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6-16 14:22
이의민 조상님의 대한 의견
 글쓴이 : 산나그네
조회 : 822  
『역사저널, 그날』! : 2015년 3월 29일 방송
“드라마 속 역사인물 제4탄, 천민 이의민 왕을 굼꾸다”에 대한
부적절한 추론적 언급 및 표현에 대한 반론보도 및 시정요청
작성자 : 이광춘(강원도 춘천시 후평3동 830-9번지, 010-2280-1815)
안녕하십니까 ?
저는 강원도에 살고 있는 村夫로, 평소 良質의 많은 프로그램을 제작․보급하시어 韓流를선도하시는 귀사에 깊은 존경을 드리며, 귀 한국방송공사의 시청자로, 귀사의 “역사저널, 그 날” 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旌善李氏 33代孫으로, 귀 프로그램에서 주제로 하였던 “이의민”의 후예입니다. 귀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중 일부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시정요청 하고자 몇자의 글을 올립니다.
우선, 제목에 표현하신 “천민”부분입니다. 이는 참석하신 대부분의 패널들께서 이구동성으로 언급하셨던 부분으로 이에 대하여 바로잡고자 하며, 기타 세세한 부분적 내용들은 후일로 미루겠습니다.
둘째,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기록은 조선 성리학자들의 눈에 비친 무인집권자들에 대한, 집필 당시의 정치적 시대상황에 따른 역사관을 遵據로하여 작성된 역사서로서, 일부 기록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周知의 사실입니다
족보는 한 성씨의 역사기록이고 가계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사문서이지만 공문서의 성격도 지닌다. 족보의 기록을 통하여 자기 조상의 업적을 배우고 종중(宗中)의 협동과 상부상조, 그리고 교화의 구실을 하는 면에서는 단순한 가계기록 이상의 사회통합적 순기능도 지닌다. 나아가서 가령 동성불혼의 관습에 따른 판단자료가되기도 하는 법률적 효용성이라든가, 여러 종중의 족보기록을 통하여 우리 나라 전통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규명하는 데도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 때문에 과거의 조상을 미화시킨다든지, 없는 조상을 일부러 만들어 넣는 등 위보(僞譜)를 만드는 일도 있어 그 폐해도 더러 있다(출처: 족보 [族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記述은 족보에 대한 보편적 설명으로 우리 정선이씨의 족보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기록되었으며, 과거의 不遇한 歷史에 대한 기록조차 加減 없이 기록․보존하고 있습니다
제목에 표현하신 “천민”부분에 대한 반론으로써 “旌善李氏 族譜『序文』”과 “안남국(安南國) 리(李)왕조(王朝)의 세보(世譜)“ 및 2007년 8월20일, 하노이에서 열린 “한-베트남 수교 15주년 기념 역사 심포지움”을 그 근거로 제시하며, 세부내용은 참고자료로간략히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정선이씨의 족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속속 발견되어,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에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패널들이 시인, 연예인, 역사학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학술적토의 보다는 gossip적 요소를 통해 대중의 호응과 관심을 유도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논란이 있는 역사적 기술을 진실로 看做하여 방송하는 것은 사실관계를 誤導하는 處事이며, 관련자들의 名譽를 侵害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론보도를 요청드립니다.
또한 귀사에서 제작 방송한 “무인시대”의 기획의도에도 표현하신 것과 같이, 무인집권자들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무인집권자에 대한 기록은 조선 초에 편찬된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을 뿐이며, 이 역시 집필 당시의 정치적 시대상황에 따른 역사관을 遵據로하여 조선의 성리학자들의史觀으로 작성된 역사서입니다. 위 역사서의 이러한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고 계신 귀사에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하여 아무런 前提 없이 부적절한 추론적 言及을 하여 관련자들의 名譽를 侵害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귀사의 의견을 구하는 바입니다.
