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7년, 숙종3년, 후손 生員 이익재(李益材)께서 쓴 최초서문(舊序)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우리 정선이씨는 안남에서 시작하여 고려조(918-1391년)에 이르러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는데 불행히 중엽에 난리(丙辰政變,1196년 4월 최충헌, 최충수형제의 이의민선조 살해사건)로 인하여 족보를 잃어서 뿌리와 파(派)를 널리 구명하지 못하니 참으로 한스럽다.” 이후 다행히 8世 연(蓮)께서 피신하시어 후계를 이었지만 이런 연유에서 후세의 번창이 억제되어 올 수 밖에 없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1771년(영조47년) 후손 이정규(李正奎)께서 쓴 舊序에는 “우리 李氏는 고려조에 대대로 큰 벼슬을 이어왔으나 귀신에게 아첨하는 때를 만나게 되자 (유교를 숭상한 조선조를 일컬음)영화와 명예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편안하고 조용함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판종부(判宗簿)公(13世,龍)은 지위가 정승(政丞)반열(班列)에 올랐으나 먼저 치사(致仕, 관직을 그만둠)하셨고, 안렴사(按廉使,5道의 장관, 절도사-안찰사-안렴사로 개칭)公(14世,自生)은 벼슬이 높은 반열에 있었으나 명철하여 몸을 보전하는 유풍(遺風)이 또한 높다고 이를 만하다”는 기록이 있다.

1938년 무인보 서문에는 “자손들은 先代의 아름다움을 잘 계승하고 벼슬하려고 힘쓰지 않으며 문학을 돈독히 숭상해서 지금까지 사족(士族)의 칭호를 잃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는 려말(麗末) 충절(忠節)을 지킨 선조들과 관직을 일신의 영달로 생각지 않고 국가에 대한 봉직(奉職)으로 여기며 수행하다가 은퇴하신 13世 용(龍)과 분(芬) 선조(先祖) 등의 초연한 면면을 기리는 의미라 본다.


-주요인물-


시조(始祖) 이양혼(李陽混)

자(字)는 元明, 송(宋) 봉(封)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중서문하(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검교태사(檢校太師) 수사공(守司空), 安南國 南平王 휘(諱) 건덕(乾德)의 第三子로 송(宋)나라(960-1279) 휘종 때 국난(國難, 금나라침략)을 피하여 경주(慶州)로 오셔서 적(籍)을 하셨다.20) 부인 부굴진씨의 부친께서 송조(宋朝)의 문하시랑(門下侍郞)인 것으로 보아 경주로 오시기 前, 북송으로 일시 피신하셨다는 설에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21) 시조의 아드님(2세, 籣)께서 고려 인종 時(1123-1146) 예의판서(禮儀判書, 禮儀司의 으뜸, 정3품)관직을 하신 것으로 보아 경주이거 년도를 추정할 수 있다. 시조님의 묘는 정선(旌善) 파라동(婆羅洞)으로 기록되어있다.

6世 이의민(李義旼, ?-1196)22)

5세 번(蕃, 守太師門下侍中에 추봉됨)의 차자(次子), 초명(初名)은 의방(義方), 고려명종 때 삼한벽상공명삼중대광(三韓璧上功名三重大匡)23),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 문하시중(門下侍中)24),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병부사(判兵部事)25), 公은 신장이 8척이요 근력(筋力)이 출중하셨다. 의종 때 안렴사 김자양에 의해 선발,  경군(京軍)26)에 소속되어 스스로 경주에서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오시게 되었다.27) 경군(京軍)에 편입되어서는 곧 별장(別將)28)이 되었고, 1170년(의종24년)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변29)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중랑장이 되고 이어 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의종 복위를 위해 반기를 들자 이를 진압, 대장군이 되었고, 이듬해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고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179년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자 고향인 경주로 내려갔다가 경대승이 죽자 다시 조정에 나갔다.30) 1184년 공부상서, 이어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 등을 지낸 뒤 1190년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가 되었다. 1193년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의 난이 발생했으나 그해 12월 난은 진압되었고 이듬해 1194년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인사권 및 정치권력 전반을 장악하였다.31)1184년 이후 실제적으로 권력을 행사함으로 13년간의 절대 권한을 가지셨다.32)  그러나 1196년(명종26년,丙辰)4월 최충헌에 의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셨다.

