천익(李天益,숙종20년,1694,안주), 이만주(李萬柱,숙종32년,1706,재령) 등 3명이다. 정선이씨의 과거응시는 후술되겠지만 15세 이익손(李益孫)이 중종반정에 참여한 이후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해당될 뿐 이었다.

황해도(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 장수면 청수리 금장산 기슭에는 경현서원(景賢書院)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경현서원은 1655년(효종 6) 주희(朱熹,주자)와 이이(李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어 그들의 위패를 모셨다. 1695년(숙종 21) ‘경현(景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경현사원에는 사우(祠宇)·강당(講堂)·동재(東齋)·서재(西齋)·세심정(洗心亭)·전사청(典祀廳)·연향문(延香門)·익랑(翼廊)·장의방(掌議房)·고직방(庫直房)·유사방(有司房)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폐쇄된 바 있으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경현재(景賢齋)를 다시 지은 후 지방서원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6년 화재로 일부건물이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현서원은 두두리 24세 이익재(李益材)가 그의 재종(再從) 이성재(李成材)와 함께 임금에게 헌액(獻額)의 소(疎)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익재는 1640년 경진(庚辰)생으로 숙종 1년(1675) 증광시 생원에 급제하였고, 2년 뒤인 1677년 정선이씨 최초의 족보인 정사보(丁巳譜)을 편찬하였다. 정사보는 집안의 가첩(家牒)과 유서(遺書) 등을 참고로 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1938년 두두리 정선이씨 32세손 이병근(李炳根)이 편찬한 무인보(戊寅譜)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재령에서 발간된 무인보은 총 9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무인보에는 신서문(新序文)·구서문(舊序文)·애정유적비문내각기(艾井遺蹟碑文乃各記)·범례(凡例)·성씨본원(姓氏本源)·교지사적(交趾事迹)·안남국세기(安南國世紀)·각파초도(各派草圖)·정선군연혁(旌善郡沿革)·애정유적(艾井遺蹟)·시조(始祖) 등의 참고내용과 참군공파(參軍公派)·사직공파(司直公派)·교위공파(校尉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선전공파(宣傳公派)의 세계(世系)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재령군 재령읍 향교리에는 재령향교(載寧鄕校)가 있는데, 1574년(선조 7)에 유교 성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명륜당(明倫堂)·동무(東廡)·서무(西廡)·집례방(執禮房)·장의방(掌議房)·헌관방(獻官房)·전사방(典祀房)·제기고(祭器庫)·설병고(設餠庫)·사재(司齋)·낙재(樂齋)·문회재(文會齋) 등이 있었고,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과 동무·서무에 우리나라 18현(十八賢) 및 중국 94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여왔다고 한다.

재령향교도 두두리들의 활동무대였다. 두두리 30세손 이순흠(李淳欽)은 향교(鄕校) 장의교장(掌議校長)을 지냈으며, 두두리 이제동(李濟東)은 낙육재(樂育齋) 유사(有司)와 장의(掌議) 그리고 모현재(慕賢齋) 장의(掌議)를 지낸 바 있으며, 고종 17년 생원에 급제한 이종백(李種伯)도 향교를 통하여 진사에 급제하고 향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경주귀환 두두리의 다른 한 축은 이초(李初)의 동생, 이우(李瑀)였다. 우(瑀)~저(著)~지함(之涵)~익손(益孫)으로 이어지는 두두리 일족들은 조선 개국 후 두두리들의 성지, 영월로 내려갔다. 형 이초(李初)가 순절하자 진주안무사(晋州按撫使) 이우(李瑀)는 두두리의 터전 영월로 내려가 이초가 순절한 이유인 공양왕의 복위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복위운동 실패 후 숨어살던 이우의 후손들은 익손(益孫)에 이르러 한남(漢南,수원)으로 세거지를 옮겼다. 장락원(掌樂院) 정(正)을 지낸 익손(益孫)은 외조부 감역관(監役官) 심작(沈碏)의 권유로 수원에 정착하였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한 후에 서울로 옮겼다.

