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2-16 23:00
저명인사들보다도 더 위대한 인생을 사신 "어머니"
 글쓴이 : nina
조회 : 70  

◆ 어느 어머니의 유언!
                                    - 이일배(前 구미 인동고 교장) -

어떤 말이 그리 눈물 나게 했을까.
단 열네 줄로 쓴 어느 어머니의 유서를 읽으면서 눈자위를 맴도는 눈물을 삭히기가 어렵다.
자려고 누워서도 유서의 말이 떠올라 눈시울이 젖는다.
그다지 가져보지 못한 눈물인 것 같다.
그 유서의 전문은 이러했다.
(전체가 열네줄이라 했는데 여기 올리면서 몇 줄이 늘어났음을 말씀드립니다.)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나를 돌보아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어미라 불러주고,
젖 물려 배부르면 나를 바라본 눈길에 참 행복했다네.
지아비 잃고 세상이 무너져,
험한 세상 속을 버틸 수 있게 해 줌도 자네들이었네.
병들어 하느님이 부르실 때,
곱게 갈 수 있게 곁에 있어 줘서 참말로 고맙네!
자네들이 있어서 잘 살았네.
자네들이 있어서 열심히 살았네.

딸아이야 맏며느리, 맏딸노릇 버거웠지?
큰 애야, 맏이노릇 하느라 힘들었지?
둘째야, 일찍 어미 곁 떠나 홀로 서느라 힘들었지?
막내야, 어미젖이 시원치 않음에도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
               
                                                2017년 12월 엄마가

~ ○ ~ ○ ~ ○ ~ ○ ~ ○ ~ ○ ~ ○ ~ ○ ~ ○ ~ ○

사십대 초반에 공무원이던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35년간을 홀로 오직 일녀삼남 자식들만 바라며 살아온 어머니의 유서다.
78세에 난소암을 얻어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이 유언이 공개된 장례식장은 흥건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2017.12.27.)

무엇이 그토록 눈물겹게 했을까?
우선 자식들을 두고 ‘자네’라고 부르는 2인칭 대명사가 눈물겹다.
친구나 아랫사람을 대우하여 이르는 ‘자네’라는 말 속에는 자식을 끔찍하게 위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극진한 마음이 녹아 있는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머니로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요즈음 세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떠올리기조차 꺼려지는 일이지만,
부모의 학대로 어린 자식이 무도한 지경에까지 이르는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가.
자식을 귀하게 대우하는 어머니임에야 자식인들 어찌 바른 성정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유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식들의 어머니를 위한 지성도
예사롭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어머니는 자식들의 치성이 고맙기도 했겠지만,
그 ‘고마움’은 그것에만 있지 않았다.
어미라고 불러주는 것이 고맙고,
젖 배불리 먹고 어미를 바라보는 그 눈길이 행복을 주어 고맙고,
지아비 잃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되어주어 고맙고,
세상 떠날 때 곱게 갈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아무 바랄 것 없이 거저 내 자식인 것만으로도,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고 있는 무위의 사랑이 눈물샘을 울컥 밀어 올린다.

노자(老子)가 말한
‘낳아주되 제 것으로 갖지 않고,
 위해주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라게 해 주되 간섭하지 않는
 生而不有(생이불유),
 爲而不恃(위이부시),
 長而不宰(장이부재)’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자는 이를 일러 ‘현덕(玄德)’이라 했다.
‘인간이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길 없는 묘한 도덕’ 이라는 말이다.

이 어머니는,
당신이 있어 자식이 잘 산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있어 당신이 잘 살았다 하고,
당신이 자식을 열심히 살 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있어 당신이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당신 삶의 모든 공을 자식들에게 돌리고 있다.
이런 마음을 두고 노자는
'功成而不居 (공성이불거)
공을 이른고도 연연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이는 곧 ‘자연의 일'이라 했다.
자연이 만물을 대하는 이치와 같다는 말이다.
이 어머니의 사랑이 이와 같을진대 이보다 더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이 있을까?
그 순수와 숭고가 다시 눈물샘을 솟구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어머니는 일녀삼남을 일일이 다 부르면서
제 노릇하며 사느라고 얼마나 버겁고 힘들었느냐고 오히려 위로해 주며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 면서 자식들을 토닥인다.
이에 이르러 방울 굵은 눈물을 지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하물며 그 자식들은 어떠하였을까?

이 유언을 들으면서 자식들이 흐느낀 울음이며
세상 사람들이 지은 눈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물론 말할 수 없이 지극한 자애(慈愛)에 대한 깊은 감동의 눈물일 것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애정이며,
자식의 부모에 대한 경애심이 점점 흐려지고 거칠어져 가는 세태가 돌아보일수록 이 유언에 어린 감동이 더할 나위 없는 큰 울림으로 새겨져온다.

어찌 감동으로만 끝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 누구든 자신의 삶이 돌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생의 종언을 앞두게 되었을 때,
무슨 말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까?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나는 이 어머니만한 지정으로 살아오지 못한 것 같다.
자식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를 생각하면 민연해질 때가 있다.
하물며 어찌 이런 말을 남길 수가 있을까.
내가 못한 것을 너희들은 잘 해달라는 구차한 말조차도 남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일을 생각하다보면 이 어머니의 유서가 다시 눈물겹다.

내 살아온 자취가 더욱 눈물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