참 고 자 료
가. 旌善李氏에 관한 역사적․학술적 참고자료
1. 旌善李氏 族譜序文에 나타난, 정선이씨의 시조
이양혼(李陽焜)), 자(字)는 元明, 송(宋) 봉(封)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중서문하(中書門下) 평장사(平章事) 검교태사(檢校太師) 수사공(守司空), 安南國 南平王 휘(諱) 건덕(乾德)의 第三子로 송(宋)나라(960-1279) 휘종때 국난(國難, 금나라침략)을 피하여 경주(慶州)로 오셔서 적(籍)을 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前), 현재의 베트남(당시 중국은 안남(安南)이라고 부름)에서는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왕조인 ‘응오왕조 (서기939년)가 세워졌고, 이후 딩(Dinh), 레(Le)왕조에 이어 ’리 왕조‘(Ly, 李 王朝)가 리꽁우언(Ly Cong Uan,이공온,李公蘊 )에 의해 만들어져 200여(餘) 년간(年間) 최초로 장기(長期) 왕조를 이어갔는데, 旌善李氏의 始祖(이양혼)과 花山李氏의 始祖(이용상, 화산군)은 이 ‘Ly 王朝’의 왕자(王子)들로 기술하고 있으며,
1677년, 숙종3년, 후손 生員 이익재(李益材)께서 쓴 최초서문(舊序)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우리 정선이씨는 안남에서 시작하여 고려조(918-1391년)에 이르러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는데 불행히 중엽에 난리(丙辰政變,1196년 4월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이의민선조 살해사건)로 인하여 족보를 잃어서 뿌리와 파(派)를 널리 구명하지 못하니 참으로 한스럽다.” 이후 다행히 8世 연(蓮)께서 피신하시어 후계를 이었지만 이런 연유에서 후세의 번창이 억제되어 올 수 밖에 없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1771년(영조47년) 후손 이정규(李正奎)께서 쓴 舊序에는 “우리 李氏는 고려조에 대대로 큰 벼슬을 이어왔으나 귀신에게 아첨하는 때를 만나게 되자 (유교를 숭상한 조선조를 일컬음)영화와 명예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편안하고 조용함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판종부(判宗簿)公(13世,龍)은 지위가 정승(政丞)반열(班列)에 올랐으나 먼저 치사(致仕, 관직을 그만둠)하셨고, 안렴사(按廉使,5道의 장관, 절도사-안찰사-안렴사로 개칭)公(14世,自生)은 벼슬이 높은 반열에 있었으나 명철하여 몸을 보전하는 유풍(遺風)이 또한 높다고 이를 만하다”는 기록이 있다.
2. 안남국(安南國) 리(李)왕조(王朝)의 세보(世譜)
송나라 眞宗 대중상부 3년 경술년(1010), 고(故) 남평왕 여환(黎桓)의 차자(次子), 교지군왕 여지충(至忠)이 포악무도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교지(交趾)의 대교(大校) 이공온(李公蘊 Ly Cong Uan, 송 태종 옹희2년 을유/985년생, )이 이를 축출하고 유후(留後)를 맡음으로 왕조(王朝)를 탄생시켰다. 송나라로부터는 특진 검교태부를 제수받고 정해군 절도사와 관찰처치등사와 안남도호 겸어사대부상주국에 임명받았으며 교지군왕(交趾郡王)과 추성순화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계속하여 동평장사와 개부의동삼사를 더하고 익대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1014년에 보절수정공신으로, 1018년엔 남평왕에 진봉하고 이듬해에 검교태위를 더하였다. 1028년에 44세로 별세하니 이 분이 ‘리 왕조’의 시작인 태조(太祖)가 되신다. 즉 이 분은 정선(旌善)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이신 양혼(陽焜)의 고조부(高祖父)가 되시며 화산이씨의 시조11) 이용상의 6대 선조(先祖)가 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3. 최근의 정선이씨의 학술적 조명
2007년 8월20일, 하노이에서 열린 “한-베트남 수교 15주년 기념 역사 심포지움”에서하노이 대학의 “판 후이 레” 역사과학회 회장이 한국 족보학자 “편홍기”옹 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1127년 李왕조 인종의 셋째 왕자 리 즈엉 꼰이 한국으로 건너와 경주에 도착한 뒤 정선에 입적해 정선 이씨의 시조가 되었고, 그의 묘 역시 정선군 바라산에 있음을 발표하였다.