경주귀환 두두리 15세 이익손(李益孫)은 외삼촌들과 함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를 도와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공로로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이 되었다. 익손의 정국원종공신 책봉으로 비로소 두두리 정선이씨의 족쇄가 풀렸다. 그러나 두두리 정선이씨에게 허용된 것은 생원·진사와 무과 그리고 잡과에 국한된 것이었다. 문과는 여전히 봉쇄된 반쪽짜리 복권이었다. 두두리 우(瑀)의 후손들은 익손의 증손자 이세방(李世芳)이 명종(明宗) 4년(1549) 역과(譯科) 식년시(式年試)에 5위로 합격함으로써 중인의 집안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익손이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이 되었지만 아직 종계변무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이러한 역관을 생존을 위한 탈출구로 선택한 두두리 이우(李瑀)의 가계는 두두리의 후예답게 이세방(李世芳)을 필두로 17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역과(譯科)
    이세방(李世芳)              명종  4년  (1549)  식년시  5위 
    이인린(李仁麟)              광해군 5년  (1613)  증광시
    이의백(李宜白)  1630년생  효종  1년  (1650)  증광시  1위  청학
    이상한(李尙漢)  1618넌생  효종  2년  (1651)  식년시  2위  왜학
    이항백(李恒白)  1634년생  현종  1년  (1660)  식년시  8위  왜학
    이  순(李  淳)  1644년생  현종  4년  (1663)  식년시  5위  한학
    이성하(李成夏)  1644년생  현종  13년  (1672)  식년시  3위  청학 
    이  해(李  海)  1669년생  숙종  25년  (1699)  식년시  1위  청학 
    이  영(李  煐)  1741년생  영조  35년  (1759)  식년시  7위  한학
    이만형(李晩馨)  1733년생  영조  35년  (1768)  식년시  1위  청학
    이만영(李晩榮)  1756년생  정조  7년  (1783)  증광시  1위  한학
    이명희(李明爔)  1784년생  순조  9년  (1809)  증광시  10위  몽학
    이  각(李  殼)  1796년생  순조  12년  (1812)  증광시  5위  한학
    이재성(李在聲)  1820년생  헌종  6년  (1840)  식년시  2위  한학
    이형희(李亨爔)  1813년생  헌종  6년  (1840)  식년시  10위  몽학
    이우현(李禹鉉)  1825년생  헌종  12년  (1846)  식년시  1위  한학
    이주현(李周鉉)  1838년생  고종  1년  (1864)  증광시  4위  왜학

경주귀환 두두리 정선이씨의 역과 합격률은 대단한 것이었다. 정선이씨 17명의 합격자 수는 역관명문인 초계(밀양)변씨 106명보다 숫자에 있어 크게 뒤지지만, 총인구가 각각 3,657명과 49,506명(2,000년 기준)임을 감안하면, 총인구 대비 합격률에 있어서는 오히려 정선이씨가 압도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1위 합격자가 5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두두리 정선이씨가 외국어 습득에 있어 매우 우수한 자질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두두리 해상무역을 통한 실무경험이 우성(優性) 유전자로 남아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두리 이우(李瑀)의 가계는 18세손 이세방(李世芳)을 필두로 27세손 이우현(李禹鉉)·이주현(李周鉉) 형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17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21세손은 3명의 합격자를 내어 가장 많은 합격자를 기록한 항렬이 되었다. 두두리 이우(李瑀)의 가계는 16세손 이연(李延)대에 이르러 세가 늘었다. 이연(李延)은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석견(李碩堅)·이증(李熷)·이수천(李壽千)이 그들이다. 역과 합격자를 처음 배출한 가문은 이석견가문(李碩堅家門,사용공파,司勇公派)이고, 두두리 18세손 이세방(李世芳)이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석견가문은 생원시에 합격한 19세손 이정영(李廷英) 이후, 20세손 이사민(李士敏), 21세손 이상길(李尙吉)·이정운(李廷雲), 22세손 이중생(李仲生)·이봉금(李奉金)·이우신(李友信) 등 무과합격자를 주로 배출하였다. 이증가문(李熷家門,우윤공파,右尹公派)은 19세손 이인린(李仁麟), 21세손 이의백(李宜白)·이항백(李恒白), 22세손 이순(李淳)·이해(李海), 24세손 이영(李煐), 25세손 이만형(李晩馨)·이만영(李晩榮), 26세손 이각(李殼)등 9명의 역과 합격자를 냈고, 이수천가문(李壽千家門,계사공파,計士公波)은 20세손 이상한(李尙漢), 21세손 이성하(李成夏), 26세손 이명희(李明爔)·이형희(李亨爔), 27세손 이재성(李在聲), 28세손 이우현(李禹鉉)·이주현(李周鉉) 등 모두 7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우윤(右尹)에 추증된 이증가문(李熷家門)에는 사역원 정을 지낸 21세손 이항백(李恒白)을 비롯하여, 상통사·판관을 지낸 22세손 이해(李海), 판관을 지낸 25세손 이만형(李晩馨), 그리고 역시 사역원 정을 역임한 25세손 이만영(李晩榮)이 있었다. 이만영(李晩榮)의 부친 24세 이엽(李燁)은 상호군(上護軍,대장군)을 지낸 무장이었다. 특히 이수천(李壽千) 가문(家門)은 명문 역관 집안과 혼인하는 등 해상무역으로 다져진 해외경험과 정보를 공유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20세손 이무립(李武立)는 변승길(卞承吉)의 여식과 혼인하였는데, 변승길은 당대 최고의 갑부로 알려진 변승업의 맏형이다. 변승길은 무과에 입격하여 1644년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판관이 되었다. 호군(護軍,장군)을 지낸 이무립(李武立)은 군대인연으로 변승길의 사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5년(1613) 두두리 최초로 의과(醫科)에 등과하고 내의원 정(正)을 지낸 두두리 정선이씨 19세손 이의원(李義元)이 이무립(李武立)의 부친이다.