장군 지광(이의민선조의 第3子)이 최충수와 사소한 원한이 있었다. 명종 병진년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니 시중공 이의민이 미타산 별장에 가 있었다. 최충수가 형인 최충헌(牛峰 崔氏)에게 이의민 부자를 죽이고자 제안하여 허락받고, 4월 무오일에 최충헌이 최충수와 생질 박진재와 집안사람 노석숭 등과 함께 미타산 별장에서 살해하고 같은 날 시중공의 아들 대장군 지순과 장군 지광이 살해되었으며 또 참지정사 이인성, 승선 문적, 최광유, 대사성 이순유등을 모두 살해했다. 이때 둘째 아들 지영은 안서부에 있었는데 최충헌이 한휴를 보내어 살해했다. 최충헌은 이어 한광연을 경주로 보내 시중공의 삼족을 멸하였다33)


이의민 선조의 폄하(貶下) 기록에 대한 소고(小考):

1) 이의민 선조의 출신은 천민출신34)이거나 소금장수인 아버지와 여종의 사이에서 태어났다35)는 기록이 있다. 우리 족보에 의하면 2世 란(蘭)께서  인종(仁宗)시(時) 金紫光祿大夫(종2품) 예의판서(禮儀判書, 禮儀司으뜸벼슬, 정3품 ), 3世 무정(茂貞)께서 인종(仁宗)시(時) 광정대부(匡靖大夫,종2품) 정당문학(政堂文學, 內史門下省소속)으로 봉직하셨으며 

4世 계운(啓運)께서는 의종(毅宗) 시(時) 文科에 올라 교서랑(校書郞, 비서성소속 정9품)이 되셨으나 병으로 불사(不仕,벼슬을 시켜도 나서서 하지 아니함)하셨다. 아쉽게도 5世孫인 의민(義旼)의 백부님과 현고(顯考, 돌아가신 부친)께서는 우리 족보에 당시 관직 기록이 없고, 나중에 수태사문하시중(守太師門下侍中)으로 추봉되신 바 있다. 그러나 부친 당대(當代)의 관직 기록이 없는 것으로 천민이나 소금장수로 둔갑하여 기록된 것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음이 있다. 義旼 선조 등 정변 주동자들에 관해서는 후세(고려말-조선조) 사가(史家)들의 가필(假筆)과 보복적 폄하에 의해 이미 반역 도당으로 치부된 바 있으며, 많은 사료(史料)들이 폐기되었다고 한다. 잘 못된 것에 대한 도전이 용납될 수 있는 용기를 사가(史家)들은 인정할 수가 없었고, 정권을 유지하는 측에서는 반역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기에 이를 찬미할 수는 없었으리라 본다. 이의민, 우리 선조께서는 분명 안남국에서 이 땅에 온 왕족의 후예로서 그 기상을 버리지 않고 야심을 꿈꾼 우리의 조상이다. 만약 그가 천민출신이었다면 우리는 그를 더 흠모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남방의 황룡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던 왕족의 피가 흘렀던 인물이었다.

2) “권력을 쥔 후 벼슬을 팔고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등 나라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한편, 반역을 도모하다가 최충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전주(銓注:관리임명권)를 마음대로 하며 독재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세도를 믿고 횡포하여 인심을 잃었다.”36) 이런 기록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확인할 필요도 있지만, 실권을 장악했던 당시의 절대 무인 권력자의 곁에는 자타의 뜻으로 이런 일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벼슬을 위해 목숨 부지를 위해 재물을 드렸다면 그것은 파렴치한 양반들의 것이 더 많았으리라! 절대 권력이면서 가난한 백성의 몇 푼을 뜯기 위해 그 이름을 팔 자가 어디 있을꼬? 많은 물질을 바친 자들의 후예가 언젠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서 이런 매도를 하지 않았길 간절히 바라며, 권력자의 교만과 횡포가 사실이어서 백성이 괴롭힘을 당했다면 800년 후손인 우리가 되새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원 시조는 서기 1010년, 안남국의 포악무도했던 교지군왕을 몰아내고 베트남의 최초 장기(長期) 독립왕조인 “Ly왕조”를 세운 건국자였다. 그의 후손이 170년 후 이곳에서 포악한 왕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으리라 우리는 확신한다.