이는 1226년 리롱떵(李龍祥,화산군)이 옹진군에 온 때보다 99년 앞선 것(2007.8.한국일보, 문화일보등), 韓國姓氏의 中國渡來硏究(全羅南道 경제통상국, 羅千洙씀)에서는 1126년 (고려)인종4년에 金나라 난(亂)은 피해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외 大越史記 등에 정선이씨와 화산이씨의 족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속속 발견되어,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에 있다.
나. KBS 드라마 “무인시대”의 기획의도
조선 성리학자들은 고려100년의 무신정권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을 왕을 시해하고 국정을 농단하고 전횡한 무인집권자들에게서 찾았다. 그래서 무인집권자들에대한 당대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조선 초에 편찬된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눈에 비친 무인집권자들은 정치경륜은 커녕 글조차 깨치지 못한 불학무식한 자들이었으며 천박하고 졸렬하고 부도덕하고 탐욕스럽고 염치를 모르는 잔학무도한 반역자들이었다. 무신정변을 부정했던 경대승을 제외하고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등 당대의 권력자들 대부분『高麗史』열전 반역 편에 기록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연 무신정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반동적 정권이었을까? 그러나 『高麗史』의 기록이 고려왕조를 뒤엎고 창업한 승자에 의한 승자를 위한 기록임을 염두에 둔다면 역설적으로 무인집권자들은 천출 태생의 신분의 족쇄를 끊고 최고 권력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들이었고 또한 출중한 용력(勇力)과 대담함과 냉철함으로 천하를 움켜쥐었던 난세의 영웅들임을 보여준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을 ‘백마위에 올라 탄 세계정신’이라고 칭한 바 있다. 같은 의미로 무인집권자들과 망이, 망소이, 만적 등 당시 민중봉기의 지도자들은 몽고제국 발흥이라는 세계사의 조류에 맞춰 정체되고 나약했던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고려의 자주성과 민중들의 자각을 일깨운 시대정신의 대변자들이 아니었을까? 이 드라마는 고려무인정권기의 주역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내어 조선성리학자들의 편협한 눈으로 왜곡되고 가려져있던 서사적 영웅들의 시대를 우리 민족의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역사의 한부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우리는 삼국지나 초한지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영웅들의 인간됨에 감동하고, 그들의 전략과 전술에서 국가나 기업의 경영, 처세술을 배우고자 하며 심지어 예술적 영감까지도 얻는다. 그러나 조조, 제갈량, 관운장, 초패왕 항우, 우미인, 한신 등은 모두 중원의 패권을 다투던 중국의 영웅들일뿐이다.
이 드라마는 난세에 고려의 황도 개경을 중심으로 천하를 쟁패했던 무인들을 우리민족의 ‘서사적 영웅’들로 복원시키고자 한다. ‘서사적 영웅’이란 단지 개인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세계사적 개인’을 말한다. 예컨대 진시황제는 통일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살육을 자행하고 아방궁을 지어 향락을 일삼고 분서갱유로 학문을 핍박한 인물이다. 그러나 진시황제에 대한 평가는 그 개인의 품성으로써가 아니라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의 통일을 이루어 낸 ‘세계사적 개인’으로 평가되고 파악된다. 같은 의미로 무인집권자들 중 한사람이었던 이의민이 물불 안 가리는 화급한 성격에 의종의 등뼈를 꺾어 죽였을 만큼 용력이 강하고 잔학무도한 성품을 지녔을지라도 이것은 개인의 캐릭터이다. 그는 신라부흥의 기치를 내건 당시 시대의 요구를 대변한 ‘서사적 영웅’으로 그려질 것이다. 물론 ‘서사적 영웅화’는 기록된 역사적 사실(史實)을 훼손하지 않는 한 드라마적 상상력에 의거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시대적 요청과 대의명분을 통해 권력을 움켜쥔 무인권력자들이 스스로 강한 캐릭터와 개인적 욕망이라는 인간의 굴레 때문에 명분이 왜곡되고 몰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현대 정치사의 냉철한 교훈을 재확인할 것이다. 더불어 민중봉기 지도자들과 이름없는 민중들이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비극적최후를 맞이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한다. 이것이 이 드라마가 역사교과서속에서 화석화되었던 800년전의 인물들을 감동과 교훈을 주는 ‘서사적 영웅’들로 되살려내고자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