변승길은 아들 부잣집의 장남이었다. 둘째 변승훈이 왜학역관, 셋째 변승선은 주부(主簿), 그리고 넷째 변승희, 다섯째 변승책, 여섯째 변승준(俊), 일곱째 변승준(遵), 여덟째 변승형, 아홉째 변승업(業)이 내리 역관이었다. 첫째 변승길과 셋째 변승선만 빼고 모두 역관인 것이다. 다만 둘째 변승훈이 스물아홉의 나이에 요절하였을 뿐이었다.

한편 이수천가(李壽千家) 두두리 20세손 이상한(李尙漢)은 효종 2년(1651) 역과 2위로 합격하였다. 왜학을 전공한 이상한은 사역원의 전임관원 중 가장 높은 직책인 사역원 정(正,정3품)을 역임하였다. 변승업의 맏형인 변승길의 사위가 된 호군(護軍,장군,정4품) 이무립(李武立)과 팔촌지간인 그는 왜학역관들의 수장격인 사역원(司譯院) 정(正)으로써 같은 왜학을 전공한 변승업 형제들도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이무립(李武立)의 아들 이성하(李成夏)도 역과에 합격하고 상통사(上通事)를 지냈는데, 외할아버지들의 영향으로 많은 부를 쌓았다. 이 부(富)를 바탕으로 그의 후손인 이증생(李曾生)은 전농리 일대에 많은 전답과 산을 마련하며 입향(入鄕)하였다. 이를 보고 변승업의 후손들도 망우리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고,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있다.
 
또한 이수천가(李壽千家) 두두리 정선이씨 27세손 이재성(李在聲)은 헌종 6년(1840) 21살의 나이에 역과 2위로 합격하였다. 이재성(李在聲)의 증조부 이성집(李聖集)은 사역원 참봉을 지냈고, 조부 이동모(李東模)는 사역원 전함을 지냈으며, 아버지 이명희(李明爔)는 순조 9년(1809) 역과에 합격하여 몽학원체아(蒙學元遞兒)를 지냈다. 이재성(李在聲)은 한학총민(漢學聰敏)을 거쳐 현감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이창현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오응현(吳膺賢)의 여식과 혼인하였다. 오응현은 4남 1녀를 두었다. 형제 모두 역과를 거쳐 관직을 역임한 경석(慶錫), 경윤(慶潤), 경림(慶林), 경연(慶然) 4형제와 이창현에게 출가한 고명딸이 그들이다. 장남 오경석(吳慶錫)은 3·1운동 때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의 아버지이다. 이창현(李昌賢)은 개화사상가 오경석(吳慶錫)의 매부이자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고모부인 것이다.

오세창의 고모부 이창현(李昌鉉)은 고종(高宗) 11년(1874)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전행공조좌랑(前行工曹佐郞)을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이순응(李淳膺)·이순명(李淳命) 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 이순응(李淳膺)은 고종(高宗) 31년(1894) 진사시에 합격한 바 있다.