3) 2003년 2월 8일 ~ 2004년 8월 15일 방영된 KBS드라마 ‘무인시대’ 드라마를 본 많은 시청자들이 이의민선조를 드라마에서 본 기억대로를 인터넷에 기록, 배포하고 있는 현실이다. 많은 드라마적 오류들이 역사적 사실로 굳어져가고 있다. 시청자들은 ‘무인시대’드라마의 기획의도와는 무관하게 이의민선조(이덕화 분)의 도끼가 간신배들의 급소를 스치는 데 사용되어진 것에 쾌감을 느낄 뿐, 그가 어떤 신분인지는 상관치 않는다. 그들은 천민이었기에 더 통쾌했을 수 있겠지만 허구(fiction)적 재미 뒤에는 우리 후손의 상처가 너무 큰 것이 사실이다. 이 드라마를 제작한  KBS의 기획의도를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가 그 영웅의 가치를 다시 확립할 필요가 절실하다.

다음은 KBS가 전하는 드라마의 의도이다(KBS기록일부):

조선 성리학자들은 고려100년의 무신정권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을 왕을 시해하고 국정을 농단하고 전횡한 무인집권자들에게서 찾았다.?그래서 무인집권자들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그들은 조선 초에 편찬된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을 뿐이다.조선 성리학자들의 눈에 비친 무인집권자들은 정치경륜은 커녕 글조차 깨치지 못한 불학무식한 자들이었으며 천박하고 졸렬하고 부도덕하고 탐욕스럽고 염치를 모르는 잔학무도한 반역자들이었다.무신정변을 부정했던 경대승을 제외하고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등 당대의 권력자들 대부분『高麗史』열전 반역 편에 기록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과연 무신정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반동적 정권이었을까? 그러나 『高麗史』의 기록이 고려왕조를 뒤엎고 창업한 승자에 의한 승자를 위한 기록임을 염두에 둔다면 역설적으로 무인집권자들은 천출 태생의 신분의 족쇄를 끊고 최고 권력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들이었고 또한 출중한 용력(勇力)과 대담함과 냉철함으로 천하를 움켜쥐었던 난세의 영웅들임을 보여준다.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을 ‘백마위에 올라 탄 세계정신’이라고 칭한 바있다. 같은 의미로 무인집권자들과 망이, 망소이, 만적 등 당시 민중봉기의 지도자들은 몽고제국 발흥이라는 세계사의 조류에 맞춰 정체되고 나약했던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고려의 자주성과 민중들의 자각을 일깨운 시대정신의 대변자들이 아니었을까?이 드라마는 고려무인정권기의 주역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내어 조선성리학자들의 편협한 눈으로 왜곡되고 가려져있던 서사적 영웅들의 시대를 우리 민족의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역사의 한부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우리는 삼국지나 초한지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영웅들의 인간됨에 감동하고, 그들의 전략과 전술에서 국가나 기업의 경영, 처세술을 배우고자 하며 심지어 예술적 영감까지도 얻는다. 그러나 조조, 제갈량, 관운장, 초패왕 항우, 우미인, 한신 등은 모두 중원의 패권을 다투던 중국의 영웅들일뿐이다.

이 드라마는 난세에 고려의 황도 개경을 중심으로 천하를 쟁패했던 무인들을 우리민족의 ‘서사적 영웅’들로 복원시키고자 한다.?‘서사적 영웅’이란 단지 개인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세계사적 개인’을 말한다. 예컨대 진시황제는 통일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살육을 자행하고 아방궁을 지어 향락을 일삼고 분서갱유로 학문을 핍박한 인물이다. 그러나 진시황제에 대한 평가는 그 개인의 품성으로써가 아니라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의 통일을 이루어 낸 ‘세계사적 개인’으로 평가되고 파악된다. 같은 의미로 무인집권자들중 한사람이었던 이의민이 물불 안 가리는 화급한 성격에 의종의 등뼈를 꺾어 죽였을 만큼 용력이 강하고 잔학무도한 성품을 지녔을지라도 이것은 개인의 캐릭터이다. 그는 신라부흥의 기치를 내건 당시 시대의 요구를 대변한 ‘서사적 영웅’으로 그려질 것이다. 물론 ‘서사적 영웅화’는 기록된 역사적 사실(史實)을 훼손하지 않는 한 드라마적 상상력에 의거하여 이루어질 것이다.시대적 요청과 대의명분을 통해 권력을 움켜쥔 무인권력자들이 스스로 강한 캐릭터와 개인적 욕망이라는 인간의 굴레 때문에 명분이 왜곡되고 몰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현대 정치사의 냉철한 교훈을 재확인할 것이다. 더불어 민중봉기 지도자들과 이름없는 민중들이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한다.이것이 이 드라마가 역사교과서속에서 화석화되었던 800년전의 인물들을 감동과 교훈을 주는 ‘서사적 영웅’들로 되살려내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렇다. 우리 선조 이의민을 통하여 우리 국민은 다시 역사를 보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9世 이우원(遇元)