두두리 정선이씨 28세손 이창현(李昌鉉,1850∼1921)은 성원록(姓源錄)이란 성씨계보 책을 남겼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책은 10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층을 주로 수록한 다른 성씨계보 책과는 달리 역관(譯官)·의관(醫官)·산관(算官)·율관(律官)·음양관(陰陽官)·서자관(書字官)·화공(畫工) 등 중인계층의 계보를 수록하여 가히 ‘중인의 종합보(綜合譜)’라 할 수 있는 책이다. 60여 성(姓) 194개 본관이 실려 있는데, 이 중 정선이씨(旌善李氏) 등 67개 본관은 다른 만성보(萬姓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성씨 자료들이다. 이 책은 조선 중기 이후, 천문학·의학·역학 등 기술직·전문직을 담당하였던 계층인 중인(中人)들의 계보가 실려 있다는 점에서 수학·의학·천문학 등 순수과학과 역사학·국문학·법학 등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사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두두리 정선이씨 28세손 이창현이 성원록(姓源錄)을 저술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곧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두리 평전을 쓰고 있는 마음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창현의 성원록(姓源錄) 덕분에 두두리들이 더 많은 선조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원록은 시조부터 당시까지의 정선이씨 전가계가 소개된 것이 아니라, 두두리 이증생의 후손 이인걸(李仁傑)가계와 또 다른 두두리 이희(李凞)가계만 소개하였고, 심지어 이창현 자신이 속한 가계도 제외하였다. 학계에서는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상원과방(象院科榜)·율과방목(律科榜目)·완천기(完薦記)의 기록을 참고로 이창현의 가계를 밝혀냈는데, 이창현의 가계는 역과 합격자 5명, 율과합격자 2명, 사역원시험 합격자 3명을 배출한 명문 중인가계(中人家系)였다. 이창현이 자신의 저서에 자신의 가계를 기록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가 성원록을 편찬한 목적이 중인의 기원이 양반에게 있다는 근거를 보임으로써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을 도모하려는데 있지 않았고, 주요 중인 가계의 존재양상을 밝혀, 당시 중인가계들이 강력하게 결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데 있었다는 학계의 분석을 볼 때, 베트남을 경영했고, 고려를 통치했던 두두리 선조들의 역사를 밝힘으로써 혹 양반체계의 모순에 의연히 도전하는 자신의 의도가 곡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 후기 많은 양인들이 족보를 위조하고 유생을 사칭하여 납속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을 꾀한 사실에 반하여, 중인들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강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존재하고 있었고, 이러한 강한 정체성이 성원록(姓源錄) 편찬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앞서의 설명처럼 성원록(姓源錄)은 정선이씨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채록된 다른 성씨와 달리 시조에 대한 설명이 없고 정선이씨 가계 중 두 가계에 대해서만 계보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정선이씨에 관한한 미완성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김양수(金良洙) 선생은 성원록해제(姓源錄解題)라는 성원록(姓源錄) 영인본(影印本) 서문(序文)에서, “1권으로부터 10권까지 성씨의 총목을 보면, 제2권에 정선이씨(旌善李氏)를 책머리에 놓았다. 이것은 역시 저자의 본관인 관계로 책머리에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저자의 집안만은 따로 세보(世譜)가 있기 때문에 빼었는지 또는 나타내고 싶지 않은 의도에서였는지 제외되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제1권에는 왕족인 완산이씨(完山李氏,연향 이창현이 붙인 명칭으로 전주이씨를 가리킴)와 한반도 이씨(李氏)의 원조인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실렸다. 여기에 이창현의 또 다른 성원록 편찬의도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원록(姓源錄)이 중인들의 계보를 집대성한 성씨록(姓氏錄)이라는 점에서 왕족이든 명문이든 그들의 후손도 중인계급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려 했다는 것이 첫째요, 비록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중앙에서 밀려나 향촌에 은거하고 있거나 생존하기 위해서 중인의 삶을 살게 된 정선이씨(旌善李氏)이지만 한때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석권했고 안남과 고려를 경영했던 사실을 밝히고 싶은 것이 둘째라 할 수 있다. 다만 정선이씨의 역사를 공표한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부담되는 일이었기에 수록을 미루고 대표적인 몇 가문만을 채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연향(硏香) 이창현이 지은 정선이씨의 역사가 분명 따로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며, 하루빨리 성원록(姓源錄)처럼 세상에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창현(李昌鉉)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두(李而杜)의 시문집인 남회당문집(覽懷堂文集)에 글을 남기는 등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일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두두리 이우(李瑀)의 가계는 역과 외에도 의과(醫科)와 음양과(陰陽科), 그리고 율과(律科)의 합격자도 배출하였다.