병진정변( 丙辰政變, 1196년 4월 최충헌, 최충수형제 등이 6세 이의민 선조 등을 살해한 사건)시  6세 희민의 자부(子婦)께서 8世 蓮을 데리고 피신하시어37) 代를 잇게 하셨으나  8世 연(蓮)께서는 20年을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독서를 하시면서 生을 마칠 수 밖에 없었다. 그 아드님이신 9世 우원(遇元)께서 강원도 정선(旌善)으로 이거(移居)하여 정선을 관향(貫鄕)으로 삼으셨고, 다시 출사(出仕)하시어 국자생원(國子生員)이 되셨다. 나중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봉되셨다.

10世 이형규(亨圭)

18세(歲)에 등과(登科)하시어 고려 충렬왕(1275-1308년)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정1품 上)38)첨의중찬(僉議中贊) 수문전(修文殿)태학사(太學士)에 오름

12世 이초(初)

11世 석덕(碩德)의 第三子로 1322년(충숙9년)생, 고려 충숙왕(忠肅王)조(朝)에 출사하여 중랑장(中郞將, 각 領소속 정5품 武官)으로 계시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함께 왕실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다가 끝내 순절하셨음. 이초 선조께서는 고려 말 충절인사 구헌(九獻: 국가에 헌신한 9명/최영,변안열,조민수,이림,염흥방,윤이,이초,이원굉,왕안덕)의 一員이며 그 충절이 현대에까지 이르러 ‘정선의 인물’ 중 “忠義의 인물”로 기록(2008년 현재, 정선군)되어 오고 있다.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윤이(尹彝)와 함께 선조 이초(李初)께서 비밀사절로 중국에 있으면서 당시 왕실의 종실(宗室)이 아닌 시중 이성계의 인척 왕요(공양왕)가 즉위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당시 이미 내쫓겼던 재상 이색 등의 연서로 밝히고, 혁명 의도를 막기 위해 협조를 구한 사건이 명나라에 갔던 사신들에 의해 밝혀져 우현보, 권중화, 경보, 장하, 홍인계, 윤유린, 최공철 등은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이색,이임,우인열,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등은 청주(淸州) 감옥에 가두고 국문하게 되었다. 결국 2년 후 이성계는 조선(朝鮮)을 세웠고 밀사 이초께서는 명나라 장쑤 성(江蘇省)에 유배되시어 그곳에서 순절하셨다. 이 사건이 ‘이초(彝初)의 옥사(獄事)’사건이다. 朝鮮王朝實錄(太祖1卷 總序111)에서는 이를 두고 무고(誣告)하였다는 표현을 하지만 당시의 고려 충절인사39)들의 눈에는 잘 못된 정권의 탄생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의 순절 정신이 두문동(동쪽 두문동으로 48명의 武人, 서쪽 두문동으로72人의 선비)에 전해지고 거기 유신(遺臣)들은 고려 충절로서 더 정진했고, 전오륜외 6명(七賢)은 나중 정선 칠현동에 은거하면서 옥사 사건 등을 애도하며 한시(漢詩)를 지어 불렀는데 정선아리랑의 ‘아라리’란 이색(李穡,1328-1396)의 시(詩)에 자주 쓰인 표현인 ‘수지(誰知)’(누가 알리요)가 정선지역백성들에 의해 민요로 불리는 과정에서 ‘알리-아리-아라리’로 변천되었다고 한다.40)

13世 이용(龍)

초(初)의 長子, 공민왕 때 정순대부(正順大夫, 정3품)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지위가 정승(政丞) 반열(班列)에 올랐으나 먼저 치사(致仕, 관직을 그만둠)하시고 황해도 평산군 주암동에 사시며 해서(海西,황해도)지방에 부흥의 발판을 놓으셨다.

13世 이분(芬)

초(初)의 次子, 1353년생, 관북(關北)지방의 원종공신(原從功臣), 안변도호부사(도호부 으뜸벼슬,4-6품관)에 이르렀고 마침내 안변에서 은퇴하여 사심으로 세거지의 발판을 놓으셨다.