 의과(醫科)
    이의원(李義元)              광해군 5년  (1613)  증광시
 
 음양과(陰陽科)
    이현상(李玄祥)  1777년생  순조  1년  (1801)  증광시
    이수담(李壽聃)  1791년생  순조  13년  (1813)  식년시

 율과(律科)
    이진화(李震華)  1653년생  숙종  4년  (1678)  증광시  1위(장원) 
    이동빈(李東彬)  1775년생  순조  3년  (1801)  증광시  4위 
    이신희(李信爔)  1825년생  헌종  9년  (1843)  식년시  4위 
    이정교(李正敎)  1823년생  헌종  12년  (1846)  식년시  5위 
    이선교(李善敎)  1826년생  헌종  15년  (1849)  식년시  1위(장원)

율과(律科)에서의 두두리들의 활약이 뛰어났다. 21세손 이진화(李震華)와 27세손 이선교(李善敎)는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여 가문을 빛냈으며, 이선교(李善敎)의 형 이정교(李正敎)도 율과에 합격하여 형제가 모두 율사가 되었다. 의과(醫科)에 합격한 두두리는 전술한 이의원(李義元) 밖에 없으나, 이수천가문(李壽千家門)의 두두리 정선이씨 23세손 이의수(李宜秀)는 전의감직장(典醫監直長)과 내의원직장(內醫院直長)을 역임한 바 있다.

이들 외에도 의원으로 칭송을 받은 두두리가 있다. 황해도 두두리 사직공파 32세손 이성근(李成根)이다. 이성근(李成根)은 1878년(고종 15)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의사 면허증을 취득하여 그 해 5월 부천군 오정면 원종리에서 개업한 이래 내내 부천에 거주하였다. 이성근이 만든 ‘광제고’라는 고약이 효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성근(李成根)은 빈부를 막론하고 무료 진료를 펼쳐 1929년 오정면 주민들에 의해 이성근의 공덕을 기리는 ‘의생(醫生) 이성근(李成根) 자선비(慈善碑)’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1936년 8월 5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부천군의 의료 시설을 보도하면서 이성근(李成根)을 ‘박애의 의생’이라고 칭송하였다. 이성근(李成根)은 이제황(李濟璜)의 아들이다. 이제황은 벼슬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등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부천시 원미구 심곡 본1동 산 73번지에는 박애의 의생 이성근의 묘와 봉분 없는 이제황의 묘비가 남아 있다. 정선이씨족보(旌善李氏族譜)는 이제황의 묘가 황해도 재령군 장수면 천마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제황의 묘가 아마도 이곳에서 재령군으로 이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찬걸 13-10-2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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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않은 시간을 할애하시어 정선이시 역사자료 고견주신것 감사합니다.

 귀 종중의 서두 언급대로 상당 수의 기타파가 이번 기회에 자기파와 세를 찾게 되길 희망하며 설사 모호한 경우라도 이상과 같은 좋은 자료와  가첩,가승,고증,녹음,사진,문집등 실오라기 같은 하나의 글자서한이라도 가문 역사와 형성 근거를 제출하여 주시면 선조의 가지를 찾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이번주에 수단양식이 확정되지만 이의 배포 이전에 먼저 가문별 자료 수집(상기 언급한 자료및 가첩족보기록등...)을 먼저 할 예정입니다. 그 때에 상기 기록에 대한 구체 자료와 참고문한들을 제출하여 주시면 인수증과 교환하여 우선 복사한 후 되돌려드리겠습니다.

 그간 무인보에 오르지 않았던 여러 정선이씨 종중님들의 적극적인 활약을 기대합니다.
공식적인 정선이씨 수단지 접수 주소가 확정되지 않았으나 족보제작과 관련된 질문은 아래 스탭들의 연락처를 참고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족보편찬위원장  이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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