14世 이자생(自生): 이상 고려조(朝)

13世 용(龍)의 長子, 고려 말 중현대부(中顯大夫, 정3품 下)로 군기시윤(軍器寺尹)과 안렴사(按廉使,5道의 장관, 절도사-안찰사-안렴사로 개칭)를 지내심, 정선이씨 ‘애정유적지(艾井遺趾地)’를 있게 하신 선조이다.

애정은 황해도 재령군 북쪽10리(里) 되는 지점에 있다. 고려말엽 자생(自生)께서 황해도 안렴사로 지방을 순행할 때에 이곳에 이르러 “이곳은 땅이 비옥하고 골짜기가 넓어서 살 만하다”하니 막하의 손님들이 이곳에 물이 없음을 아뢴 즉, 公이 쑥 두 뿌리가 총생(叢生)하는 곳을 가리키며 “이 곳을 파면 샘물을 얻을 수 있다”하고 즉시 역졸(驛卒)을 시켜 쑥을 뽑아내게 한 후 겨우 몇 자를 파자 맑은 샘물이 용솟음쳐 나오니 매우 시원하고 상쾌하였다. 公은 임기가 끝나고 이곳에 우거(寓居)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마침내 마을을 “애정(艾井)”이라 이름 하였다. 우리 족보와 재령군지(郡誌)를 통하여 더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다.

15世 이존실(存實): 려(麗)말(末)-조선조(朝)

1389年(恭讓元年)生, 14세 자생의 아들, 조선조에 들어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진의부위(進義副尉)로 사직(司直)이셨다. 아들로는 참군공파, 사직공파, 교위공파의 파조가 되는 부사직(副司直,종5품) 극정(克精), 부사직(副司直) 극효(克孝), 부사정(副司正) 극선(克善)을 두셨다.

15世 이흥망(興望): 조선조(朝)

1393年(太祖2年)生, 12세 초(初)의 차남이신 13世 분(芬)의 손자이시며 세종 조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를 지내고 아들로 승지공파의 파조이신 인(仁), 진사공파의 파조이신 의(義), 선전공파 파조이신 예(禮)와 지(智), 신(信)을 두셨다.

15世 이익손(益孫)

14세 지함(之涵)의 長子, 사정(司正)까지 봉직, 정국공신(靖國功臣:1506년 9월 1일의 중종반정의 공신들에게 내린 훈호)으로 한남(漢南)지방의 대표인물로 가세를 넓히심, 양주(楊洲) 해동촌(海東村)에 모셔짐 

20) 정선이씨족보
21) 정선이씨초가
22) 두산인물사전에는 1197년으로 잘 못 기록됨
23) 벽상공신의 무관, 정1품의 품계
24)문하성소속 종1품관직
25) 병부의 장, 종1품
26)서울 각 영문에 소속(所屬)된 군사(軍士)
27) 정선이씨족보
28) 정7품의 무관직
29) 대장군(大將軍) 정중부(鄭仲夫)등이 국왕의 보현원(普賢院) 행차 시에 순검군(巡檢軍)을 모아 호종한 문관과 대소신료 등을 살해함으로써 시작하여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한 사건. 배경에는 무관을 경시하고 문관을 우대하는 고려의 우문정책이 있었다.
30) 명종의 부름으로 병부상서를 받고 올라온 것으로 기록(실질적 무인 최고집정자가 됨): 다음백과사전
31) 야후백과사전
32) 다음국어사전
33) 정선이씨족보 중‘성씨본원’에서, 그러나 다음백과사전엔 둘째아들 지영(至榮)이 최충수(忠粹)의 집비둘기를 빼앗은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적혀있다.
34) 두산백과사전
35) 브리태니커사전, 다음백과사전
36) 두산백과, 브리태니커, 다음백과사전
37) 혹은 연(蓮)께서 복중(腹中)에 계실 때 어머니가 피신하시어 유복자를 낳아 代를 잇게 함
38) 공민왕 때 가서는 ‘壁上三韓三重大匡’
39) 三隱(포은정몽주, 야은길재, 목은이색)외에 十隱, 十義, 十烈, 십건신, 구헌(九獻), 九貞 등으로 구분하여 내려옴
40)아리랑연구가 김연갑, 동아닷컴2006,5,26, 연합뉴스2006,6,6, 강원일보2006,6,21등